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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유독 탐낸 마을... 맨발로는 논에 못 들어가게 했다니

구민정 군산역사문화연구소장의 '옥구서수농민항쟁' 뒷이야기

등록 2023.12.07 17:04수정 2023.12.07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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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사키농장 신상제 헌곡답 모습(1914) ⓒ 군산역사관

 
전북 군산은 1899년 5월 1일 개항하였다. 이후 군산에 정착한 일본 농업인들은 식민권력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부를 축적해 갔다. 국권피탈(1910) 전후 군산에서 대농장을 경영하는 일본인은 미야자키(宮崎)를 비롯해 당북리의 모리키쿠(森菊), 개정면의 구마모토(熊本), 발산의 시마타니(島谷), 서수(임피)의 가와사키(川崎) 등 10여 명에 이르렀다.
  
그중 가와사키는 1905년 서수(현 임피중학교 자리)에 대규모 농장을 설립하고 전제적 방식으로 운영하였다. 그는 고향인 니가타현 출신 10여 명을 데려와 조선 소작인들을 감독하게 하였다. 그들은 소작계약서를 일방적으로 작성하는 등 소작인들을 혹사시켰다. 그뿐 아니었다. 농장 중심으로 결성된 소작인 조합을 통해 전통 영농방식까지 강제로 통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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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구서수농민항쟁 그림지도에 대해 설명하는 구민정 군산역사문화연구소장 ⓒ 조종안

 
구민정 군산역사문화연구소장(군산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는 "옥구서수농민항쟁으로 처벌받은 34명 후손과 지인, 그리고 서수리(하용전마을) 주민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귀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며 일제가 서수의 쌀을 욕심낸 사연을 들려줬다. 지난 1일 현장답사에서다. 

"일제강점기 용전(서수)의 쌀은 최고급 상품으로 인정받아 조선에서 최초 헌곡(獻穀)으로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기름지고 풍성한 벼이삭'을 뜻하는 서수(瑞穗)도 1914년 일제에 의해 지어진 지명이죠. 헌곡답은 천황의 신상제와 대상제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요. 두 행사 모두 천황의 통치가 미치는 지역 곡물을 받아 일본의 신들과 식사하는 거대한 퍼포먼스를 함으로써 천황이 신과 동격임을 보여줬던 거죠."


농장에서 일어난 농민들의 봉기

1926년 가와사키가 죽자, 대농장 경영의 유리함을 알게 된 일본인 지주들은 그해 주식회사 형태의 '이협사(二葉社) 농장'을 설치하고 봉건시대 영주처럼 군림했다.

막강한 권한(소작계약서 작성 및 박탈 등)을 부여받은 일본인 감독들은 7할이 넘는 고율의 소작료를 징수했고, 일제 경찰은 농민들의 간담회조차 불허했다. 수탈과 탄압이 극에 달하자, 농민들은 1927년 11월 25일 대대적으로 봉기(이엽사농장 소작쟁의)했다. 이때 남녀 농민 80명이 끌려가 혹독하게 고문당했으며, 그중 34명은 유죄판결을 받고 옥고를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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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협사농장 소작쟁의 풍자한 1928년 1월 1일 치 <동아일보> 만평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1928년 1월 1일 치 <동아일보>에 실린 만평(漫評)이다. 정묘년(1927)에 발생한 주요 사건 20여 개를 월별로 나눠 풍자하고 있는데, 위는 11월 옥구군(군산시) 서수면 서수리(현 하용전마을 일대)에서 일어난 '이엽사농장 소작쟁의'에 대한 풍자다. 신문은 "이엽사농장 소작료 문제(二葉社農場 小作料 問題)로 옥구농민조합 간부 30여 명(沃溝農民組合 幹部 三十餘名)을 군산서(群山署)가 총검거(總檢擧)"라고 부연하고 있다.

만평의 한문 글귀(沃溝小作爭議)가 선명하다. '옥구소작쟁의'는 일본인 농장 이엽사의 살인적인 소작료와 인권 탄압에 대항한 농민항쟁이었다. 서수청년회, 농민조합, 광명농우회(지역 최초 농민운동단체) 등의 주도로 500여 농민이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봉기한 항일의거이기도 했다. 쟁의는 야학교육과 청년회, 농민조합 등을 이끌었던 장태성(장공욱) 선생 대구 복심원(고등법원) 판결이 끝나는 1928년 9월까지 계속되어 의의를 더한다.

이에 대해 구민정 소장은 "일본제국주의 경찰은 소작농들의 정당한 쟁의의 본질을 왜곡했다"고 주장한다. 일제 경찰이 증거 조작을 통해 농민조합 지도자 장태성을 명예훼손 및 협박을 자행한 파렴치범으로 둔갑시키고, 다른 사람들은 구금자 탈취 및 소요범으로 처벌했다는 주장이다.


농민항쟁의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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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시 서수면 하용전 마을 입구에 세워진 선돌(일명 숫바위) ⓒ 조종안

 
구 소장은 "가와사키의 만행과 애국지사들의 활동을 엿볼 수 있는 건물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며 안타까워했다. 그와 함께 임피역 주재소 자리, 이용휴 생가(서당), 이용덕 생가(장태성 은신처), 용전마을 모정(서수 신사), 헌곡탑(임피중학교 일대), 선돌(숫바위), 신용제 등을 돌아봤다. 그중 헌곡답, 이용휴 생가, 선돌 등에 관한 대화를 정리하였다.
  
이협사 농장이 있었던 '하용전마을'은 이름대로 용(龍)이 머무는 마을이었다. 마을 중앙의 '용제(龍臍)'는 '둑 堤'가 아니라 '배꼽 臍'를 쓴단다. 마을 지형을 큰 용으로 볼 때 용제는 '배꼽', 즉 명당을 나타낸다는 것. 이웃 용성마을에 용두산(용의 머리)이 있고, 산 아래로 흐르는 탑천엔 여의주가 있으며, 마을제사 때 줄다리기 한 후 선돌에 줄을 감아 용을 머물게 했단다. 아기마을에 '암바위'도 있으나 잡초에 가려 접근이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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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헌곡답 앞에서 일제의 수탈에 대해 설명하는 구민정 소장 ⓒ 조종안

 
"저기 정문 옆으로 까맣게 보이는 게 옥구농민항일항쟁 기념탑이고요. 언덕 위에 세워진 갈색 지붕보이죠. 원두막처럼 생긴 모정(정자)요, 그곳에 창고가 있었는데 광복 후 한국전쟁 때까지 교사로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 아래 논이 옛날 헌곡답(獻穀沓)이었고요. 항쟁로 너머 들녘에 시작답(試作畓)이 있었습니다. 일제가 만든 약도에도 표기되어 있죠.

일본 농장주는 헌곡답 주변에 목책(나무울타리)을 쳐놓고 아무나 못 들어가게 했다고 합니다. 아래에 샘(까치샘)도 있었는데 일인들이 샘물을 신성시했다고 합니다. 농사도 이곳 샘물로만 지었고요. 헌곡답은 일본 천황의 조상신으로 알려지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가 내려준 고천수(高千穂: 상서로운 벼이삭)를 키우는 논이었던 거죠. 일본 농장주들이 얼마나 신성시 했는지 조선 소작농들도 논에 양말을 신고 들어가야 했다고 합니다."


농민항쟁 가능케 했던 야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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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용휴 선생 가옥 모습, 본래 초가였으나 새마을운동 때(1970년대) 기와로 지붕개량을 했다고 한다. ⓒ 조종안

 
장태성(1909~1987) 선생은 옥구 출신으로 1926년 전주고보 3학년 때 악질 교장 추방운동을 주도하다 퇴학 처분을 받는다. 농민운동에 뜻을 품은 그는 용전마을에 청년회와 농민조합을 만든다. 이어 이용휴 생가 서당(야학당)에서 농민들의 자존감과 민족의식 고취하는 교육에 힘쓴다. 따라서 야학당은 옥구농민항쟁을 가능케 했던 주요 공간으로 평가받는다. (관련 기사: 아쉽다, '광복 70년 전북 70인'에 빠진 두 사람)

구 소장은 "100년을 이어온 옥구서수농민항쟁에 대한 기억은 새로운 세대에 맞게 재구성돼 이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항쟁에 참여한 대다수가 새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청년들이었고, 그들 덕분에 만들어진 새 세상에서 성장한 젊은 세대들에게 동료와 동포를 위해 불의와 맞섰던 그들(선조들)과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구 소장은 "현장조사 과정에서 마을어른 몇 분을 만났는데 지명에 자부심이 대단한 걸 느꼈다. 용전마을의 용이 현시대 농업과 농민들을 보호하는 용으로 다시 승천할 수 있는 축제가 열리기를 소망한다"며 "농민들이 글을 읽으며 세상 이치를 깨우쳤던 야학교 건물(이용휴 선생 생가와 서당)은 향토문화재로 지정, 보존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덧붙이는 글 참고자료
1) <100년의 기록, 새롭게 보는 옥구서수 농민항쟁> 세미나 자료집
2) 구민정, 구희진 교수의 <전북사학>(제68호)
#이엽사농장소작쟁의 #군산역사문화연구소 #구민정소장 #하용전마을 #농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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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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