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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중?"이란 말이 바꾸는 세상

[주장] '남자친구' '여자친구'란 차별적인 말

등록 2020.02.09 19:59수정 2020.02.09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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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터 하멜 ⓒ 블루보이 제공

  
좋아하는 싱어송라이터 중 '바우터 하멜(Wouter Hamel)'이라는 사람이 있다. 편안하고 세련된 팝 스타일의 멜로디에 재즈 풍의 그루브 있는 반주가 무겁지 않게 거들고 있는 그의 음악은 한국에서도 꽤 히트했다.

'브리즈(Breezy)'라는 제목의 곡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인기에 보답하듯 그는 1년에 한 번 이상 한국을 찾아 팬들과 만난다.

몇 해 전 재즈 페스티벌에서 그의 무대를 처음 본 날, 나는 매우 신나 그와 관련된 영상을 찾아보았다. 한국에도 팬이 많은 뮤지션이기에 한글로 된 정보가 많았는데, 그중에는 내 얼굴을 화끈거리게 한 대목도 있었다. '동성애자'라고 성정체성을 밝힌 그에게 "여자친구 있냐"는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전에 그의 성정체성을 알아보지 않은 취재진의 준비 부족에 대해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당연히 이성애자일 것으로 전제한 뒤 '여자친구가 있느냐'고 질문하는 게 얼마나 차별적인 질문인지 최초로 인지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삼십 해 넘게 나는 남자에게는 "여자친구 있냐", 여자에게는 "남자친구 있냐"는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하며 살아왔다. 가끔은 전화번호부 목록을 뒤져 잘 맞을 듯한 남녀를 짝지어주기도 했다. 동성애나 양성애에 대해 편견이 없다고 생각해온 나조차 일상에서 이렇게 차별적 언행을 하며 살아 왔다는 게 부끄러웠다.

많은 젊은이가 "취직은 했니?", "결혼은 언제 하니?", "아이는 언제 낳을 거니?" 등 명절에 하면 안 되는 질문에 침을 튀겨가며 의견을 보낸 덕분에 실제로 사회 분위기는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

나는 결혼 후 두 번째 맞은 이번 명절에서 어떤 가족으로부터도 "이제 슬슬 아기 가져야지"라는 식의 압박을 받지 않았고 덕분에 아주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이 기세를 몰아 2020년의 금기 질문은 "여자친구 있니?", "남자친구 있니?"로 설정하면 어떨까. 대체할 만한 질문으로는 "애인 있니?"가 괜찮아 보이는데 '애인'이란 단어는 뭔지 모르게 올드한 느낌이다. 그냥 "만나는 사람 있니", "연애 중이니" 정도가 담백해 보인다.
 

작은 변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 Pixabay

 
대학 시절, 마닐라에 있는 필리핀국립대학에서 한 학기 동안 수업을 받은 적이 있다. 이 나라는 경제적으로 한국보다 후진국일지 모르나 문화적으로는 훨씬 개방적이었고, 이미 커밍아웃한 동성애자 남성 친구들이 한 반에 꽤 있었다. 당시 그 나라의 가장 인기 있는 코미디언은 게이였고, 게이가 이성애자 남성보다 창의적이라는 편견 같은 게 있을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여자친구(남자친구) 있냐"는 질문은 큰 실례가 아니었다. 본인이 동성을 사귀는 남자라면 "아니, 난 여자친구는 없고 남자친구 있어"라고 아무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기 때문이다. (커밍아웃한 동성애자 남성이 아주 흔했던 반면, 본인이 동성애자 여성이라고 이야기한 친구는 한 명도 못 만나봤기 때문에 내 판단이 부분적으로 틀렸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커밍아웃이 부담스러울 수 있는 한국에서는 이 질문을 받은 뒤 스스로 본인의 성정체성을 오픈하는 게 쉽지 않다. 2010년 커밍아웃했던 바우터 하멜조차 "여자친구 있냐"는 한국 취재진의 질문엔 줄곧 "없다"고 대답했다.

그는 커밍아웃 후 8년이 지난 2018년 10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팬들에게 처음으로 본인이 게이임을 밝혔다. 당시 그는 밝히지 못한 이유에 대해 '자신 안의 두려움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성소수자에 배타적인 한국 분위기를 얼마나 느꼈으면 그랬을까 싶다.  

한국에서 성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문제제기는 꾸준하나 이에 대한 공론화나 사회적인 관심은 부족하다. 최근 관심을 모았던 변희수 하사의 경우도 그중 하나다. 나는 군의 결정에 대한 찬성과 반대를 떠나 군인의 성전환 수술 사례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옳은지 사회적 논의 한 번 없이, 전역으로 마무리해 버린 그 절차를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경직된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건, 우리 생활 내 정치를 통한 문화적 변화다. 당장 많은 사람이 "남친(여친) 있냐"는 질문을 "연애 중이냐"로 바꾸는 것 하나가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다. 게다가 한글에는 '그 사람', '그 친구' 등의 쓰기 쉬운 '인칭대명사'가 있지 않은가. 영어나 다른 언어에서처럼 he(그)나 she(그녀) 등의 인칭대명사를 쓰지 않아도 되니 상대방이 성소수자인들 후속 질문을 하며 이야기하기도 편하다.

이미 서구권에서는 남자친구, 여자친구 대신 '파트너'란 단어를 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서구의 흐름을 따라가자는 말이 아니다. '남자친구'나 '여자친구'란 단어가 성소수자 차별적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이제 작은 변화를 실천해 보는 게 어떨지 제안해 본다. 
#성소수자 #바우터하멜 #동성애 #변희수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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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만들기와 글 쓰기를 좋아하는 여행 가이드. 포토그래퍼 남편과 함께 온 세계를 다니며 사진 찍고, 음악 만들고, 글 써서 먹고 사는 게 평생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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