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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뿌리가 '자유주의'라니... 윤 대통령의 놀라운 역사해석

[분석] 윤 대통령 3·1절 기념사 뜯어보니... '일본에는 솜사탕, 북한에는 회초리' 돋보였다

등록 2024.03.01 19:08수정 2024.03.01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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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5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올해는 제105주년 3·1절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맞는 두 번째 3·1절이죠.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전통적으로 3·1절 기념사를 통해, 그해 추구할 대일정책의 방향과 기조를 밝혀왔습니다. 윤 대통령도 지난해 제104주년에 이어 올해 두 번째 기념사를 발표했습니다.

올해 윤 대통령의 기념사는 지난해 기념사와 비교해 몇 가지 달라졌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기념사 분량이 늘어난 것입니다. 지난해에는 글이 짧고, 내용이 조악했습니다. 모두 22문장, 1200여 자의 기념사였습니다. 연설 시간이 역대 대통령의 4분의 1 정도인 5분 30초에 불과했습니다. 올해 기념사는 60개 문장으로 2~3배 길이가 늘었습니다. 연설 시간도 12분 30초 정도가 됐습니다.

기념사 양 늘어나고 다양한 독립운동 평가는 긍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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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5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국기에 경례하고 있다. ⓒ 연합뉴스

 
양이 증가한 것뿐 아니라 내용이 좋아진 것도 있었습니다. 가장 긍정적인 변화는 다양한 독립운동을 평가한 부분입니다. 지난해에는 "우리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한다"라면서 독립운동 전체를 폄훼·능멸하는 듯한 표현을 담았습니다.

하지만 올해 제105주년 기념사에서는 무장 독립운동, 외교 독립운동, 교육·문화 독립운동을 일일이 거론하며 "이 모든 독립운동의 가치가 합당한 평가를 받아야 하고, 그 역사가 대대손손 올바르게 전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지난해 독립운동을 '만세운동'으로 격하하는 표현을 썼었는데, 올해는 그 표현이 없어졌습니다. 제가 볼 때 이런 부분이 올해 기념사 중 가장 놀라운 변화입니다. 보수우파들이 총출동해 외교 독립운동의 상징인 이승만 전 대통령 띄우기에 광분하고 있는 상황인지라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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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 3·1절 기념사 내용 비교 ⓒ 오태규

 

그러나 긍정적인 변화는 거기까지입니다. 3·1 독립운동이 일제의 혹독한 식민 지배와 탄압을 견디지 못한 조선 민중의 저항이었고, 그 배경에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가 있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은 "기미독립선언의 뿌리에는 당시 세계사의 큰 흐름인 '자유주의'가 있었다"라면서, 3·1 독립운동과 자유주의를 억지로 연결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지금 추구하는 가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 논에 물 대기' 식의 역사해석을 하는 셈입니다. 일종의 역사왜곡입니다. 이런 자의적이고 좁은 역사관으로는, 당시의 독립운동이 정당하게 평가받을 수 없습니다.

일본에는 한없이 유화 자세, 북한엔 먼지 털이 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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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5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 공연을 바라보고 있다. ⓒ 연합뉴스

 
역시 가장 우려스러운 대목은 일본에 한없이 유화적인 태도입니다. 지난해보다 더욱 '일본 상사병'이 깊어졌습니다. 지난해에는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었다"라고 한 문장으로 처리했습니다. 올해 기념사에서는 일본을 긍정·찬양하는 문장이 무려 일곱 개로 늘었습니다. 가치 공유와 공동 이익 추구, 세계평화와 번영을 위해 협력하는 파트너로 더욱 격이 높아졌습니다. 동맹이란 단어를 사용하지만 않았지, 동맹이란 단어 풀이를 해 놓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총괄적으로 표현한 문장이 "지금 한일 양국은 아픈 과거를 딛고 '새 세상'을 향해 함께 나아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일본의 미디어들도 보수 진보 성향을 가리지 않고, "'새 세상을 함께 나아가고 있다"라는 대목을 강조해 보도했습니다. 이제까지는 일본의 왜곡된 역사 인식을 비판하는 한국 대통령의 말을 전하는 것이 일본 미디어의 '한국 대통령 3·1절 기념사 보도'의 공식이었는데, 윤석열 정부 들어 이런 풍경이 완전히 소멸했습니다.


일본을 비판할 거리가 없어져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실상은 변한 것이 없는데도 말입니다. 최근 들어 일본 정부는 독도 영유권 주장을 더욱 거세게 하고, 한국 법원의 강제동원, 일본군'위안부' 판결에 관해서도 어느 때보다 강하게 항의하고 있습니다. 최근 군마현에서 산산조각을 내면서 철거한 조선인 관동대지진 피해자 추모비 철거가 일본의 뻔뻔함과 변화 없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호의적으로 나가면 저쪽도 호의적으로 나올 것이라는 윤석열 정부의 대일관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잘 보여주는 일입니다.

윤석열 정부 들어, 일본의 역사 인식을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의미를 지닌 대통령 3·1절 기념사의 의미가 퇴색하는 가운데, 북한 비판이라는 새로운 기능이 기념사에 스며들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기념사에서는 북한과 관련해 "심각한 북핵 위협 등"의 표현에 그쳤습니다. 하지만 올해는 북한 비난 부분을 전체 60문장 가운데 11개를 차지할 정도로 늘렸습니다. "전체주의 체제와 억압통치" "최악의 퇴보와 궁핍" "도탄과 절망의 늪" 등 표현도 더없이 험악해졌습니다.

윤 대통령의 제105주년 3·1절 기념사를 보면서, 윤석열 정부는 일본은 과오가 있어도 예쁘게 감싸안고 동족인 북한은 있는 것 없는 것 탈탈 털어서 비판하는 도구로 3·1절을 소비하려고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었습니다. 부디 이런 우려가 저 혼자만의 기우가 아니길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삼일절 #대통령기념사 #일본 #북한 #윤석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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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논설위원실장과 오사카총영사를 지낸 '기자 출신 외교관' '외교관 경험의 저널리스트'로 외교 및 국제 문제 평론가, 미디어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한일관계를 비롯한 국제 이슈와 미디어 분야 외에도 정치, 사회, 문화, 스포츠 등 다방면에 관심이 많다. 1인 독립 저널리스트를 자임하며 온라인 공간에 활발하게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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