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책상에 앉아서 쓰는 게 아니다

등록 2024.03.20 08:27수정 2024.03.20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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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쓴다고 할 때, 책상에 앉아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도구 - 노트북, 아이패드, 핸드폰 등- 를 활용해서 쓰는 것 같은 이미지가 강하다. 소위 말하는 작가 포스가 좔좔 넘치는 장면이다. 하지만 사실 책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글을 쓴다기보다 도구를 사용해서 쏟아 놓는 것일 뿐이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나의 경우는 그러하다. 뭘 써야 할지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책상에 앉아서 글 한번 써볼까 해서 성공한 적이 거의 없다. 아이를 안고 있을 때나, 집안일을 할 때나, 운동할 때, 미리 마음을 잘 살피고, 글감을 정하고, 대략 이렇게 구성을 해야겠다고 큰 틀을 짜놓고, 몇몇 문장들을 품은 채, 책상에 앉아서 그것을 쏟아 놓을 뿐이다.

그래서 글은 책상에서 쓴다고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책상에서는 삶이라는 길 위에서 마음속에 써놓은 것들을 끄집어내 쏟아 놓을 뿐이다. 글은 언제나 마음속에 제일 먼저 쓰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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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 pexels

 
이런 맥락에서 할 수만 있다면 매일 무언가를 쓰려고 일단 마음만 먹어도, 내면에서는 아름다운 움직임들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움직임들은 반드시 외부의 변화를 일으킨다. 눈을 들어 좀 더 주변을 따뜻하게 담아내려고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마음의 시력도 따뜻해져 버린다. 몸의 일부처럼 되어버린 이어폰과 잠시 작별을 고하고, 귀를 열어 주변의 소음과 연대하고자 하면 자연스레 작은 것들을 위한 시들이 노래보다 더 크게 마음을 울린다.

익숙하게 오르락내리락 했던 장소들의 계단 숫자는 과연 몇 개로 구성이 되어있는지, 동네에 편의점은, 헤어숍은, 태권도장은, 교회는 각각 몇 개가 있는지, 아파트 앞에서는 화요일에는 호떡, 수요일에는 뻥튀기, 목요일은 육개장, 금요일은 만두와 찐빵을 파는구나. 이런 조각들을 하나하나 부지런히 모으다 보면 일상은 집중력으로 덮이게 되고, 결국 소중함이라는 큰 그림으로 완성되게 된다.

글과 삶은 이렇게 씨줄과 날줄이 되어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야 만다. 글만 홀로 존재한다면 그리되지 못할 일이고, 삶만 홀로 존재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둘이 함께 가면서 글이 삶을 색칠하거나, 삶이 글을 색칠하거나 하며 존재에게 '살아있음'을 부여한다.

좀 더 잘 살아 있고 싶기에 쓰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뭐라도 쓰지 못한 하루란, 쓸 말 없는 하루란, 마음속에 아무것도 쓰이지 못한, 살아있지 못한 삶을 산 것 같아서 어쩐지 미안할 뿐이다. 그럼에도 계속 이 길로 걸어가다 보면, 언젠간 나도 살아있음이, 쓰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러워질 좋은 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오늘도 뭐라도 쓴다, 내가 여전히 살아있었다는 걸 훗날 선명히 알고 간직하고 싶어서.
#글쓰기 #글 #작가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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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당연스럽게 '내'가 주체가 되어 글을 쓰지만, 어떤 순간에는 글이 '나'를 쓰는 것 같을 때가 있다. 마치 나도 '생명체'이지만, 글 역시 동족인 것 같아서, 꿈틀 거리며 살아있어 나를 통해서 이 세상에 나가고 싶다는 느낌적 느낌이 든다. 그렇게 쓰여지는 나를, 그렇게 써지는 글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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