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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투병 중 기사쓰기, '살아갈 용기'입니다

[창간 24주년 기획] 시민기자 활동 통한 글쓰기와 독서, 강력한 항암제이자 진통제

등록 2024.02.22 12:03수정 2024.02.23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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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2월 22일 창간한 <오마이뉴스>가 올해로 창간 24주년을 맞았습니다. 부자지간이나 사제지간 또는 글 쓰는 활동을 통해 오마이뉴스와 인연을 맺은 시민기자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편집자말]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2021년 연말, 나는 달갑지 않은 소식을 접했다. 목에 이물감을 느껴 찾은 병원에서 두경부암의 일종인 편도선암을 진단받았다. 이를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검사를 다시 했지만, 암으로 최종 판정이 났다.

두경부암, 신장암, 방광암까지... 결국 다발성 암으로 진단돼, 의사들로부터 예후를 장담하지 못하는 심각한 상황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처음엔 자포자기 심정이었다. 중한 현실을 인정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이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조차 정말 쉽지 않았다.(관련 기사: 목젖에 이물감... 편도암을 시작으로 찾아온 우울증  https://omn.kr/277m0)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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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암주사 장면 ⓒ 이혁진

 
수술에 이은 여러 항암치료가 시작됐다. 힘들고 낙담할 때가 많지만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투병에도 삶을 기록하며 여생을 차분히 정리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러다 보면 삶의 의미와 보람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두 가지는 분명했다. 첫째로 언제까지 살 수 있는지 확실치 않지만 내게 적지 않은 시간이 주어졌다는 사실, 둘째 그 시간이면 뭔가 뜻있는 일도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감이다.

그런 희망과 기대감으로 시도한 것 중 하나가 '이산가족'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었다. 이는 이산가족 후계 세대인 내게 주어진 의무라 생각했다. 해방과 6.25 전쟁 이후 월남한 실향민들의 삶과 염원은 내 생업을 제외하고는 주요 관심사였다.

나는 이북 개풍군 실향민인 아버지를 따라 50년 전부터 실향민들의 애향사업에 뛰어들어 이들의 활동을 지원해 왔다. 그러니 이런 기록작업은 내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 자부심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2022년 봄 본격적인 항암치료를 시작할 무렵 나는 선이 닿는 이북실향민을 찾아 이들의 동향과 바람을 본격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탈북민 관련 행사도 대거 포함됐다. 기록을 바탕으로 이들의 활동과 성과를 여러 매체와 언론에 기고하면서 나는 '아프다'는 사실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관련 기사]
위험 뚫고 한국 온 탈북 작가의 회고 "나는 연어였다" https://omn.kr/26lkf 
'희망고문' 된 이산가족 상봉, 실향민에겐 시간이 없다 https://omn.kr/24pp6
  
그중에서도 가장 활발히 소통하며 기고한 곳은 <오마이뉴스>다. 기존 언론과 다르게 소외되거나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돋보였다. 에디터의 세심한 피드백도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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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취재한 남북통일문화센터 토크콘서트 현장 ⓒ 이혁진

 
그간 기사를 통해 소개되거나 언급된 취재원은 물론 독자들까지 예상 밖의 반응을 보였다.

한 번은 한 탈북민 지원단체에서 "<오마이뉴스>가 이렇게 꾸준히 탈북민 동정을 취재해 보도하는 것에 감명받았다. 기사를 보고 탈북민들이 대한민국에서 살아갈 용기와 힘을 얻고 있다는 이야기를 자주 접하고 있다"는 연락이 왔다. 지난해 10월 말 오성철 탈북작가와 한 심층 인터뷰 기사('수저 작가' 오성철 화가 "여기서 예술하는 것이 행복")가 그 대표적인 기사다.

이런 적도 있었다. 내가 거주하는 서울 금천구 평생학습교육기관 '모두의학교'의 7학년교실 개강 풍경을 기사화했는데 이후 서울시의 관심이 뜨거웠다. 이른바 '파일럿 프로그램'이었던 7학년교실은 수강자의 호응으로 1년 과정이 잘 마무리됐다.

오롯이 내 기사 덕만은 아니겠지만, 이 학교는 올해 '서울시민대학 모두의학교 캠퍼스'로 확장돼 운영될 예정이란다.(관련 기사: '모두의학교' 7학년 신입생이 됐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탈북민 작가 북토크 등 각종 행사를 통해 인터뷰하거나 대면한 실향민들은 수백 명이 족히 넘는다. 처음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받을 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도 했다. <오마이뉴스>에 실린 내 기사가, 날로 굳어져가는 남북관계 간 평화의 동기가 된다는 게 내겐 무척 보람있는 일이다.

'시민기자' 활동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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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지난 2019년 미국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 취재시 사진(남북분단 및 이산가족 연구자로서 미군 한국전 참전용사 자료 수집차 방문). ⓒ 이혁진

 
이렇게 시민기자 활동을 하면서 체념할 것은 빨리 체념하고 자기 연민도 어느 정도 극복한 것 같다. 특히 글을 쓰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며 듣게 되는 자명종소리, 그 소리가 이제는 '당신 오늘도 살았어!' 하는 듯해 반갑다.

그러나 평소 멀쩡하다가도 갑작스러운 두려움으로 인해 몸서리칠 때가 있다. 암환자의 숙명이기도하다. 편도암 후유증 때문에 아직도 음식을 삼키지 못하고 역류하는 고통과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재발과 전이에 대한 공포와 우울증으로 불면의 밤을 보낼 때도 많다. 이럴 때마다 독서와 음악을 즐기며 글을 쓰는 작업은 나만의 숨겨둔 진통제랄까.

항암에도 지속하는 시민기자 활동은 내가 '살아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다. 반성과 구원의 기회이기도 하다. 투병하면서 바뀐 삶의 가치와 인생에 공감하는 독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이 놀랍고 행복하다.

하루하루가 새롭다. 암환자가 겪는,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이야기와 글쓰기는 게재 여부와는 상관없이 온전히 몰입하는 시간이 돼준다.

실은 쓰고도 기사로 채택되지 못한 '생나무' 기사도 많다. 그럼에도 살아서 이렇게 희로애락을 체감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지 모른다. '아프기에 성숙한다'라는 말의 의미도 근래에야 터득한 느낌이다. 세상 모르고 그저 교만했던 이전의 내 삶들이 얼마나 부끄럽던지.

아프지 않았다면 이런 후회와 반성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전에는 과거만 되돌아보던 버릇에서, 기사를 쓰면서부터는 미래를 생각하고 희망과 꿈도 가지게 됐다.

만약 내가 이 과정을 잘 지나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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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2023년 7월, 필자 본인이 모두의학교 7학년 교실에서 삼계탕 조리 실습에 참여 중인 모습. ⓒ 이혁진

 
암환자들이 처한 상태는 각기 다르겠지만, 다들 비슷하게 마주하는 어려움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자신이 암환자라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다(실은 이게 투병의 출발점이다). 두 번째는 투병하려는 스스로의 강한 의지다.

나는 다행히 후자 단계에서 적응 중이다. 아파도 포기하지 않을 일상의 이유들을 찾는다. 시행착오를 겪고 있지만 '1년 더 살아내기'를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다.

그렇게 1년 더, 1년 더 하면서 어느새 2년 반이 흘렀다. 그렇게 '5년 생존율'을 넘겨 나중에 완치됐다는 의사의 진단을 듣게 된다면, 이는 시민기자 활동덕이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북토크와 같은 현장 취재도 가능한 가려고 한다. 현장에서 만나는 실향민과 탈북민들은 내가 암환자라는 것을 전혀 모른다. 그럼에도 그들은 어찌 보면 나 스스로 암환자라는 사실을 잊게 해 준 '항암 도우미'라 할 수 있다.
  
사석에서 지인들이 내게 자주 묻는다, 항암으로 힘들 텐데 혈색이 좋은 비결이 뭐냐고. 나는 "일기를 매일 쓰면서 반성하고 기도하니 점차 낫는 것 같다"며 글쓰기의 매력을 강조한다.

나는 실제로 오래 전부터 매일 잠자기 전 일기를 쓰면서 하루를 정리하고 있다. 대부분 한 두 줄 정도의 일상에서 보고 느끼는 단상들이지만 최근에는 병원일지로도 활용하고 있다. 시민기자로서 간간이 올리는 기사도 사실 일기장에서 발췌한 것들이 많다.

지금 이 기사를 작성하면서도 나는 삶의 희망과 용기를 얻고 있다. 글쓰기가 삶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내 기사를 읽어주고 공감해주시는 독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다.

설령 아프지 않더라도 글쓰기는 노화를 막을뿐 아니라 뇌 건강에 좋다고 한다. 투병하는 암환자지만 체력과 정신이 다할 때까지 나와 가족, 주변의 행복한 이야기를 계속 쓸 것이다. 이는 내 병을 치유하고 극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항암환자 #시민기자 #진통제 #글쓰기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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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메모와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기존 언론과 다른 오마이뉴스를 통해 새로운 시각과 영감을 얻고 있습니다. 주요 관심사는 남북한 이산가족과 탈북민 등 사회적 약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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