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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터져나온 연극계 미투 "가해자들 5.18과 평화 공연할 때 분노 치밀어"

[단독 인터뷰] '광주 연극계 권력형 성폭력' 폭로 산하씨 "상처 외면 10년... 웅크리지 않겠다"

등록 2022.06.29 11:07수정 2022.06.29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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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연극계 권력형 성폭력'을 증언한 산하(가명)씨는 몇 해 전 광주와 연극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사진은 산하씨의 마지막 연출작을 공연한 광주의 한 극장이다. ⓒ 소중한

 
산하(가명)씨는 노트북 모니터 속 지도를 보며 장소 하나하나를 언급했다. 널따란 광주 지도에 하나둘 점이 찍히더니 어느덧 동서남북 곳곳이 점으로 메워졌다. 그의 기억과 기록 속에 존재하는 성폭력 피해 및 2차 피해 장소들 그리고 이와 간접적으로 연관된 곳들이 이렇게 많았다.

산하씨의 기억과 기록을 좇아 그가 점찍은 광주 곳곳을 찾아가 봤다. 어떤 곳은 10년 전과 그대로였고 어떤 곳은 변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산하씨에게 고통의 공간인 건 마찬가지였다. 그 점들로 가득 찬 광주를 산하씨는 떠날 수밖에 없었다.

광주에서 나고 자란 '광주의 연극인'이었던 산하씨는 10년 전 발생한 성폭력 피해를 공론화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면서 29일 광주 연극계의 권위자 세 명을 경찰에 고소했다. 처음 들어간 극단의 대표이면서 극작가·연출가인 A, 그 극단 소속의 작가·연출가 B(A의 아내), 그리고 다른 극단 대표이면서 종종 산하씨와 같은 연극에 배우로 참여한 C가 그들이다.

이들은 여러 수상 경력을 갖고 있었고 광주를 대표해 대한민국 연극제에 나가기도 했으며 연극인 단체의 간부를 맡기도 했다. 5월이 다가오면 5.18민주화운동을 주제로 연극을 올리기도 했다.

산하씨는 ▲극단에 속해 있던 약 5개월 동안 A로부터 수차례 성추행·성폭행을 당했고 ▲극단을 나온 이후에도 A의 아내 B로부터 여러 차례 폭언, 2차 피해, 성추행을 당했으며 ▲C로부터 한 차례 성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을 고소장에 담았다. 또한 ▲아무렇지 않게 '여자애들은 강간도 당해보고 그래야 오기가 생겨 연극을 오래한다'는 말을 들었던 회식 자리들과 ▲연극계 동료들에게 조심스레 피해 사실을 털어놨으나 '네가 윤리적으로 떳떳하냐'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던 사례 등을 세상에 알리기로 했다. 

민변 광주전남지부와 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그리고 연극인 동료들은 29일 기자회견을 열어 산하씨의 공론화에 힘을 보탰다. 기자회견 이틀 전인 지난 27일 광주에서 산하씨를 만났다. 그에게 그동안 숨죽이며 살아야 했던 이유, 어렵게 연극을 붙들고 있던 때와 결국 연극을 놓아야 했을 때의 감정, 상담과 치료의 과정, 공론화를 결심하게 된 계기 등을 물었다. 아래 약 1시간 동안 산하씨와 나눈 대화를 정리했다.

"제 꿈은 연극배우였습니다" 

- 연극배우를 꿈꾸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처음엔 연극을 향한 막연한 환상이 있었습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닐'이 영화 속에서 '퍽(닐이 연극에서 맡은 배역 이름)'을 연기하는 걸 보며 '무대가 무엇이기에 저렇게 열망할까' 궁금했었죠. 고등학교 때 희곡을 많이 읽었습니다. 영화 <왕의 남자>의 원작 희곡인 <이>나, 그리스 희곡도 좋아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엔 연극부가 없었는데 (부모님께) 전학을 시켜달라고 할 정도로 연극을 하고 싶었습니다. 결국 전학을 가진 못했지만 청소년 영화동아리에서 극본을 쓰거나 영화를 찍었고 자연스레 연기에도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 10년 전 오디션을 거쳐 처음 광주에서 진행된 큰 공연에 참여할 수 있었다고요. 당시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무대에 설 수 있다는 사실에 떨리고 기뻤지만 '잘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도 컸습니다. 당시 정말 비중이 낮은 'OO4' 역할을 맡았는데 제 몸이 제 몸처럼 움직이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고 지적도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선망했던 연극배우들을 대거 만날 수 있어 그저 좋았습니다. 광주에서 열리는 큰 무대였고 대부분 선생님들이 참여했습니다. 선생님들의 연기를 보면서 '멋있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연습 전 몸 풀기부터 발성, 호흡 등도 배울 수 있었고 진학과 관련된 가르침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 이번에 고소한 세 명은 광주 연극계에서 어떤 존재입니까.

"A는 (위 공연 후) 제가 처음으로 들어간 극단의 대표였습니다. 극작가이자 캐스팅 권한을 가진 연출가이기도 한 그는 첫 만남 때부터 '내가 널 밀어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A의 아내인 B는 (위 공연에서 만난) 친한 선배였습니다. 연극계 사람들과 두루 친한 것 같았고 제게 자신을 '언니'라고 부르라고 해서 그렇게 부른 적도 있었습니다. 다른 극단의 대표였던 C는 (위 공연에서 만나 알게 된) 연기를 잘하는 존경하는 선생님이었습니다. 제가 속한 극단에서 작업을 함께할 땐 연기지도를 해주기도 했습니다. 상도 많이 받고 단체의 간부를 맡기도 하는 등 이들은 지금도 광주 연극계에서 예술가로 인정받습니다."

- A가 대표로 있는 극단에 속해 있던 10년 전 처음 A에게 피해를 당했고 이후 약 5개월 동안 피해가 반복됐습니다. 곧장 극단을 떠나거나 신고 등 조치에 나서지 못하도록 만든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처음 피해가 발생했을 때 너무 당혹스럽고 놀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또 (그때까진 친밀했던 A의 아내) B와의 관계도 있었고 제가 상황을 피하고 더 조심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이후 성폭력의 정도가 심해지자 공연을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누구 하나가 그만두면 진행 중인 연극 전체에 피해를 끼친다'는 비난을 받을 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캐스팅에 있어 평판은 너무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제 연극을 시작한 애가 공연을 관두고 떠났다'는 꼬리표가 달릴까 두려웠습니다. 연극을 지속하고 싶은 마음에 고통의 목소리를 스스로 외면했던 것 같습니다.

신고 등 조치에 나서지 못한 이유는 제가 겪은 폭력이 구조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당시만 해도 지금보다 훨씬 더 성인지 감수성이 떨어졌던 때였습니다. A는 노래방에서 도우미를 불러 놀았던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했고 실제로 선생님들이 부른 노래방 도우미와 함께 회식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주변 동료에게 제가 겪은 일을 이야기했을 때 오히려 '네가 윤리적으로 떳떳하다고 생각하느냐'라고 질타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성인식을 지닌 연극계에서 제가 당한 폭력을 폭력이라고 인식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 극단에서 나간 이후에도 피해가 이어졌습니다. B와 같은 연극에 참여한 것이 발단이었는데 B와의 작업을 피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들과의 작업을 피해기 위해 최대한 노력했으나 광주 연극계가 비교적 좁다 보니 결국 만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배우든, 스태프든 제 입장에선 캐스팅된 상황 자체가 기회였는데 이를 계속 거부하다간 아예 연극을 할 수조차 없을 것이란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암암리에 강요된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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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연극계 권력형 성폭력'을 증언한 산하(가명)씨의 일기장 일부. "A(산하씨가 가해자로 지목한 인물 - 기자 주)에게 전화가 왔었다" "상처를 주는 사람들은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갈까?"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 피해자 법률대리인 제공

 
- 피해는 주로 회식에서 발생했습니다. 회식을 강요하는 문화가 강했었나요. 이외 지적하고 싶은 연극계 분위기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시파티, 중간파티, 쫑파티는 공식 행사였고 그 외에 수많은 회식이 있었습니다. 강한 위계문화가 있는 연극계에서 지위가 낮은 사람이 회식을 거절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회식은 단지 술을 마시면서 노는 자리가 아닌 작품에 대해 피드백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꼭 참여해야 한다'는 이야길 수도 없이 들었습니다. 소통과 협동심을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술자리가 강요되기도 했습니다.

한 사람의 잘못을 공동체에 전가시키는 연극계 문화 속에서 침묵은 암암리에 강요됩니다. 또한 문화예술계 특성상 정년이 없기 때문에 힘을 가진 이들의 영향력은 계속 이어집니다. 더해 (수많은 구성원들이) 프리랜서 노동자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법적인 보호를 받기 어려운 경우도 많습니다. 제 입장에서 그들은 지위를 갖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연극계에서 작품성을 인정받고 캐스팅 권한도 갖고 있는 그들 때문에 매번 혼란을 겪었습니다. 성적으로 착취하는데 또 배역은 주는 그런 상황에서 저는 항상 혼란스러웠습니다."

- A의 아내인 B가 산하씨를 비롯해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A씨와 산하씨가 불륜 사이'란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에 항변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눈 관계를 불륜이라 말합니다. 만 19세인 제가 아이 둘의 스물한 살 차이 남자와 사랑을 나눴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그 말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을 보면 이 구조가 얼마나 비정상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술가의 성폭력을 나쁜 손버릇 정도로 취급하며 용인해주는 문화가 만연한 상황에서 굳이 그들을 상대로 항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미 동료들에게 성폭력 사실을 이야기했다가 '넌 윤리적으로 떳떳하냐'는 말을 들었던 저로선 왜곡을 바로잡으려 해봤자 2차 가해가 돌아올 것이라는 깊은 체념을 하고 있었습니다."

- 연극계 동료들로부터 '네가 윤리적으로 떳떳하냐' '네가 무슨 자격으로 이 자리에 오냐' 등의 말을 들었을 땐 어떤 마음이 들었나요.

"성폭력을 겪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누구라도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제게 돌아왔던 건 '윤리'를 앞세운 비난이었습니다. 친했던 선배는 '네가 (A의 아내인) B보다 낫다'고, 다른 선배는 '너보다 (A·C) 선생님들이 더 매력 있는 것 같은데'라고 말하며 버젓이 2차 가해를 저질렀습니다. 

제가 이야기를 꺼내면 그것이 폭력이 돼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느꼈고 이후엔 더욱 침묵을 택했습니다. 심지어 회식 자리에서 서울에서 온 연출가로부터 '여자애들은 강간도 당해보고 그래야 오기가 생겨 연극을 오래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말을 공공연히 발화하고 그 자리에 있던 수많은 사람이 제동을 걸지 않는 공간, 그곳이 제가 살고 있던 현실이었습니다."

- 약 5년 후 연극계를 떠나기 전까지 어떤 삶을 보냈습니까. '내 잘못'이 아닌 '성폭력'임을 인지한 후에도 연극계를 떠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연극을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피해를 폭로하고 도움을 요청하려면 생계와 꿈을 모두 접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생계는 다른 곳에서 해결할 수 있었지만 꿈은 연극이 아닌 곳에서 찾을 수 없었습니다. 꿈을 접고 싶지 않았습니다."

- 그러다 결국 연극계를 떠났습니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상처가 터져 나왔습니다. 2018년 '연극계 미투'를 보면서 제가 겪은 폭력이 위력에 의한 구조적 폭력임을 인식했습니다. 당시 발언들 중 '용기를 내달라. 그렇지만 꼭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도 용기를 내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습니다. 저를 사랑하는 이들과 가족들이 받을 상처를 생각하면 더욱 침묵을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스로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으로 인해 연극을 지속하기 어려웠습니다. <OOOO>을 마지막 연출작으로 선택했습니다. 용기를 내 간접적으로나마 '연극계 미투'에 참여하고 싶었습니다. <OOOO> '연출의 글'을 공들여 썼습니다. '이 글이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렸으면 좋겠다'고, '가해자들이 뜨끔하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산하씨가 쓴 '연출의 글'은 기사 맨 하단에 덧붙임)."

"광주정신이 말하는 인간다움의 가치"

- 연극계를 떠나고 상담과 치료를 받으며 어떤 변화가 있었습니까.

"2019년 한국여성상담센터에서 제가 겼었던 일을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꺼내는 건 고통스러워 세부적인 상담을 받진 못했습니다. 이후 공황증세와 무기력증에 시달렸지만 아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가해자들이 아무렇지 않게 연극을 지속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력감이 더 강해졌습니다.

특히 그들이 5.18이나 평화에 대한 공연을 진행할 때면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2021년 극심한 원형탈모를 겪고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러 치료를 결심했습니다.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았습니다. PTSD라는 진단을 받고 논문과 책을 찾아 읽었습니다. 스스로 이상하다 생각했던 행동들이 성폭력으로 인한 PTSD임을 명확히 알게 됐습니다. 스스로를 이해하며 저와 조금씩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달라져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 '그들이 5.18과 평화를 이야기할 때 특히 분노가 치밀었다'고 했는데 이유가 무엇인가요.

"(A의 경우) 딸이 있으면서도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너무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인터뷰 기사를 찾아보면 A는 엄청나게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평판도 그랬습니다. 그런 점이 저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인정받는 예술가의 성폭력을 옹호·은폐하는 문화 때문에, 결국 성폭력이 예술가의 자유로움으로 포장돼 계속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번 공론화를 통해 그것이 과연 옳은지 질문을 던졌으면 합니다."

- 최초 피해 후 10년 만에 공론화에 나섰습니다. 비방을 당할 상황과 마주할 수도 있는데 이 같은 결정까지 어떤 고민의 과정을 거쳤습니까.

"제가 꾸던 악몽이 있습니다. 항상 도망치는 꿈이었습니다. 함께 있던 일행을 두고 혼자서 도망치는 꿈을 반복해 꿨습니다. 이제 제 상처로부터 도망치지 않으면서 제 삶을 바로 잡고 싶습니다. 2018년 '연극계 미투' 당시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 이유는 가족들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당한 성폭력을 가족들이 알면 얼마나 상처를 입을지 걱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상담과 치료 후 결심이 섰고 용기를 내 가족들에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이후 제 꿈은 도망치는 꿈이 아닌 살인자가 남긴 증거를 찾아 헤매는 꿈으로 바뀌었습니다."

- 공론화를 통해 이뤄졌으면 하는 점은 무엇입니까.

"문화예술계 노동자였던, 미성년자를 막 벗어난 20대 여성 청년에게 일어난 폭력을 과거의 일로 묻어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도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지 못했던 청년에게 빛을 비춰주고 싶습니다. 어둠 속에서 웅크린 채 말하지 못했던 제가 스스로 부당함을 인식하고 기지개를 켜고 있는 중이라는 걸 말하려고 합니다. 특히 가해자들은 미성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이 제게 깊은 책임을 느끼게 했습니다. 또 다른 피해자를 양산하고 싶지 않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의 끔찍함을 집요하게 추적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끔찍한 악은 악마 개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평범한 개인이 악한 구조를 성찰 없이 받아들이며 발생했다고 분석합니다. 저는 단순히 특정 개인을 단죄하고 끌어내리려고 나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그러한 행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조건이 지금은 개선됐는지 묻고 싶습니다.

스웨덴은 성평등 국가로 불립니다. 그런 스웨덴에서도 2018년 미투 운동을 통해 수 천 명의 여성이 성폭력 피해를 증언했습니다. 성평등 국가를 지향한 스웨덴은 좌절하는 대신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자문했습니다. 스웨덴 공연예술계는 자성하고 여러 대응책을 마련했습니다. 느리지만 멈추지 않는 발걸음이 계속해서 무언가 바꿔왔다는 것을 믿습니다. 저는 2018년 한국에서 용기를 냈던 여성들의 발걸음에 바로 따라가진 못했지만 그 씨앗을 품었습니다. 이제 그 씨앗에 물을 주고 싹을 틔우려고 합니다. 저의 용기가 또 다른 분들에게 다른 씨앗이 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이번 공론화에 앞서 전국 문화예술계, 광주 지역 시민사회와 긴밀히 소통해왔습니다. 특히 한국예술인복지재단과 광주문화재단에 제가 입은 피해 내용을 공유했고  그들과 앞으로의 방안을 함께 모색해보기로 약속했습니다.

광주 시민사회와 문화예술계 동료들이 상처를 회복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저를 돕고 있습니다. 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공간에서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깊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광주 연극계와 문화예술계가 잘못을 외면하지 않고 바로잡으려고 할 때 광주정신과 연극이 말하는 인간다움의 가치가 회복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역사는 인간의 무수한 폭력과 상처를 딛고 발전해왔습니다. 저는 우리가 마주한 현실을 정직하게 직면했으면 합니다. 또한 우리가 있는 이곳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기 위해 함께 가보자고 손을 내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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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연극계 권력형 성폭력'을 증언한 산하(가명)씨의 기억과 기록은 그가 나고 자라 연극인으로 살았던 광주 곳곳을 향해 있었다. 어떤 곳은 그대로였고 어떤 곳은 변했지만 여전히 산하씨에게 고통의 공간인 건 마찬가지였다. ⓒ 소중한

  
[전문] 산하씨가 마지막 연출작을 준비하며 쓴 '연출의 글'

"수없이 많은 말을 썼다 지웠다. 당한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일이라면 덜 괴로울 것 같았다. 실제로 나는 괴롭지 않았다. 예쁜 애들이 없어서 술맛 안 난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매표에 못생긴 애들이 서있어서 관객이 오겠냐는 이야기를 들어도, 나는 농담으로 웃어넘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최근 몇 년간 페미니즘이 첨예한 논란을 일으켰다. 20대 여성인 나는 그 변화를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이 싸움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적이 없었다. 부끄럽지만 불편하지 않은 여성, 예민하지 않은 여성이라는 호칭을 뿌듯하게 여기기도 했었다. 연극계 미투 논란이 있는 동안 어떤 공론장에서도 내내 침묵했다. 그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면서.

(중략) 정치적, 경제적으로 여성은 인간이 아니었다. 연극 <OOOO>은 (중략) 여성들을 거리로 이끌며 페미니즘 운동에 불을 붙였다. 남녀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오늘, 이 작품을 통해 어떤 시대적인 물음을 던질 수 있을까 고민하며 △△△(주인공 이름 - 기자 주)를 그려보고자 했다. (중략) 분명 많은 것이 달라졌다. 그러나 나는 21세기의 △△△를 상상하기 어려웠다. 지금 여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여성들과 크게 다른 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여성 비만율이 가장 낮고 화장품 산업과 성형산업이 발달한 대한민국에서는 돈과 명예를 가진 여성 연예인도 연인의 불법 동영상 유출 협박 앞에 무릎을 꿇었다.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은 차마 다 말할 수 없다. 지나친 감정이입이 극에 좋지 않을 수 있단 걸 알면서도 내내 자책했다. (중략) 그러나 이제 자책은 그만 하기로 한다. <◯◯◯◯>의 △△△가 느꼈던 지난한 고통을 지금에야 비로소 마주하는 이 시간은 고통스럽지만 나와 우리사회가 함께 겪어내야 할 진통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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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의 저편을 바라봅니다. extremes88@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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