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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탄속에서도 교인 6천명 증가

[[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의 선각 홍암 나철 평전 / 18회] "일제는 대종교의 포교활동에 감시와 탄압을 본격적으로 가하였다."

등록 2020.12.06 13:35수정 2020.12.06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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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난기와 국망기에 온몸을 바쳐 구국과 독립을 위해 나섰는데, 역사가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국민에게 잊혀진다면 어찌 건강한 사회라 할 것이며, 그것은 누구의 책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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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암 나철선생 사진 홍암 나철선생 사진 ⓒ 김성철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틀을 만든 분 중의 하나인 신규식은 뒷날 나철의 순교 소식을 듣고 만장(輓章)에서 "전조 500년간 무쌍의 국사(國士)요 대종교 4천년 후에 제일의 종사(宗師)로다."라고 추모하였다. '국사'란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을 이르는 말이다.

'만장'의 전문은 뒤에서 다시 살피기로 하고 여기서는 앞 대목을 소개한다. 

 아 나라가 병듦이여
 세상의 도가 어이하여 무너지는가
 아득도다 교화가 퇴폐함이여
 백성들 기운이 한갓 시들기만 하도다
 천제께서 천사를 세상에 내려 보냄이여
 대종교가 이에서 부활하였도다. (주석 6)


나철은 불우한 시대에 태어나서 이미 간난신고를 겪었지만 그럴수록 더욱 분발하였다. 무엇보다 '정신의 부활'이 육체의 기운을 북돋아주었다. 하지만 나라 사정은 더욱 절망의 수렁으로 굴러갈 뿐 반전의 기회는 나타나지 않았다.

일제는 1909년 2월 남한 의병 대학살작전을 펴서 의병의 씨를 말렸다.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지만, 일제는 반성은 커녕 더욱 사나운 발톱으로 대한제국의 심장을 헐뜯었다. 황궁인 창경궁을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만들어 일반에 공개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마침내 마각을 드러내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병탄, 식민지로 전락시켰다. 그리고 포악한 군인출신 데라우치 마사다케를  초대 총독으로 보내 세계역사상 유례가 없는 무단통치를 자행했다. 나철과 단군교는 설 땅을 찾기 쉽지 앖았다. 대한제국을 강탈한 일제는 8월 30일 한국을 상징하는 대한(大韓)ㆍ황국(皇國)ㆍ황성(皇城) 등의 문자를 모두 제거하거나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당시 국내에서 발행하던 신문ㆍ잡지 가운데 반일ㆍ민족적 색채를 가진 것은 대부분 발행을 금지하거나 신문의 제호 중 한국의 국권을 상징하는 명칭은 고치도록 하였다. 실제로 경무총감부에서는 '대한(大韓)'이라는 제호의 서적은 모두 압수하도록 하였고, 일본인이 발행하던 『경성일보』ㆍ『매일신보』ㆍ『서울프레스 영문판』등의 신문과 『조선공론(朝鮮公論)』ㆍ『조선급만주(朝鮮及滿洲)』등의 잡지만을 허가하였다. 


당시 폐간된 한글판 신문들은 약간의 폐간료를 받고 강제로 매수되거나 발행이 금지되었다. 『대한매일신보』는 『매일신보』로 개제되어 조선총독부의 기관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기관지는 식민통치를 새로운 '개혁시대'로 묘사하는 등 선전ㆍ홍보에 전력을 기울였다. 『황성신문』은 『한성신문(漢城新聞)』으로 개제되었다가 9월 14일에 결국 폐간되었다. 또 『대한민보(大韓民報)』는 『민보(民報)』로, 『대한신문(大韓新聞)』은 『한양신문(漢陽新聞)』으로 개제되었다가 9월 1일 매수ㆍ폐간되기에 이르렀다. 『제국신문』ㆍ『국민신문』도 매수ㆍ폐간되는 비운을 맞았다. 『공립신보』ㆍ『경향신문』ㆍ『합성신문록』등은 발행을 금지시켰다. (주석 7)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민족의 상징을 띄는 단군교의 활동이 어떠했는지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속에서도 "대종교가 성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교인수는 6천여 명으로 증가했다. 또한 대종교가 일제의 식민지배 속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고수하며 일제식민정책에 반하게 되자, 일제는 대종교의 포교활동에 감시와 탄압을 본격적으로 가하였다." (주석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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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쌓인 대종교 3대종사 묘소. 왼쪽부터 서일, 나철, 김교헌 대종사 ⓒ 조종안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네 차례나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침략의 흉계를 질타했던 나철이 조선총독부의 감시와 탄압에 대종교 포교활동을 멈출 인물이 아니었다.

1910년 10월에 조선 동포가 많이 사는 북간도에 대종교의 북간도지사를 설치하고, 같은 해 11월에는 교우 박찬익을 통해 청산리에 시교소(施敎所)를 두었다. 여차하면 대종교 본사를 해외로 이주하려는 계획이었던 것 같다. 


주석
6> 『예관 신규식전집(제1권)』, 263쪽, 예관 신규식전집편찬위원회, 2019.
7> 권태웅,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 22~23쪽, 독립기념관, 2008. 
8> 김동환, 앞의 책, 89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민족의 선각 홍암 나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나철 # 나철평전 #홍암 #홍암나철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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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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