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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살상' 무인도에서 홀로 살아남은 남자, 그가 한 일

일제 치하 해남군 독립운동가 오홍탁과 오임탁의 삶과 죽음

등록 2020.11.13 21:35수정 2020.11.13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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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 갈매기섬 ⓒ 해양수산부

 
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진에서 출항한 목선은 갈매기섬을 향해 서서히 전진했다. 승선한 이들의 가슴에는 흥분과 비탄이 뒤섞여 있었다. 14년 전 학살당한 가족의 유해를 수습하러 간다는 기대감과 가족의 죽음이라는 상처를 다시 마주해야 하는 슬픔이 엉켰다.

"어이 길록이, 박자 좀 맞춰." "예." 인솔자인 박상배가 노를 젓는 이들 중 친구 동생인 오길록에게 말했다. 해남군 산이면 금호도에 사는 박상배는 승선한 이 중에 누구보다 복잡한 심경이었다. 사실 그는 기대와 비탄뿐만 아니라 공포감이 더 앞섰다.

그때로부터 14년 전인 1950년 7월 15일. 해남군 화산면 해창 항구에서 출발한 배는 밤을 꼬박 새워 다음 날 갈매기섬에 도착했다. 보도연맹원들을 도망가지 못하게 2명씩 묶은 끈은 손을 움직일수록 옥죄었다.

10명씩 줄지어선 보도연맹원들은 이미 혼이 나가 있었다. 박상배도 그들 중 한명이었다. 갈매기섬 해안은 급경사라 배를 대기가 쉽지 않았다. 배에서 내려 섬으로 올라가다 미끄러져 넘어지기 일쑤였고, 일부는 바다에서 고기밥이 되기도 했다.

고무신에 빗물 받아먹고 보름을 버텨

"탕탕탕" "드드드" 소리와 함께 같은 열의 보도연맹원들이 쓰러지는 순간, 박상배 역시 앞으로 고꾸라졌다. 여섯 번째 열이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몸을 움직여 시체의 맨 아래 쪽에 엎드렸다. 위에 있는 시체에서 피가 콸콸 쏟아져 눈과 귀를 막았지만,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잠시 후 확인 사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탕' '탕' 하는 권총 소리에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그렇게 백여 명을 학살하고 경찰이 물러가자 박상배는 손목에 묶인 끈을 풀고 일어났다. 그가 쓰러진 자리에는 산이면 상공리 사람들이 피칠갑을 하고 누워있었다. 친구인 오철수도 보였다. 소리 내어 울고 싶었지만, 경찰들이 언제 다시 올지 몰라 숨죽여야 했다. 그는 죽은 사람이 입고 있는 검정색 옷을 벗겨 입었다. 흰옷은 멀리서도 잘 보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동백나무 숲으로 몸을 숨겼다. 잠시 후 경찰들이 돌아와 시신 더미 위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박상배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입을 막고 속울음을 우는 것밖에 없었다.

경찰이 떠나자 그는 고무신에 바닷물을 떠서 담았다. 염분이 가라앉으면 목을 축이기 위해서였다. 그는 죽은 이의 고무신을 벗겨 빗물을 받아 식수로 썼다. 바위에 붙어 있는 굴을 캐 먹기도 했다. 그렇게 보름을 버티다 지나가는 배를 발견했다. "여기 사람 있어요!"

그렇게 진도 갈매기섬에서 살아나온 박상배는 10년 넘게 아무 말도 못하고 살았다. 감히 경찰이 보도연맹원들을 떼로 죽였다는 소리를 입에 담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옆 마을 보도연맹원 유족들의 피맺힌 한숨 소리를 언제까지 외면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친구인 오철수도 그곳에서 죽지 않았는가.

염라대왕 앞까지 갔다 온 박상배가 14년 만에 '기억 창고' 문을 열었다. 그렇게 해서 해남군 산이면 상공리 다섯 가족이 가구당 쌀 한 가마니씩을 내 목선을 빌렸다. 오길록, 오희록, 오혜정을 포함한 청·장년 10여 명이 관과 수의를 준비했다.

그들이 갈매기섬에 도착했을 때는 백골이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박상배의 안내로 상공리 사람들이 학살된 장소로 갔지만 누구 뼈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일행은 마을 사람들의 뼈를 한 상자에 담았다. 그들이 목선에 유해상자를 싣고 돌아온 때는 1964년 어느 날이었다.(진실화해위원회, 『2008 유해발굴 보고서』)

경찰로 위장취업
 

당시 동아일보에 실린 전남운동협의회와 관련한 오홍탁 기사 ⓒ 박만순

 
1934년 9월 10일자 <동아일보>에는 '주모자 김홍배와 순사 오홍탁'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기사는 오홍탁이 현직 순사면서 적색농민조합의 핵심 인물로 '야누스의 얼굴'이라고 했다.

오홍탁은 혁명적 농민운동에 참여해 해남군 산이면 상공리에 독서회를 조직하고 소작쟁의 운동을 지도했다. 그는 비밀을 탐지하고 동지들과 연락할 목적으로 1933년에 순사시험에 응시, 12월 강진경찰서로 발령났다. 그는 강진과 해남을 오가며 암암리에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했으며 적색농민조합 건설 준비위원회 산이면 책임자로 전남운동협의회의 핵심 인물이었다.(해남신문사, 『이데올르기에 갇힌 해남의 근·현대사』)

경찰서에서는 모범경관으로 칭찬 받고, 마을에선 전도유망한 청년으로 칭송이 자자했던 오홍탁이 몸담은 '전남운동협의회'는 어떤 조직인가?

1934년 2월 27일 전남경찰부 고등과의 지휘로 각 군의 경찰서가 총출동했다. 해남 북평면을 비롯 완도, 장흥, 강진, 영암, 목포, 보성, 순천, 여수, 진도 등지로 긴급 수사력이 발동됐다. 해남군을 비롯 9개 군에서 검거선풍이 휘몰아친 이 사건은 558명이 검거되고 57명이 치안유지법 위반과 출판법 위반으로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으로 송치됐을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다름 아닌 해남군 북평면 출신의 김홍배와 완도 황동윤이 주동이 되어 만든 '전남운동협의회'라는 조직 사건이었다. 전남운동협의회는 '농민 조직화'와 '대중투쟁의 전개'라는 목표 아래 영농회사의 토지겸병 반대, 소작료 인하 요구, 면화·해태 등의 가격 인상 요구, 호세(戶稅) 및 기타 공과세의 인하 요구, 간상과 고리대금업자의 배격 등을 요구했다. 

농민운동과 동시에 민족해방투쟁이었는데 이들은 완도군 고금도 소작쟁의를 비롯, 해남군 송지면 소작쟁의와 영암군 야경단 조직 등의 활동을 했다. 1933년 출범한 전남운동협의회는 신간회 사건 이래 최대의 조직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으로 해남군 산이면 상공리의 오임탁(당시 29세)과 오홍탁(당시 24세)이 구속됐다. 산이면 상공리는 동복 오씨 집성촌으로 오임탁과 오홍탁은 마을에서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역사의 선지자적인 역할을 한 오임탁과 오홍탁은 물론이고 그들과 함께 농민대중의 권익향상을 위해 노력한 이들이 후일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갈매기섬에서 학살당하게 된다.

3년간 입도 벙끗 안하고 감옥 생활

같은 마을에는 오장록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는 해방 직전 감옥 생활을 하며 고초를 겪었다.

"네 놈 배후가 누구야!" 일본 고등계 형사의 취조가 이어졌다. "어버버." "이 놈의 새끼 제대로 얘기 못해" 하며 형사는 오장록에게 몽둥이 찜질을 해댔다. 하지만 언어 장애인인 그가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빠가야로(바보)"라며 형사는 몽둥이를 내던졌다.

오장록은 감옥 안에서도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형무소 간수와 죄수들 모두 그가 말을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오장록은 감옥 생활 3년 동안 언어 장애인 생활을 했다. 

그랬던 그가 감옥에서 나오고 집행유예 기간이 끝나자 말이 터졌다. 주위 사람들은 깜짝 놀랐지만 당사자는 무덤덤했다. 그는 언어 장애인 흉내를 내어 일제경찰의 감시에서 벗어난 것이다. 

오장록은 해방 후 해남군 농민위원장을 맡게 된다. 해남은 건국준비위원회(위원장 천진문, 민병승)을 잠시 거쳐 인민위원회(위원장 김정수)가 지방행정을 통치하게 되었다. 주민 직선으로 주동혁이 경찰서장에 선출되고, 천진문이 뒤를 이었다. 인민위원회와 쌍두마차 격으로 지방행정을 이끈 조직은 농민위원회였다. 해남 농민위원회는 회원이 5만 명에 이를 정도로 농민들의 절대적인 신망을 받았다. 

1946년 11월 11일 해남군 전역에서 추수봉기가 일어났다. 산이면에서는 오홍탁, 오임탁이 주도하였고, 오장록은 해남군 전체의 봉기를 진두지휘했다.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도피하던 오장록은 1948년 4월 해남군 황산면 부곡리에서 검거되었다.

그는 장흥 검찰로 송치 도중 차 속에서까지 경찰을 교화시키려 했다고 한다. 장흥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그는 철창을 잘라 탈옥에 성공했으나 화순에서 검거되어 사형에 처해졌다고 한다.(해남신문사, 앞의 책)

"오빠 왜 죽였냐?" 항의하는 여성을 처형
 

2013년 과거사법 개정을 촉구하는 오원록의 1인 시위. ⓒ 박만순

 
밭일을 하는 오경순(당시 19세)과 박정연(당시 30세)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흘렀다. 고추를 따고 양파 심을 준비를 하느라 두 여성은 머리가 땅에 달라붙도록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찰들의 행렬이 그녀들의 곁을 지나가는 게 아닌가. 경찰들은 산이면 소재지에서 상공리로 가던 중이었다. 오경순이 호미를 쥔 채 "우리 오빠 왜 죽였어요?"라며 앙칼진 소리를 냈다. 옆에 있던 박정연 역시 "내 남편 왜 죽였소?"라고 항의했다. 오경순의 오빠 오철수는 해남군청에 근무하다 갈매기섬으로 끌려가 죽었고 오경순의 남편 오인록도 마찬가지로 갈매기섬에서 죽었다.

경찰들은 감히 겁 없이 대드는 여성들을 기가 찬 듯이 쳐다봤다. "이것들이 간뎅이가 부었나. 야, 이 년들 데리고 가"라며 인솔자가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1950년 10월 20일경의 일이다. 오경순과 박정연은 산이면 초송리 창고에 구금되었다가 어디론가 끌려가 처형되었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사실 오철수는 보도연맹원이 아니었다. 한국전쟁 발발 후 보도연맹원이 예비검속될 때 재당숙 오홍탁이 끌려가는 걸 보고 "왜 그러시오"라고 물은 게 죄가 되어 갈매기섬에서 죽었다.

그런데 그의 여동생도 '오빠를 왜 죽였냐'고 항의한 것 때문에 학살당했다. 졸지에 귀한 손자 손녀를 잃은 할머니는 홧병으로 곡기를 끊어 1951년 사망했다. 오철수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홧병으로 1960년대에 모두 사망했다.

인민군이 점령했다 물러가자 산이연 상공리는 '부역혐의자 학살' 광풍에 휩싸인다. 마을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다. 상공리 오유록(당시 22세)은 특별히 좌익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 경찰들이 수복하던 1950년 10월 20일 총소리에 놀라 밖으로 뛰어나가다 방죽에서 총살되었다.

같은 마을 오완용(당시 17세)은 정식으로 학교에 다닌 적은 없고, 오홍탁, 오임탁이 세운 야학에 다녔었다. 그는 수복 이후 부역혐의로 경찰에게 연행되어 1950년 11월 11일 초송리 앞산에서 경찰에게 칼에 찔려 살해되었다.

산이면 상공리 사람들은 반백 년을 넘게 빨갱이 자식으로 감시와 불이익을 받았다.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빨갱이 자식으로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아온 것이다.
 
#오홍탁 #전남운동협의회 #오장록 #추수봉기 #갈매기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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