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찰서 투탄 순국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 친구들 12

광무 황제의 폐위와 양산 김병희 부자의 참살을 듣다

등록 2021.01.05 14:21수정 2021.01.06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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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무황제 어진 황제가 된 고종은 조선을 근대화하려 하지만 일제의 침략을 막지는 못했다. 그는 외교로 대한제국의 주권을 회복하려했지만 열강은 도와주지 않았다. 황제의 복장은 근대화의 상징이다 ⓒ 대한황실문화원


광무 황제, 통감부에 저항하다

인간의 삶이 단순하지 않듯이 역사의 전개 역시 그러하다. 하나의 사건이 아닌 여러 복합적 사건이 얽혀서 시대의 역사를 만든다. 인간은 하나 혹은 복합적 사실에 영향을 받는다. 을사늑약 이후 유생들은 의병의 길을 걸었고, 친일 개화인들은 근대화를 추구하였다. 유생이나 개화인 모두 세계 조류에 대해 기본적 인식은 그들이 접한 사람과 서적에 제한되어있었다. 우리는 우리 경험의 한계 안의 사람들이다.

근대적 시대에 만국공법을 보검처럼 여겨졌다. 유생들은 국제사회가 공의(公議)에 의해 침략국을 응징하는 춘추대의적 입장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각국 공사관에 탄원과 방문을 하였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서구 열강은 제국주의적 입장에서 이해타산에 따라 인식하고 행동했다. 약소국은 제국주의 국가의 먹잇감에 불과했다. 만국공법은 식민지 국가에는 달콤한 사탕이지만 실상은 그림의 떡이었다.

고종 역시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에 올랐다. 만국공법의 나라를 선포하였다. 근대적 국제사회로 진입을 위해 각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며 대등한 국가로 대접받기를 원했다. 청나라. 벨기에, 덴마크,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 등등과 외교적 동반자가 되었다. 각국 공사관이 설립되었다. 국제조약에 가입하였다. 광무황제는 대한제국에 문제가 발생하면 국제사회가 유사시에 한반도 문제에 개입할 것을 기대하였다. 국제주의적 외교 전략을 펼쳤다. 일본은 몰라도 다른 나라는 만국공법에 따라 모든 일을 처리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 되고 외교권이 박탈되었다. 썰물 빠지듯이 미국 공사관 철수에서 시작하여 각국의 외교관들이 철수하였다. 대한제국의 해외공관은 폐쇄되고 외교관들은 해외에 망명했다. 을사늑약은 대한제국의 무능력의 산물이었다. 열강들은 조만간 대한제국이 보호국에서 일본에 병합되어 식민지가 될 것이라 예견했다.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이었다. 광무황제는 끊임없이 특사나 밀서를 통해 대한제국의 자주독립권을 다른 나라에 넘겨주지 않았으며, 일본의 침탈에 의해 강요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탈리아, 벨기에, 청나라 등의 국가원수에게 친서를 전달하며 대한제국의 의견을 전달하였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마음대로 요리하기 위해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대행하기 위한 통감부는 각국 공사관의 철수 이후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하고 식민지화의 기초를 닦았다. 보호국의 자치를 생각했던 개화 지식인의 뒤통수를 때리며, 일제는 내정간섭을 넘어 내정을 장악하였다. 심지어 광무황제가 외국인을 만나는 것까지 감시할 권한을 공식적으로 가졌다.

이토 히로부미 부임 이후 광무황제는 자신의 주권 침탈 행위에 대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궁내부의 권력 행사를 통해 저항했다. 정부 행정에 대해 간섭하고, 때론 직접 행정권을 행사하고, 외국인과 계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또 친일 내각을 불신임하고, 의병에게 자금을 지원하고, 특히 이토가 서울을 비우는 경우 더 황제는 자신의 주권을 행사했다. 결국 통감부는 황제에게 '궁금숙청(宮禁肅淸, 대궐 안에 잡인 출입 금지)'을 요구했다. 황제는 궁궐에 유폐 상태에 처했다. 할 수 있는 일은 밀서를 보내고 특사를 파견하는 일이었다. 고종은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열강을 향해 끊임없이 대한제국 문제에 개입해 줄 것을 호소했고,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1907년 5월 22일,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한창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광무황제의 폐위를 주장하는 이완용을 참정대신(총리대신)으로 발탁했다. 이완용 내각이 들어섰다. 당시 대한자강회, 서북학회 등 계몽운동 단체들은 친일 내각 타도를 주장하며 정부를 공격했다. 인민들은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배일운동에 앞장섰다. 이완용은 주미공사관 참찬관을 지낸 친미파였다가 아관파천 때에는 친러파였다가 을사늑약 전후로 친일파로 변신했다. 그는 일본과 한국이 거리가 가깝고, 중국의 속국이었을 때보다 이득이 많고 한국과 병합을 추진하지 않는 일본의 보호국인 상태에서 실력을 양성하면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광무황제는 철종의 부마였던 박영효를 귀국시켜 궁내부에서 자신의 안위를 지키라고 한다. 비록 친일 개화파였지만 그는 왕실의 한국의 자주권과 근대화를 여전히 바라고 있었다. 왕권 강화를 통해 주권을 회복하려는 황제와 신권의 강화를 통해 과거 양반지배 체제를 꿈꾸는 관료들이 대결하는 상황이었다. 일제는 황제의 권력을 견제하며 내정을 점차 장악해나갔다. 황제와 대신, 통감부는 각기 다른 방향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헤이그 특사 파견과 황제의 폐위

1907년 6월 광무황제는 정사(正使)에 전 의정부참찬 이상설(李相卨), 부사(副使)에 전 평리원 검사 이준(李儁)과 주로한국공사관(駐露韓國公使館) 참서관(參書官) 이위종(李瑋鍾) 등 3명을 헤이그평화회의에 파견한다. 일본의 불법 행위를 각국 위원들에게 알리고 세계가 모두 대한제국의 고난을 알고 만국공법(公法)에 따라 공의(公議)로서 대한제국의 국권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당한 일제의 보호국인 대한제국 특사들은 회의 참가 자격 자체가 없었다. 주요 국가의 위원들도 특사의 면담을 거절하였다. 그런 와중에 특사단은 『만국평화회의보』에 일본의 국제법 위반 행위를 폭로하였다. 을사늑약은 황제의 동의가 없었고 무력을 행사하고 대한제국의 법과 관습을 위반했다고 지적했다. 이위종의 '대한제국 특사단 호소'가 신문에 보도되었다. 7월 14일(음) 갑작스레 특사 중 한 명인 이준이 순국하였다.

광무황제의 헤이그 특사 파견은 실패하였다. 외교적으로 중립국을 선택하고 열강에 외교적으로 호소하였던 전략은 순진했다. 춘추대의보다 힘의 세계가 국제사회였다. 특히 일본의 보호국인 대한제국의 주권이 이미 침탈당한 상황이라 국제사회에서 큰 호소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표면적으로 황제의 특사 파견은 큰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일제의 한국 침략을 가속화시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세계 열강에 대한제국이 주권 회복을 위해 분투하고 있으며 일제의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최초로 알렸다는 데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사건을 계기로 광무황제의 폐위를 밀어붙였다.

내각의 이완용과 송병준이 7월 16일 내각회의에서 황제폐위를 결정했다. 이완용이 이를 알리자 황제는 "짐은 죽어도 양위할 수 없다"라고 거절하고 오히려 박영효를 궁내부 대신으로 임명했다. 7월 18일 황제의 거절로 궁내부 대신 박영효를 부르지만, 병을 칭하며 응하지 않았다. 결국 새벽 5시 황제는 황태자 대리의 조칙에 도장을 찍었다. 대한제국 10년 만의 일이었다. 7월 20일 9시 황제의 양위식에는 광무황제도 융희황제(순종)도 참석하지 않아 환관이 대신하였다. 환관이 황제의 자리 용상에 앉아 양위식을 한 것이다. 광무황제는 12세에 왕위에 오른 지 44년 만에 퇴위했다.

7월 20일 반일 단체인 동우회 회원들이 이완용 집을 불태웠다. 가재도구 및 고서적 등이 불타 10만 원 상당의 재산 피해를 줬다. 이때부터 이완용은 친일 매국노의 대명사가 되었다. 광무 황제가 양위하자 궁내부 대신 박영효, 시종원경 이도재, 전 홍문관 학 남정철 등은 평양에서 올라온 시위대 제2연대의 지원으로 7월 20일, 황제의 양위식 때 황제의 양위를 결정한 신하들을 전부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궁내부 대신 박영효, 시종원경 이도재, 군무국 과원 참령 이갑, 시종무관 정령 어담, 정위 임재덕 및 홍문관 학사 남정철은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21일 오후 10시경 전 내부대신 이지용, 이근택, 이근호의 저택은 결사회원에 의해 불에 타 없어졌다. 그만큼 신민의 분노는 컸다.

순종은 7월 25일 박영효를 궁내부 특진관 칙임관 1등에 임명하였다. 8월 22일 황태자 대리예식에 불참한 박영효, 이도재, 남정철을 각각 곤장 80대에 처하였다 박영효는 이완용의 상소로 8월 23일 보안법 위반의 죄목으로 다시 경무청에 구금당했다가 8월 27일 유배형을 선고받고 제주도에 1년간 유배된다. 그는 1908년 말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서울 상경이 금지된다. 제주도 유배에 동행한 김홍조와 같이 이 시절 그는 부산과 언양 작천정에서 시름을 달랬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부산 개성학교 출신의 송태관은 순종 즉위 직후인 1907년 7월 23일 봉상사 제조에 임명된다. 하지만 8월 9일 경시청에 갇히고 곧바로 해임된다. 9월 7일에 보안법 위반으로 송태관, 이우명, 김대진 3명은 1년간 전라남도 진도 외의 거주 금지를 받았다. 이들 3명은 고종 양위사건과 관련하여 상관인 궁내부 대신 박영효 또는 시종원경 이도재의 부하였기에 고종 양위에 반대한 측에 있었기에 귀양을 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송태관은 일본 유학시절 개화파인 박영효와 동향인 울산의 김홍조와 같이 교류했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송태관은 2년 5개월의 짧은 관료 생활이었지만 출세 가도를 달렸고 자신의 역량을 나름대로 발휘했다. 그의 일본어 실력과 고종 황실의 신임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해볼 수 있다. 송태관은 이후 울산, 부산에서 사업을 하기 시작하여 능통한 일본어 구사 능력과 궁내부 근무 경력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한다.

광무황제 양위 반대에 군대가 참여한 것은 군대해산의 빌미가 되었다. 7월 31일 이토는 융희황제로부터 군대해산의 조직을 얻어 마침내 군대를 해산한다. 근대국가를 꿈꾸며 부국강병을 꿈꾸었던 대한제국은 군대 없는 나라가 되었다. 군대해산에 맞서 병사들은 서울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한국군 200명 내외가 사망하고 500여 명이 포로가 되고, 일본군 60여 명이 사상당했다. 8월 이후 해산군인들은 의병이 되었다.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1907년 11월 전국 양반 의병장을 중심으로 조직도 13도 연합부대가 서울 진공을 추진했다. 하지만 충의(忠義)보다 효(孝)를 더 중시하는 양반이었다.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 사망으로 귀가한 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지도부가 붕괴하였다.

훈련받은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유생 의병들과 확연히 달랐다. 의병은 인민 의병이 중심이 되었다. 해산군인, 포수, 평민이 중심이 된 의병들은 1908년부터 1909년까지 2년 동안 가장 격렬한 전투를 하였다. 특히 전라도 의병의 활약이 대단했다. 일본인 통치를 중단시키기 위해 일본인 농장, 관공서, 금융조합, 우편소 등을 공격하였다. 일제는 1909년 하반기부터 남한대토벌 작전을 벌이면서 의병부대를 궤멸시켰다. 황현은 "사방을 그물 치듯 해놓고 촌락을 수색하고 집집마다 뒤져서 조금이라도 혐의가 있으면 죽였다. 그래서 행인의 발길이 끊기고 이웃과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의병들은 삼삼오오 도망하여 흩어졌으나 몸을 감출 데가 없어 강자는 돌출하여 싸우다 죽었고, 약자는 기어 도망가다가 칼을 맞았다"라고 기록하였다. 이때 사망한 의병이 1만 6천여 명, 부상자가 3만 6천여 명에 달했다. 살아남은 의병은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일제 식민지 시기 독립군이 되었다.
 

유격전을 펼친 항일 의병 일본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은 알지만 일본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자유민으로 싸우다 죽기를 선택한 항일 의병들. 총을 든 어린 소년 의병은 외세의 총칼에 굴하지 않았던 민족의 독립정신의 상징이다. ⓒ 멕켄지

  
서병희 의병의 활약과 김병희 부자의 죽음을 듣다

정공단 아이들에게 황제가 폐위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참 국채보상운동을 하는 시기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신문의 사진을 통해 그래도 한국의 황제를 알현했던 아이들이었다. 힘없는 황제의 폐위 소식은 아이들을 무기력하게 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양산에 출몰한 의병의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참혹한 이야기도 들었다.

양산 상북면 좌삼마을에 살고 있었던 서병희(1867~1909)는 한의업을 하였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보고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기 위해 1907년 2월 11일 서울로 올라갔다. 이미 국운이 쇠퇴하자 이미 백성들이 일어나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의병을 일으키고 있었다.

서병희는 1907년 10월 의병장 허위(1854~1908)의 부대에 참가하였다. 이인영 의병장은 의병연합부대인 13도 창의군을 결성하여 1만여 명의 의병은 서울진공작전을 실시한다. 각 도의 의병장이 연합하여 만든 13도 창의군은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허위 선생을 군사장으로 하여 진용을 편성하였고 1908년 음력 정월에 경기도 양주에 모여 일거에 적의 통감부를 격파하기로 작정하였다. 일본과 행한 각종 불법조약의 무효를 선포해서 국권을 회복할 계획을 세웠다. 이때 평민 출신의 신돌석 의병장은 배제된다. 양반 신분인 유생 의병장들에게 평민 출신의 존재는 전통적 신분질서를 문란케 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양반 신분인 유생 의병장들의 사상적 한계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실제로 13도 연합 의병부대의 지도층인 유생들은 충효 사상과 전통적인 주자학적 신분 질서를 중요시하고 척사위정사상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서울 진공작전을 펼칠 때 서병희는 군사장 허위의 결사대 300여 명과 함께 선봉장이 되어 나가 싸웠으나 일본군의 선제공격으로 작전은 실패한다. 그 후 허위의 밀지에 따라 1907년 12월 28일(음) 해산병 5명을 인솔하여 고향 양산으로 향한다.
 

양산의 독립운동 마을 양산시 상하북면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많이 태어난 곳이다. ⓒ 이병길

 
1908년 3월 21일 경주군 산내면의 윤정의(尹政義)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화승총 58정, 양총 2정, 군도 1진(振)으로 무장한 68명의 의병부대가 되었다. 하지만 울산군 복안동(현 울주군 두서면 복안리)에서 일본 수비대와 일대 격전을 벌인다. 이 지역은 한국전쟁 때 빨치산 홍길동의 거점인 아미산과 가깝고 활천 고개는 경주와 언양으로 가는 길목이다. 이곳에서 의병 7명이 전사하고 총기 40여 정이 망가졌을 정도로 패배했다. 일본 수비대 역시 인적 물적인 피해를 보았다. 고향 마을 인근인 양산군 하서면(현 원동면) 이천산(배내골)에서 잠복 중인 밀양 수비대와 6월 9일 교전한다. 밀양에서 양산으로 넘어오는 길이다. 서병희 의병은 1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6월 13일 오후 11시경 의병 13명( 5~6명은 총포, 기타는 도검 곤봉 등을 휴대)은 양산군 하북면 성천리 여인숙 최재덕(崔在德)집을 엄습하여 때마침 숙박 중이던 일본인 고리대금업자 2명과 그 앞잡이 한국인 한인 3명을 총살하고 도주하였다.
 

서병희 의병장 추모비 양산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인 서병희는 양산시 상북면 좌삼마을 출신이다. ⓒ 이병길

 

서병희 의병이 성천에서 일본인을 처단하기 전에 고향 좌삼 마을 아래의 상삼마을 만석꾼 김병희를 만났다. 『조선환여승람(朝鮮寰與勝覽)』의 <사마편>에 "김병희의 자는 성원(聖源)이고 호는 사우(四愚)이며 문행(文行) 재복(載馥)의 아들이다. 타고난 바탕이 뛰어나고 영리했으며 성품은 강직하면서도 분명했다. 우애가 매우 두터웠고 남에게 이간질하는 말을 한 일이 없었다. 선조의 일을 따르고 지켰으며 은혜가 많은 사람에게 이르렀다. 고종 때 사마시(司馬試)에 올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900년 박영효가 보낸 활빈당에 거금을 강탈(기부)당한 김재복의 아들이 김병희였다.

김병희는 만석꾼 집안 출신이다. 16살 차이가 나는 서병희는 어릴 때 김병희가 동몽교관(童蒙敎官, 초등학교 교사)으로 후진을 양성할 때 인근 마을에 살았기에 배우러 다녔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아들 김교상과는 5살 차이가 나기에 형님 동생으로 지냈을 수도 있다. 이런 인연으로 서병희를 만난 김병희는 군자금(軍用金)으로 5천 엔(약 50억 원)을 주었다. 이는 서병희 의병부대에는 엄청난 힘이 되었다.

서병희의 일본인 참살사건은 즉시 부산경찰서장에게 보고되었다. 울산 수비대와 교섭하여 김해, 양산, 언양, 서창의 수비대 8~9명을 파견하여 포위 소탕 작전에 착수하였다. 상삼마을 인근 야산에 일본 수비대원들 15명이 변장을 하여 숨어있었다. 이를 발견한 김병희 가병(家兵)들이 화적(火賊)떼인 줄 알고 6월 26일 오전 11시경 상호 교전을 벌였다. 무려 40여 분간 쌍방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현장에서 14명이 사살당한다. 일본군은 관병(官兵)임을 알면서도 고의로 대적 발포한 사건으로 인정하여 김교상 부자를 체포하고 무기를 압수하고 심문하였다. 일본군은 저녁 8시에 무사 귀대하였다.

가병을 이끌고 전투하였지만 실상은 의병과 다름없었다. 정체가 드러난 김병희(1851~1908), 교상(1872~1908) 부자는 체포된다. 일본군은 두 의병장을 철사로 손바닥을 꿰뚫어 묶은 채로 끌고 다녔다. 갖은 고문을 한 뒤에 하북면 소재지인 성천마을 앞 현재 통도사 자비도량 근처의 소나무에 3일간 매달아 주민들이 보도록 한다. 일본에 저항하면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성천마을 소나무에 매단 것은 서병희 의병이 왜인을 참살한 것에 대한 보복행위였다. 당시 의병은 왜인들에게 무서운 존재였다. 그러므로 의병이 사로잡히면 장날에 본보기로 중인환시리(衆人環視裡, 많은 사람이 빙 둘러싸고 바라봄)에 공개 처형했다. 통도사 계곡에 처형당한 부자의 시신은 통도사 구하스님이 거두었다고 한다.

김병희의 아들인 김교상의 아들이 바로 김정훈(1895~1946)이다. 김정훈은 박영효의 후견인인 김홍조의 사위였다. 1929년 박재혁의 여동생인 박명진과 재혼을 한다. 김정훈은 박재혁과 동갑이다.

김병희 부자의 집과 담장을 나란히 하며 살았던 사람이 바로 동경 2‧8 독립선언에 참여했던 양산의 김철수(1896~1977)이다. 김병희 부자의 사건 당시 김철수의 부친도 연관되어 고초를 겪었다. 김철수는 훗날 "우리 집안과 우리 마을이 당했던 그 수모는 나의 어린 가슴을 멈추게 하였고, 그 속에 항일의 씨앗을 심어 나의 평생을 독립투쟁과 국권회복의 힘이 되게 해주었다"라고 하였다. 김철수는 형 규수(奎壽)와 함께 기장의 자형 박인표(朴仁杓, 국권회복단원, 동래은행 발기인, 양산 3‧1만세운동의 주역 엄주태의 장인)의 집에서 진명학교를 2년 간 다니다가, 부모가 이주한 동래군 좌이면 구포리 23통 8호로 옮겨 구명학교를 3회로 졸업하였다. 부산상업학교에 입학하여 1913년 3월 졸업(2회)하였다. 졸업 후 구포은행에 취업할 기회가 있었으나 7월 도쿄 게이오대학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 유학시절 윤현진과 조우한다. 또 가까운 곳에 훗날 상해 임정의 차장으로 근무했던 이규홍(임정의정원 부의장, 학무‧내무차장, 재무‧외무총장, 1893~1939)과 윤현진(임정의정원, 재무차장, 1892~1921)이 대석마을과 소토(내전)마을에 살고 있었다. 윤현진은 1907년 15세 때 작은 아버지 윤상은이 설립한 부산의 구명학교를 1회로 졸업한다. 이 학교는 백산 안희제가 한때 학교장을 하였다. 윤현진은 서울 배제학교를 거쳐 상해로 형인 윤현태와 함께 1909년 유학을 간다. 상해에서 영어를 배우고 안창호 등과 교류하고 잡지 『소년』의 편집에 종사하였다.

이 시절 이규홍도 중국 상해에 같이 갔을 가능성도 있다. 1910년 여동생 윤덕경이 훗날 소설가 현진건의 형인 현정건(1887~1932)과의 결혼으로 귀국하였다. 1914년 윤현진과 이규홍은 일본 메이지 대학에 유학을 간다. 나중에 현정건과 윤현진, 이규홍은 상해 임정에서 임시의정원 경상도 대표로 활동한다. 현정건의 연인이 여자 의열단원인 현계옥이다.

양산사람은 서병희의 활약과 김병희 부자의 끔찍한 소식을 간직하며 살았다. 서병희와 김병희 부자의 이야기를 정공단 아이들도 사람들의 입과 입으로 전해져오는 이야기를 듣고 치를 떨었다. 소문도 빠르게 확장되었다. 인재도 드문 시절이라 지역의 대표적 인재는 금방 알려졌다. 2021년 박재혁과 윤현진의 순국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박재혁 의사 #의열단원 박재혁 #윤현진 #서병희 #김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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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울산, 양산 지역의 역사문화에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찾는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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