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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받고 조용히 살려 했더니... '위험한 은퇴자' 잘못 건드린 정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노장배우들이 모여서 만든 영화 <레드>

24.03.29 09:06최종업데이트24.03.29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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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리암 니슨의 대표작 <테이큰>을 보면 주인공 브라이언 밀스의 딸 킴(매기 그레이스 분)이 친구와 프랑스로 여행을 갔다가 인신매매 조직에 의해 납치된다. 하지만 은퇴한 CIA 특수요원 브라이언은 당황하지 않고 범인이 남긴 한마디("Good Luck")를 단서로 은퇴한 요원 친구들을 동원해 범인의 국적과 활동하는 조직을 유추해낸다. 그리고 브라이언은 침착하면서도 끈질긴 추격 끝에 딸을 납치한 조직에 대한 응징에 들어간다.   

사실 어떤 분야에서든 경력이 쌓이고 나이가 들면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은퇴'라는 것을 하게 된다. 흔히 한 분야에서 은퇴를 했다고 하면 '퇴물'로 취급을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이는 그만큼 그 분야에서 풍부한 경험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스포츠에서는 가끔씩 은퇴한 스포츠 선수가 자선경기 등에서 현역선수를 훨씬 능가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한다.

영화에서도 <테이큰>처럼 특정 분야에서 은퇴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만들어지곤 한다. 은퇴한 주인공은 현역으로 활동하는 사람과 조직으로부터 그 능력을 의심 받기도 하지만 현역시절에 버금가는 경험과 노하우를 발휘하면서 어려운 사건을 해결하기도 한다. 지난 2010년에 개봉했던 브루스 윌리스와 모건 프리먼, 존 말코비치 등 노장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던 로베르트 슈벤트케 감독의 코믹액션물 <레드>가 대표적이었다.
 

노장배우들의 활약이 돋보이는 <레드>는 세계적으로 2억 달러 가까운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 (주)화앤담이엔티

 
칸-베니스-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휩쓴 대배우

1945년 런던에서 태어난 헬렌 미렌은 러시아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다가 1967년 배우로 데뷔해 <한 여름 밤의 꿈> <햄릿> <엑스칼리버> 등 여러 작품에서 주연과 조연을 오가며 활동했다. 여느 유명 스타들처럼 한 시대를 풍미하는 아이콘으로 군림한 적은 없지만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며 영국을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 중 한 명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렌은 특히 세계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프랑스의 칸 영화제와 인연이 깊었다. 1984년에는 팻 오코너 감독의 <칼의 고백>으로 생애 첫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11년이 지난 1995년에도 니콜라스 하이트너 감독의 <조지 왕의 광기>를 통해 다시 한 번 '칸의 여왕'에 등극했다. 미렌은 2002년에도 고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고스포드 파크>를 통해 미국배우조합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뛰어난 연기력을 인정 받았다.

미렌이 배우로서 정점을 찍은 시기는 2000년대 중반이었다. 미렌은 2006년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의 <더 퀸>에서 지난 2022년에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연기했다. 1997년 다이애나 스펜서 왕세자비 사망 당시의 영국정부와 왕실의 이야기를 다룬 <더 퀸>에서 눈부신 연기를 선보인 미렌은 베니스 영화제 볼피컵 여우주연상을 비롯해 미국과 영국의 아카데미, 미국배우조합상,크리틱스 초이스 시상식의 여우주연상을 싹쓸이했다.

2007년 <내셔널 트레저: 비밀의 책>에서 니콜라스 케이지의 어머니 에밀리 애플턴을 연기한 미렌은 2010년 <레드>에서 전설적인 여성 암살자 빅토리아 역을 맡았다. 미렌은 코믹하면서도 화려한 액션연기로 새로운 매력을 발산했고 2013년에 개봉한 속편 <레드: 더 레전드>에서도 다시 한 번 빅토리아를 연기했다(<레드: 더 레전드>에는 전편에서 사망한 모건 프리먼 대신 이병헌과 캐서린 제타 존스, 안소니 홉킨스 등이 새로 가세했다).

2013년 픽사 애니메이션 <몬스터 대학교>에서 몬스터 대학교의 학장 하드스크래블의 목소리 연기를 한 미렌은 <우먼 인 골드>와 <트럼보> 등을 통해 꾸준히 좋은 연기를 선보였다. 2017년부터 <분노의 질주> 시리즈에 합류한 미렌은 '쇼 3남매'의 어머니 막달레나 쇼 역을 맡아 2023년까지 4편의 <분노의 질주> 시리즈에 출연했고 2023년엔 영화 <바비>에서 내레이션을 맡아 영화의 시작을 알렸다.

<익스펜더블>보다 두 달 늦게 개봉한 <레드>
 

<레드>의 노장배우들은 그 어떤 젊은 배우들보다도 화끈한 액션연기를 선보인다. ⓒ (주)화앤담이엔티

 
영화의 제목인 < RED >는 빨간색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닌 '은퇴했지만 극히 위험하다'는 의미를 가진 'Retired: Extremely Dangerous'의 약자다. 'RED'는 영화의 주인공인 전직 CIA 요원 프랭크 모세스(브루스 윌리스 분)의 별명이기도 하다. 은퇴 후 연금을 받으며 조용히 살고 있던 프랭크는 CIA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을 제거하려 하자 연금상담원 사라(메리 루이스 파커 분)와 함께 옛 친구들을 모아 CIA의 음모를 밝히려 한다.

<레드>는 5800만 달러의 제작비가 말해주듯 엄청난 물량으로 승부를 하는 대형 블록버스터 영화들에 비하면 규모가 썩 큰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아기자기하고 섬세한 액션과 1990년대 액션 장인 브루스 윌리스를 중심으로 모건 프리먼, 존 말코비치, 헬렌 미렌 등 연기파 배우들이 선보이는 가볍고 유쾌한 연기가 매력적인 영화다. <레드>는 세계적으로 1억 9900만 달러의 괜찮은 흥행성적을 기록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레드>는 전성기가 지난 노장 배우들이 모여서 만든 액션영화라는 점에서 두 달 먼저 개봉한 영화 <익스펜더블>과 비교되곤 했다(심지어 브루스 윌리스는 <레드>에선 주연, <익스펜더블>에선 카메오로 출연했다). 단순히 캐스팅의 화려함만 보면 <익스펜더블>이 <레드>를 능가했고 실제 흥행성적 역시 2억 7400만 달러의 <익스펜더블>이 1억 9900만 달러의 <레드>보다 좋았다(제작비 대비 흥행성적은 두 작품이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익스펜더블>이 미국의 영화평론사이트 로튼토마토에서 신선도 42%, 관객점수 64%를 받은 것에 비해 <레드>는 신선도와 관객점수에서 모두 72%를 받았다. <익스펜더블>이 왕년의 액션배우들을 모으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면 <레드>는 DC코믹스 원작의 이야기에 그에 맞는 배우들을 구성해 만든 영화였다. <레드>의 스토리와 서사가 <익스펜더블>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탄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레드>를 연출한 독일 출신의 로베르트 슈벤트케 감독은 2002년 <타투>를 통해 데뷔한 후 2005년 조디 포스터 주연의 <플라이트 플랜>, 2009년 판타지 멜로 <시간 여행자의 아내>를 연출했다. <레드> 이후 2013년 < R.I.P.D: 유령 퇴치 전담반 >, 2015년 SF 액션 <인서전트>를 만든 슈밴트케 감독은 2016년 <다이버전트> 시리즈의 세 번째 영화 <얼리전트>를 연출했다.

동료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한 맏형
 

모건 프리먼이 연기한 조는 최후의 순간까지 맏형다운 모습으로 동생들을 위해 희생했다. ⓒ (주)화앤담이엔티

 
<레드> 출연 당시에도 이미 70대였던 노장배우 모건 프리먼은 <레드>에서 오랜 기간 프랭크와 함께 일했던 CIA 선배 조 매디슨을 연기했다. 등장할 때부터 간암 4기로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던 조는 빠른 판단으로 동료들을 불러 위기에 빠진 프랭크를 구했다. 그리고 CIA의 포위망이 좁혀왔을 때는 스스로를 희생해 동료들이 빠져 나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줬다(물론 코믹 액션물답게 눈물의 이별장면 따위는 나오지 않는다). 

배우와 감독, 작가, 영화제작자, 패션 디자이너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만능 재주꾼 존 말코비치가 연기한 마빈 보그스는 젊은 시절 11년 동안 환각제를 투여 받고 정신이 나가버린 캐릭터다. 영화 중반에는 뒤에서 걸어오던 여성을 붙잡고 자신을 미행하는 요원이라며 그녀를 죽이려 한다. 프랭크는 그 여성의 가방에 아무 것도 없다며 그녀를 풀어주지만 알고 보니 그 여성은 정말로 마빈과 프랭크 일행을 미행하던 CIA 요원이었다.

<엑스맨> 오리지널 3부작에서 미 육군 군무원이자 과학자 윌리엄 스트라이커를 연기했던 배우 브라이언 콕스는 <레드>에서 프랭크와 인연이 있는 러시아 대사 이반 시마노프를 연기했다. 사실 이반은 프랭크보다 빅토리아와 더 깊은 인연이 있는 인물로 KGB 요원 시절 빅토리아와 연인 사이였다. 가슴에 빅토리아가 쏜 총알자국 3방이 선명하게 박혀 있는 이반은 빅토리아에 대한 애정을 갖고 프랭크 일행을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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