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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 왜 저래? 한번에 이해하는 방법

[김성호의 씨네만세 498] <새벽의 저주>

23.06.23 13:48최종업데이트23.06.23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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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트롤 같은 사람이 있다고들 한다. '트롤'이란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요괴를 말하는 것으로, 무리의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이를 가리키는 신조어다. 미국에서 유래해 전 세계로 퍼져나간 이 단어는 한국에서도 트롤짓이나 트롤링 같은 용어를 통해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영화를 보다가도 트롤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고는 한다. 대개 공포영화나 재난영화 혹은 좀비물을 볼 때인데, 무리를 이뤄 위험에 대비하는 인간들 사이로 스스로 위기를 자초하는 이들을 트롤에 빗대고는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가지 말라는 곳에 갔다가 감염병에 걸려 오거나 납치되어 적에게 몸값을 요구당하고, 좀비를 뒤에 줄줄이 붙이고 오는 이들이 이런 영화에선 꼭 몇씩은 등장하곤 한다. 그뿐인가. 어떻게든 단합하려는 이들에게 온갖 방법으로 훼방을 놓고, 중요한 순간마다 감정을 터뜨려 다른 이들의 분노를 일으키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쯤되면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치미는데, 상업영화 가운데 이런 캐릭터가 없는 영화를 찾기란 정말이지 어려운 것이다.
 

▲ 새벽의 저주 포스터 ⓒ 스트라이크

 
좀비물 속에는 트롤이 넘쳐난다
 
< 300 >과 <저스티스 리그>로 유명한 잭 스나이더의 데뷔작 <새벽의 저주>는 좀비영화 가운데 명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좀비물의 아버지'라고까지 불리는 조지 로메로의 동명원작을 리메이크해 제작단계부터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완성도 또한 기대를 충족시켜 그저 시간 죽이기용 영화가 넘쳐나는 좀비물 가운데 보기 드문 수준을 이루었다는 평가다.
 
어째서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트롤짓 하는 캐릭터들을 가만히 들여다보자면 그 답이 모습을 드러내는 듯도 하다.
 
줄거리는 간명하다. 미국에 좀비 바이러스가 퍼지고 감염된 사람들이 서로를 물어 나라가 일대 혼란에 빠진다. 사건은 한순간에 시작되는데, 밀워키에 사는 간호사 안나(사라 폴리 분) 또한 평소와 다름없던 새벽 좀비와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 저를 물려고 하는 애인에게서 도망친 안나는 무작정 차를 몰고서 길을 떠나는데, 좌충우돌 하다 보니 사람들과 함께 대형마트에 갇혀 좀비와 대치하게 된다는 게 대략적인 이야기다.
 

▲ 새벽의 저주 스틸컷 ⓒ 스트라이크

 
단선적인 전개 속 놓치지 않는 드라마
 
이런 류의 영화가 대개 그렇듯, 이야기는 단선적으로 전개된다. 하나의 위험을 해결하면 또 다른 위험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면 다시 다음 문제가 고개를 치켜든다.

한 고비, 한 고비를 넘을 때마다 무리는 조금씩 줄어가고, 주인공은 더 큰 위험 앞에 놓인다는 게 이런 영화의 얼개가 아닌가. 말하자면 이런 영화에선 주제만큼이나, 때로는 주제의식 그 자체보다도 영화를 보며 느끼는 즉각적인 재미와 감흥이 더 중요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영화가 다른 좀비물보다 뛰어난 점은 드라마에 있다. 속도감 있는 전개 탓에 드라마가 충분히 진행되진 않으나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각 캐릭터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관객 앞에 내보인다. 예를 들어 어떤 인간은 너무 많은 이들을 잃어서 곁을 지키는 이에게 애착을 갖는다. 다른 이는 저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이에게 동질감을 갖는다. 또 다른 이는 제게 생긴 아이를 실패뿐인 인생을 바로잡을 기회라고 여기기도 한다.

영화는 캐릭터 각각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으면서도 몇 마디 대사와 설정을 통하여 그가 어떤 일을 겪어왔는지, 그로부터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건이 다시 이러한 일로부터 터져 나오니 보는 이들은 이들의 행동이 삐뚤어진 심리나 이상성격 따위의 것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새벽의 저주 스틸컷 ⓒ 스트라이크

 
인간은 누구나 트롤 한 마리쯤 품고 산다고
 
많은 영화가 인물을 한자리에 앉혀 그들이 구구절절 내뱉는 대사들을 통하여 관객의 감정을 이입하게 하는 쉬운 결정을 내린다. 또 많은 영화가 위기를 자초하기 위하여 극중 인물에게 어리석고 이기적인 행동을 무작정 하도록 이끈다. 그러나 <새벽의 저주>가 선택한 방식은 이와 다르다. 행동에 앞서 그가 행동에 이른 이유를 고심하고 그를 보는 이에게 자연스레 알도록 하는 것이다.

개 한 마리 구하겠다고 무작정 차를 몰고 좀비 떼 사이로 돌진하는 여자나, 남몰래 좀비에게 물린 사실을 감추는 사내, 그밖의 온갖 진상스런 것들이 그저 이들이 특이하거나 못나서는 아니란 걸 영화는 자연스레 드러내려 한다.
 
그로부터 얻어지는 미덕은 무엇인가. 그것은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 못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칼릴 지브란이 말했듯, '아무리 거룩한 사람과 의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대들 하나하나의 마음 속에 있는 고귀함보다 높이 오를 수는 없는 것이고 그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악하고 약한 자라 할지라도 역시 그대들 각자 안에 있는 가장 낮은 곳보다 더 낮게 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우리 안에도 트롤이 한 마리쯤은 살고 있음을 이 영화는 일깨운다.
 

▲ 새벽의 저주 스틸컷 ⓒ 스트라이크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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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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