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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모태삼아 민족정신 중흥코자

[[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의 선각 홍암 나철 평전 / 19회] 왜 1년도 안 되어 교명을 바꾸었을까?

등록 2020.12.07 18:09수정 2020.12.07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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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난기와 국망기에 온몸을 바쳐 구국과 독립을 위해 나섰는데, 역사가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국민에게 잊혀진다면 어찌 건강한 사회라 할 것이며, 그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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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별세하기 직전의 나철 선생. ⓒ wiki commons

 
나철은 1910년 8월 5일(음력) 단군교를 전래의 교명인 대종교(大倧敎)로 개칭하였다.

"대종(大倧)의 대(大)는 그 뜻이 '한'이오 종(倧)은 검 또는 신인종 곧 대종(大倧)은 단군이란 이름 이전으로 거슬로 올라가서 개천(開天) 입도(入道)의 조화(造化) 교화(敎化) 치화(治化)의 세검 한몸이신 한배검으로 높여 부르는 까닭이다." (주석 9)

일제의 칼날을 피하고자 교명에서 '단군' 대신에 같은 의미인 '대종'을 붙힌 것이다. 

왜 1년도 안 되어 교명을 바꾸었을까?

교명의 변경이란 중대사인데, 어떻게 해서 과감하게 이름을 바꾸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이설이 분분하다. 그러나 장차 다가올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야한다는 나철의 정세 판단 때문이었다고 보는 설이 옳을 것이다. 

교명을 단군교에서 대종교로 바꾼 것은 나철이 일제의 탄압을 예견하고 단군이라는 두 글자를 표면에 내세우지 않기로 결심하였기 때문이다. 단군교라고 할 때 이 종교가 단군 국조만 앞세워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애국단체로 오인 당할 우려가 있었다. 그래서 천신교를 의미하는 대종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주석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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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쌓인 대종교 3대종사 묘소. 왼쪽부터 서일, 나철, 김교헌 대종사 ⓒ 조종안

 
조선총독부는 각종 언론ㆍ민족단체들에 이어 종교단체에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강화했다. 유교계는 최고기관 경학원의 대표인 대제학을 총독이 직접 임명하여 장악하고, 불교계는 사찰령과 본말사법(本末寺法)을 제정하여 '30본산체제'를 마련, 총독부 직할체제로 편입시켰다. 기독교 등 여타 종교들도 친일로 유인하거나 탄압을 자행하였다. 

교명의 교체에는 내부의 진통이 따랐다. '단군교'를 고수하자는 반발이었다. 주도자는 4차 도일 때에 나철과 함께 동행하여 도쿄 여관에서 의문의 노인으로부터 '포명서'를 함께 받았던 정훈모였다.  


개명은 물론 중앙의 결의를 거쳐서 된 것이지만, 개명 과정에서 교단 분열이라는 안타까운 일이 생겼다. 즉, 동경 개평관에서 나철과 같은 방에서 미도옹으로부터 포명서를 받았던 정훈모가 개명에 이의를 제기하고 단군교를 그대로 고수하기로 고집하였다. 경술 9월에 정훈모는 이유형ㆍ유탁ㆍ서장보 등과 교단 분리를 선언하였다. 그 해 12월 22일에는 본당에 교인 400여 명이 모여 분파를 규탄하는 집회가 있었다. 정훈모의 분파 배경에는 떳떳하지 못한 나변의 이유도 있었던 것이다. (주석 11)


일제의 국권침탈 초기 조선사회는 살얼음판이었다.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해외로 망명하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날조된 '105인사건'으로 끌려가 극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나철은 어떻게 해서든지 대종교를 부흥시켜 조국광복의 정신적 고갱이로 삼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포교에 열과 성을 다하였다. 그의 심중에는 종교뿐만 아니라 국교ㆍ국어ㆍ국사 등 민족정신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나철에 의한 대종교의 중광은, 긴 세월 민족적 정체성의 와해 속에서 급기야 한일합방이라는 민족적 수모를 당하게 된 역사적 원인에 대한 냉철한 자성과 함께 그 치유 방안을 제시해 주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까닭에 대종교에서는 민족의 흥망과 가장 깊은 관련이 있는 분야로서 국교(國敎)ㆍ국어(國語)ㆍ국사(國史)와 같은 국학(國學)을 중요시했으며 민족 문화에 가장 핵심을 이루는 이 분야에 대한 인식의 틀을 바꾸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주석 12)

병탄 직후 매천 황현이 자결하고 한때 나철과 그의 동지들이 시도했던,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하려다 미수에 그친 이재명이 사형되고, 한편 조선귀족령에 따라 친일파 76명에게 일본의 작위가 수여되었다. 젊은 시절 나철을 아껴 돌봐주고 단군교 중광행사에도 참여했던 김윤식은 총독의 자문기관인 중추원 부의장, 고문에는 이완용이 임명되었다. 의장은 총독부정무총감이었다. 


주석
9> 강수원, 앞의 책, 191쪽. 
10> 박성수, 앞의 책, 130쪽.
11> 김상일, 「대종교 홍암 나철의 생애와 민족애 그리고 통일」, 『민족통신』, 2004.
12> 김동환, 『2005 이달의 문화인물 9월, 나철』, 8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의 선각 홍암 나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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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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