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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들 죽은 지 몇달 후, 갈매기섬이 춤췄다

돌 달아 바다에 수장시키고 무인도에서 총살한 해남보도연맹 학살사건

등록 2020.11.07 19:44수정 2020.11.07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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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보도연맹원들이 구금되었던 송지면 어란진 수협창고 ⓒ 박만순

 
캄캄한 어란진(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수협 창고 안에서 밤을 꼬박 새운 이들은 새벽이 되자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경찰들이 우리를 어떻게 하려고 여기에 가두었을까?" 누군가의 질문에 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났다. 이들은 해남지역 보도연맹원들이었는데 예비검속 과정에서 경찰에게 구타당하기도 했다. 앞서 있었던 해남경찰서 유치장과 어젯밤에 끌려와 하룻밤 묵은 이곳도 잠자리가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특히 해남경찰서에서 어란진까지 오는 내내 손이 묶여있었기에 불편함을 넘어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이들이 있었던 수협 창고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로 꽤 넓었다. 하지만 200여 명이 갇혀 있다 보니 누워서 자기란 불가능했다.

배에 돌을 달고 바다에 빠진 사람들

날이 밝자 경찰들이 나타났다. "전부 밖으로 나와!" 비좁은 창고에서 몸을 구부리고 있던 보도연맹원들이 밖으로 나왔다. 경찰은 보도연맹원들을 배에 태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배에 오르기 직전 경찰들이 몇몇 보도연맹원들의 배에 커다란 돌멩이를 매다는 게 아닌가. 돌멩이로 치면 제법 컸지만 바위라고 하기에는 작은 돌이었다.

"왜 그러는디요?"라는 질문에 날아온 건 총 개머리판이었다. 이어 군홧발이 그이의 머리를 짓이겼다. 그렇게 한 사람이 당하자 뒤에 있던 이들은 입도 뻥끗 못했다.

돌을 매다는 일에는 어란리 주민들이 동원됐다. 200명 모두에게 돌을 매달지는 않았지만 그 탓에 승선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출발~"하는 인솔자의 구령에 배가 출항했다.
 

어란진 항구 당시 보도연맹원들을 배에 실었던 곳 ⓒ 박만순

 
배는 범선이었는데 아주 서서히 움직였다. 목적지는 해남과 진도의 중간 지점에 있는 갈매기섬이었다. 하지만 갈매기섬에 닿기 전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인솔자가 갑자기 공포탄을 쐈다. 이어서 경찰들이 2인 1조가 돼 보도연맹원들에게 달려들었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커다란 눈망울만 껌벅였다. "하나, 둘. 으쌰!"

"풍덩" "풍덩." 여기저기서 똑같은 소리가 났다. "살려 주랑께요." 하지만 경찰들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같이 죽자"는 악다구니가 터졌다. 배에 있던 일부 보도연맹원들이 줄을 끊고 저항을 시도한 것이다. "탕 탕 탕." 총소리에 저항은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백여 명의 생목숨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배 위에 있던 보도연맹원들은 그제서야 경찰들이 자신들의 배에 돌을 매단 이유를 알게 됐다.(진실화해위원회, 『2008 유해발굴 보고서』)

어란진에서 갈매기섬으로 이송 중 보도연맹원 일부가 수장되었다는 사실은 당시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에 거주했던 최사홍(당시 30세)과 윤재팔(26세), 그리고 전쟁 직전까지 경찰에 근무한 최석(26세)의 증언에 기초한다.
 

증언자 최사홍(왼쪽), 윤재팔 ⓒ 박만순

 
춤추는 갈매기섬

어란진에서 출항한 범선이 갈매기섬에 도착했을 때에는 배 위의 사람이 상당히 줄어든 상태였다. 복부에 돌을 매단 보도연맹원 백여 명이 바다에 수장됐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이들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일렀다. 살아남은 보도연맹원들 앞에 갈매기 모양의 섬이 나타났다. 진도에 속해 있는 무인도 '갈매기섬(갈명도)'였다. 섬은 온통 바위와 동백나무로 뒤덮여 있었다.

섬에 내린 보도연맹원들은 줄지어 세워졌다. 그들 앞에는 기관총이 설치되었다. 얼마 후 장교의 턱짓에 "탕탕탕" 하는 소총 소리와 "드드드" 하는 기관총 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백여 명이 갈매기섬 바위와 동백꽃 나무에 머리를 박았다. 어란진에서 범선에 실린 200여 보도연맹원들이 바다와 갈매기섬에서 학살된 날은 1950년 7월 16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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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갈매기섬 ⓒ 해양수산부

 
학살을 끝낸 범선은 갈매기섬을 출발한 지 얼마 안 돼 뱃머리를 돌렸다. 갈매기섬에 다시 내린 군화는 이미 숨이 끊긴 시신 위에 석유를 뿌렸다. 잠시 후 시신에 불이 붙었고 검은 그을음이 섬을 감쌌다.

그것은 보도연맹원에 대한 확인 사살(?)이었다. 아니 사살이 아니라 태워 죽인 것이다. 이같은 2차 학살을 지시한 이는 배에 탄 장교였다. 장교가 귀선하는 배에서 갈매기섬을 바라보니 흰옷이 떼무덤(합동묘, 커다란 무덤)같아 보기가 좋지 않다며 다시 뱃머리를 돌리게 했다. 실은 보기 안 좋은 게 아니라 학살 증거가 남을까 염려한 것이다. 그래서 학살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다시 섬으로 돌아가 사체를 불태웠다. 

이 갈매기섬에 사람들이 다시 찾은 때는 1950년 8월과 1964년 두 차례였다. 해남보도연맹원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1950년 8월 섬을 찾았다. 당시는 북한군이 해남을 점령한 시기였다. 사람들이 갈매기섬에 다다랐을 때 섬은 춤을 추고 있었다. "저게 뭐시랑가?" 섬에 내리니 시신의 배는 남산처럼 솟아올랐고, 얼굴은 파리와 구더기가 들끓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바다에서 본 '춤추는 갈매기섬'은 파리떼가 시신들 주변에 새까맣게 모여들어 생긴 형상이었다.

젊은이가 노인 뺨을 때리다

1946년 11월 11일 전남 해남군에서는 농민들의 추수 봉기가 들불처럼 번졌다. 화산면을 뺀 해남읍, 송지면, 계곡면 등 모든 읍·면에서 동시다발적 봉기가 11월 11일부터 13일까지 일어났다. 주동자들은 자주적 민족국가 수립과 미군정기의 농업정책 실패 등을 내세워 해남군 내 면·리·자연 부락 단위로 시위를 확대해갔다. 해남군의 추수봉기는 1946년 10월 1일 시작된 대구 10월항쟁에서 영향을 받았다. 당시의 상황을 <독립신보>와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11월 11일부터 일어난 전남 각지의 소요는 그 후 광주와 목포만은 미묘한 공기 속에 평온한 듯하나 그 외 각 지방에는 소요가 계속되고 있다. 11일 오전 7시께 해남군 북평, 황산, 산이, 현산, 송지, 계곡 등 7개면 경찰지서에는 500여 명의 군중이 습격해 청사를 전소 혹은 반소시켰으며, 지서장 1명, 순경 3명을 살해하는 한편 송지면장의 집을 파괴했다."(해남신문사, 『이데올로기에 갇힌 해남의 근·현대사』)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브루스 커밍스는 '해남군 지역에서 농기구를 휘두르는 농민들이 일제히 경찰 지서들을 공격해 54명의 농민들이 피살되고 61명 부상에 이어 357명이 체포됐다. 경찰관은 10명이 피살되고 33명이 부상당했으며 11명이 실종됐다'고 언급했다.

해남 농민들의 봉기는 전남경찰과 충남경찰에 의해 진압됐다. 경찰은 추수봉기에 참여한 이들을 화산면 해창리 나붓재 등지에서 무차별 학살했다. 화산면의 경우, 소위 '충남부대'라고 불리는 충남경찰국 기동대 60여 명이 면소재지에서 반인륜적인 행위를 저질렀다. '화산노인회' 회원들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들은 사람들을 죽이지는 않았으나 많이 때렸다. 가가호호 방문해 죄 있는 놈이나 없는 놈이나 도매금으로 잡아갔다. 옥석을 구분하지 않고, '줄뺨때리기'를 시켰다. 지서 앞에 사람들을 2열로 세워놓고 젊은 이가 같은 마을에 사는 노인 뺨을 때리게 했다"(해남군, 『해남군사』, 1995)

충남부대의 '줄뺨때리기'는 그나마 양반(?)이었다. 계곡면을 비롯한 해남군 곳곳에서 경찰들의 빨갱이 사냥이 벌어졌다. 계곡면 법곡리 월신마을이 대표적인 경우다. 1946년 추수봉기 때에 이 마을에서는 오용기를 중심으로 시위를 벌였는데 그 대가는 참혹했다. 주동자 오용기는 도피했지만 경찰이 오용기와 그 일가 집에 불을 질렀다. 또 이 마을 사람 10여 명이 1947년에서 1950년 사이에 추수봉기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학살당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상반기 보고서』)

피는 피를 부르고

농민봉기에서 살아남은 자들 대부분은 1949년에 결성된 국민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됐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해남경찰서는 상부의 명령을 받아 보도연맹원들을 예비검속했다. 전쟁 직전 해남군 보도연맹원은 약 600명이었는데, 대부분이 해남경찰서에 구금되었다.

A, B, C, D 등급으로 분류된 이들 중 석방된 자를 뺀 약 300명의 보도연맹원들이 송지면 어란진과 화산면 해창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7월 16일 진도 갈매기섬에서 학살됐다. 

8월에 북한군이 점령한 것도 잠시, 10월 6일 해남읍이 경찰에 의해 수복되었다. 10월 하순 산이면을 수복한 경찰은 부역자를 처벌하기 위해 지서장, 면장, 대한청년단장 등이 참여하는 '시국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자수하거나 체포된 자 일부가 석방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진산리 뻔지, 금송리 국도변 대나무 숲 등지에서 살해되었다.

부역 혐의자 학살에는 해남군 대한청년단장인 홍광표와 산이지서장 최기명이 앞장섰다. 홍광표는 수복 이후 각 면을 돌아다니며 부역혐의자들을 사사로이 살해했다. 최기명은 북한군 주둔기에 자신의 부인이 좌익에게 학살된 데 대한 보복으로 산이면 부역혐의자 24~28명을 산이면 대진리 주산동 뻔지에서 살해했다.

또 경찰은 송지면 산정지서를 수복한 후 주민들을 산정국민학교에 모이게 한 후 부역혐의자들에게 자수를 권했다. 이후 자수자 중 일부인 400여명을 창고 5곳에 분산 구금한 다음 산정리 산진목, 어불도 앞바다, 치소리 쑥고개 등지에서 집단 학살했다.

해남군에서 가장 늦게 수복된 계곡면에서는 방춘리 가옥 전소 사건이 있었다. 마을 주민 중 일부가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가옥 100호를 전부 불살랐으며, 주민 20여 명을 무이리 골짜기에서 학살했다.

전쟁 초기 군경에 의한 보도연맹원 학살은 북한군 주둔 시기의 좌익에 의한 우익인사 및 가족들 처형으로 이어졌고, 이는 다시 수복 후의 부역혐의자 학살로 이어졌다. '피는 피를 부른다'라는 말이 현실에서 작동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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