지난 17일부터 방송되고 있는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2는 첫 방송부터 1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전 시즌의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뭐니뭐니해도 <슬의생>의 매력은 딱딱하고 무거울 수 있는 병원과 의사들의 이야기를 인간적이고 유쾌하게 다룬다는 점이다. <응답하라>시리즈에 이어 <슬기로운 깜빵생활>까지 히트시킨 신원호 PD와 이우정 작가 콤비가 이번에도 시청자들의 정서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트콤에 가까울 정도로 유쾌한 재미가 가득한 <슬의생>에서도 여느 의학드라마 못지 않게 진지하고 무거워지는 순간이 있다. 어린 환자들이 등장하는 소아병동의 이야기가 나오면 유독 그렇다. 물론 드라마이기 때문에 더 극단적으로 연출한 부분도 있지만 드라마 속에서 아픈 환우를 자식으로 둔 부모들은 온전한 멘탈을 유지하지 못한다. 

대개의 경우, 아픈 아이를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고 좌절하는 부모의 모습이 연상되지만 때로는 아이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공부를 하다가 그 병의 권위자가 되고 심지어 치료약을 발명하는 부모도 있다. ALD(부신 대뇌백질 위축증)라는 희귀병에 걸린 아이를 치료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부모의 이야기를 그린 조지 밀러 감독의 가족 의학드라마 <로렌조 오일>처럼 말이다. 
 
 <로렌조 오일>은 <매드맥스>의 감독으로 유명한 조지 밀러 감독의 흔치 않은 가족 의학 드라마다.

<로렌조 오일>은 <매드맥스>의 감독으로 유명한 조지 밀러 감독의 흔치 않은 가족 의학 드라마다. ⓒ UIP 코리아

 
장르를 마구 넘나드는 의사 출신 감독

호주 출신의 조지 밀러 감독은 영화를 매우 좋아하는 의학도였다. 실제로 1970년대 중·후반까지 정형외과 전공의로 일하던 밀러 감독은 멜버른 대학에서 영화 특강을 들을 때 만난 바이론 케네디와 의기투합해 1979년 저예산 영화 한 편을 만들었다. 그 작품이 바로 SF 액션의 전설이 된 <매드 맥스>였고 밀러 감독은 이를 계기로 전업 감독의 길을 선택했다.

밀러 감독은 <매드 맥스2>와 <환상특급>의 공동 연출에 참여하며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1983년 밀러의 영화적 동지 케네디가 헬기 추락 사고로 요절했고 밀러 감독은 <매드 맥스3>의 연출을 조지 오길비와 함께 했다. 밀러 감독이 액션 연출에만 참여한 <매드 맥스3>는 시리즈 중에서 가장 졸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밀러 감독은 1992년 <로렌조 오일>을 통해 '가족 의학드라마'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장을 던졌다. 

화려한 액션도, 특수효과도 필요치 않았던 <로렌조 오일>은 북미에서 단 700만 달러의 흥행 성적에 그쳤다. 하지만 <로렌조 오일>은 199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조지 밀러가 각본상, 수잔 서랜든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의학 지식이 없는 사람이 한 의학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가장 잘 알고 있었던 밀러 감독은 <로렌조 오일>의 '기적 같은 실화'를 리얼하게 연출했다.

밀러 감독은 1995년 돼지가 주인공인 판타지 드라마 <꼬마돼지 베이브>를 제작했고 1998년엔 직접 속편 감독으로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꼬마돼지 베이브2>는 흥행에 참패했다. 8년 동안 절치부심한 밀러 감독은 2006년 애니메이션 <해피 피트>를 연출해 세계적으로 3억8000만 달러의 흥행 성적을 올리며 명예 회복에 성공했다. 그리고 2015년 칠순이 넘은 나이에 자신의 대표작 <매드 맥스>를 부활시켰다.

밀러 감독의 노익장이 빛난 <매드 맥스 : 분노의 도로>는 세계적으로 3억7700만 달러의 흥행 성적을 올렸고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무려 6개 부문을 휩쓸었다. 밀러 감독은 일찌감치 <매드 맥스 : 웨이스트랜드>의 각본을 완성했지만 제작사 및 배급사와의 갈등으로 현재 제작에 난항을 겪고 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밀러 감독은 이제 전세계 액션 영화 팬들이 한 마음으로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감독이 됐다.

아픈 아이 앞에서 부모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로렌조의 엄마 미카엘라를 연기한 수잔 서랜든은 1993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로렌조의 엄마 미카엘라를 연기한 수잔 서랜든은 1993년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 UIP 코리아

 
아프리카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6세 소년 로렌조(잭 오말리 그린버그 분)는 미국으로 돌아온 후 ALD(부신 대뇌백질 위축증)라는 희귀병에 걸렸다. 5~10세의 남자 어린이에게서 발병할 수 있는 이 무서운 병은 치료법은커녕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이 병에 걸린 아이는 실명, 사지마비, 청력상실, 실어, 발작 등에 시달리다가 길어야 2년 밖에 살지 못한다는 끔찍한 사실이 알려졌을 뿐이다.

의사로부터 이 같은 사실을 전해들은 오거스토(닉 놀테 분)와 미카엘라(수잔 서랜든 분) 부부는 커다란 충격에 빠지지만 아이 앞에서는 애써 웃음을 보였다. 오거스토는 혼자 도서관에서 ALD에 대한 임상사례 연구에 대한 자료를 찾아 보지만 모두 2년 안에 사망한다는 내용뿐. 담담한 표정으로 아내와 아들을 안심시킨 오거스토는 홀로 도서관 계단에서 다리가 풀려 밑으로 굴러 떨어지며 오열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좌절만 하고 있을 순 없다. 오도네 부부는 로렌조를 살리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다. 로렌조의 병에 좋다는 음식을 먹여 보지만 역효과만 낳았다. 입원을 통해 로렌조에게 추적 관찰을 해주기로 약속한 병원에서는 로렌조를 실험대상으로밖에 여기지 않는다. 답답함을 느낀 오도네 부부는 로렌조의 병에 대해 직접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지만 그들은 의학적 지식이 부족한 비전문가이기 때문에 곧 한계에 부딪힌다. 

하지만 오도네 부부는 포기하지 않았다. 로렌조를 위한 노력이 사랑하는 로렌조를 위해, 그리고 같은 병을 앓고 있는 다른 환우들을 위해 결코 헛된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결국 오도네 부부는 올레산과 에루크산을 조합한 '로렌조 오일'을 발명하게 되고 이 약을 투약한 로렌조는 발병 진단 32개월 만에 혈액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온다(ALD 초기였던 이웃의 제이크는 로렌조 오일을 투약해 병에서 완치된다). 

로렌조의 아버지이자 실존 인물인 오거스토 오도네는 미국의사협회에서 명예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영화가 개봉할 당시 14살이었던 로렌조는 2008년까지 생존했다가 3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년 밖에 살지 못한다던 로렌조가 무려 24년을 생존한 것이다. 그리고 영화 <로렌조 오일>은 로렌조 오일의 도움을 받은 어린이들의 미소로 막을 내린다. <로렌조 오일>은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 의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이야기로 남아 있다.

영화의 리얼리티 살린 니콜라스 박사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가족 의학드라마 <로렌조 오일>은 조지 밀러 감독의 커리어에서 의미가 남다른 작품이다.

비록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가족 의학드라마 <로렌조 오일>은 조지 밀러 감독의 커리어에서 의미가 남다른 작품이다. ⓒ UIP 코리아

 
<로렌조 오일>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하지만 의학과는 무관한 삶을 살던 사람이 희귀병에 걸린 아들을 살리기 위해 의학 공부를 시작하고 한 분야의 권위자가 됐다는 스토리는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오도네 부부의 노력과 여정에서 때론 갈등하고 때론 도움을 주며 영화의 리얼리티를 살린 캐릭터가 바로 피터 유스티노브가 연기한 니콜라스 박사다.

니콜라스 박사는 오도네 부부에게 식단을 통해 병의 진행을 늦추는 실험을 처음 제안했고 이후에도 오거스토는 의학적 궁금증이 있을 때마다 니콜라스 교수를 찾았다. 니콜라스 교수는 기본적으로 오도네 부부의 불행을 동정하지만 의사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는다. 특히 오도네 부부가 에루크산의 효과를 발견했을 때도 "당신은 자식만 책임지면 되지만 나는 고통 받는 모든 환자들을 책임져야 해요"라는 말로 검증되지 않은 약의 처방을 허락하지 않았다.

니콜라스 박사 역을 맡았던 영국 출신의 고 피터 유스티노프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2번이나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던 뛰어난 배우다. 대표작으로는 로버트 테일러 주연의 <쿼바디스>(1951년)와 스탠릭 큐브릭 감독의 <스파르타쿠스>(1960년), 그리고 직접 감독까지 맡아 베를린 영화제에서 뉴탤런트상을 수상했던 <해머스미스 이즈 아웃>(1972년) 등이 있다.

<로렌조 오일>에서 로렌조 오도네를 연기한 아역배우 잭 오말리 그린버그는 점점 병이 깊어지는 아이 로렌조 역을 잘 소화했다. 하지만 그린버그에겐 <로렌조 오일> 이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였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로렌조 오일 조지 밀러 감독 수잔 서랜든 닉 놀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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