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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이 윌리엄 포크너의 '헛간방화'와 닮은 지점은...

[담론으로 보는 영화] 종수를 통해 분노하는 청춘의 이야기 담은 <버닝>

18.05.24 18:35최종업데이트18.05.24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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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버닝>의 작품 포스터 ⓒ CGV 아트하우스


*주의!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창동 감독은 칸 현지 인터뷰를 통해 다음 두 가지를 언급했다. 하나, 최근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이 분노를 품고 있는 것 같다. 둘, 소설 속 미스터리한 부분을 요즘 젊은이들의 이야기로 확장하면 어떨까 했다. 감독의 말대로 <버닝>에는 그 두 가지가 아주 은밀하게, 뇌쇄적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감독의 작품이 늘 그렇듯, 은유라는 이름의 완곡어법을 바로 알아듣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이 글은 감독이 인터뷰에서 언급한 두 가지 주제가 영화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짚어 나갈 예정이다.

주인공 종수(유아인 분)는 대학을 졸업한 취업준비생이다. 그러던 어느 날, 소꿉친구 해미(전종서 분)를 만나 잠자리를 하게 된다. 여행을 떠나니 그동안 고양이를 돌봐 달라는 해미, 그런데 정작 집안에 고양이는 안 보인다. 해미의 귀국 날, 종수가 마중 나간 공항에는 의문의 남자 '벤(스티븐 연 분)'이 해미와 함께 있다. 질투를 느끼는 종수, 하지만 질투가 무색할 정도로 수준 차이가 크다. 벤은 젊은 나이에 여행도 다니고 포르셰도 몰고 고급 빌라에 거주하며 매너까지 갖췄다. 반면 종수는 분노조절장애 아버지가 구속된 사이에 낡은 시골집을 지키는 백수 신세다.

종수는 해미를 짝사랑하지만 벤을 질투만 할 뿐 아무것도 못 한다. 그런데 가만히 지켜보니 벤에겐 무언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 돈도 많고 여유도 있는데 직업이 불분명하다. 취미도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것'이라고 한다. 꿍꿍이가 있을 듯한 말투와 거들먹대는 행동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해미가 사라진다. 이제, 종수의 머릿속에는 소꿉친구와 갑작스럽게 친해진 벤이 무언가 수를 썼을 것이라는 의심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종수는 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래서 종수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게 취미라는 벤의 말을 떠올리며 매일 집 근처 비닐하우스를 순찰하게 된다.

말 그대로 <버닝>은 생각을 좇는 거대한 추격극이다. 여기서 생각이라는 말은 여러 단어로 대체될 수 있다. 영화 속에서는 그것이 비닐하우스, 우물, 고양이, 해미 등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까지 위의 단어 중 그 어떤 것도 해명되지 않는다. 영화는 결론이 없고 관객은 이 허허벌판에 물음표를 찍게 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결론보다는 물음의 과정이 중요하다. 우리가 진정으로 물어야 할 것은 왜 저렇게 헤매는 지다. 그들은 왜 헤매는가?

"처음부터 세상에 없던 것처럼 사라지고 싶다"는 해미

영화 <버닝>의 한 장면 ⓒ CGV 아트하우스


첫째, 해미는 "처음부터 세상에 없던 것처럼 사라지고 싶다"고 말한다. 그녀는 '없는 것을 잊어버리는' 팬터마임을 배운다. 그녀는 길거리의 치어리더 일이 나름 자유롭고 쏠쏠해서 좋다고 말한다. 그녀는 낯선 사람에게 얼굴도 안 비치는 길고양이를 키운다. 그녀는 하루 한 번만 햇볕이 드는 북향 빌라에 산다.

해미는 최근 한국 사회의 여성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해미의 직업은 길거리에서 일하는 행사 도우미로,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도가 높은 복장을 입은 자신을 내보여야만 한다. 그것은 시선의 문제다. 행사 도우미라는 직업은 자신의 신체를 드러내는 직업이기에 그녀의 몸과 마음은 대상화되어 있다. 그것은 주체성의 문제다. 즉, 해미는 몸을 가졌음에도 정작 자신의 것이 아닌 몸뚱이로 살아간다. 해미는 언제 어디서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녀는 카드 빚을 내 성형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종수가 어린 시절 자신에게 못생겼다고 말한 걸 언급한다. 그녀는 성형할 정도로 트라우마가 심했고, 카드 빚을 갚아야만 집에 들어갈 수 있기에 아예 가출해 버린 상태다. 그런데 돈을 벌기 위해 택한 직업이 행사 도우미다. 즉, 타인의 시선에서 당당해지기 위해 성형을 택했던 해미는 스스로 시선 아래에 들어가게 된다. 그녀에게 시선의 문제는 줄곧 대물림 되는 것이다. 게다가 집은 월세 수준이고 몸은 행사 도우미를 하며 지내는 신세이니 어느 하나 자신의 것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모두 타인에게 빌려온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정체성의 문제를 겪는다. 그녀는 '사라지고' 싶어 한다.

그녀는 종수에게 반해 첫 만남에 잠자리를 함께하지만, 여행 중에 밴과 만나고 나선 벤과 함께한다. 그러면서도 벤에게 '종수는 나에게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영화에서 남루한 차림의 종수와 부유한 얼굴의 벤이 상반된다는 걸 안다. 그래서 해미가 종수를 버리고 벤을 택한 이유가 부유함의 척도 때문이라고 추측하게 된다. 결국 해미는 자신을 대상화한 채로 부유함에 빌붙는 듯 보이게 된다. 종수는 그런 생각으로 해미를 탐탁치 않게 여기다가, 마침내 한마디하고 만다. "너 남자들 앞에서 옷 막 벗고 그런거 창녀 같은 거야."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게 취미'라는 벤

영화 <버닝>의 한 장면 ⓒ CGV 아트하우스


여기서 논점 하나가 발생한다. 해미는 생존을 위해 자신을 대상화했다. 여성에게 주어진 시선의 압박과 인식의 불평등이거나, 혹은 사회가 우리를 조종하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옳고 그름을 가를 수 없는 사안이다. 그만큼 민감한 문제다.

해미의 취미이자 상황을 대변하는 팬터마임은 이 영화에서 여러 방면으로 응용된다. 표면적으로는 해미를 위시한 여성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심층으로는 청춘의 잃어버린 꿈에 대해 말하고 있다.

팬터마임이란 말을 하지 않고 행동으로만 표현하는 연극이다. 대부분은 소품 또한 '마치 있는 것처럼' 행동하곤 한다. 즉, 말도 없고 사물도 없다. 그곳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해야만 진정으로 보이는 연극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한다. 크게는 '나'에 대한 물음부터 작게는 '꿈'에 대한 물음까지 모든 걸 의심할 수 있다.

팬터마임은 해미를 보여주는 장치다. 그녀는 거울을 보며 팬터마임을 연습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팬터마임의 성격을 고려해보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없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무언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허구가 되고, 본연의 모습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나는 무엇인지. 내 꿈은 무엇인지. 내 신체는 본연의 것인지. 이러한 존재에 관한 물음이 여성문제와 결합해 하나를 지적하게 된다. 한국사회에서 남녀의 고용 불평등이나 임금 격차에 관한 것들이다.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보이던 수많은 여성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었던 것일까?

정말로 무서운 것은 이 영화에서 해미가 감쪽같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추측하기에 벤이 무슨 수를 썼을 것이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단지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게 취미'라는 벤의 말만을 단서로 삼을 뿐이다. 그렇게 해미를 쫓던 종수는 벤의 집에서 그녀가 차던 시계를 발견한다. 안 그래도 남자 집에 여성용 장신구가 잡다하게 모여 있던 걸 의아해하던 종수는, 벤이 여성들을 살해하고 전리품을 모아 놓은 것이라 여기게 된다. 그래서 종수는 벤을 칼로 찌르며 복수를 감행한다.

신체의 자유, 금전적 여유를 잃은 해미와 종수

영화 <버닝>의 한 장면 ⓒ CGV 아트하우스


가난한 남성과 부유한 남성의 대결, 그 사이에서 여성은 감쪽같이 사라진다. 이것은 납치라는 이름의 신체적 제거이며 연락 두절이라는 이름의 사회적 제거다. 동일 계급의 가난한 두 사람은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지만, 힘없는 여성은 권력계급 남성에게 붙어야만 했고, 권력 계급 남성은 가난한 두 사람 모두를 나락에 빠뜨린다. 결국 권력의 문제이자 약자에 대한 문제다. 단지 신체적으로 약한 것만이 약자가 아니라고 언급되는 대목이다.

우리는 해미를 통해 여성 문제를 보아 오던 중, 그것이 권력의 문제로 변환되는 것을 목격한다. 청춘에게만 한정되는 건 아니다. 성과 권력에 대한 고발의 목소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이 문제가 고발되어야 하는 건 사회적 지위가 신체적 지위를 억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위는 사회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만, 우리의 신체는 온전히 우리 것이어야만 하기에 신체적 억압을 탈피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게 바로 신체의 자유다. 어떤 것이든 간에 신체의 자유가 있어야만 비로소 제 생각을 낼 수 있게 된다.

둘째, 종수의 아버지는 분노조절장애가 있으면서도 자존심이 세다. 그래서 폭행 사건의 피의자 신분이면서도 폭행 피해자와 절대로 합의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성격 탓에 어린 시절 어머니가 집을 나가 버렸고 종수는 어머니 없이 자랐다. 종수가 아버지에게 깊은 회의감이 있는 게 당연하다. 문예창작학과를 나와 소설가를 지망하는 종수에게 취업은 아주 먼 곳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덧붙여서, 16년 만에 찾아온 어머니는 종수에게 인사나 눈물 대신 돈 있냐는 질문부터 대뜸 던진다. 그러면서도 돈이 없을 걸 안다며 조롱하듯이 말한다.

우리 사회가 평등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아직은 과도기인 탓에 제도와 현실 간의 괴리가 있다. 우리는 분명 평등을 추구하고 있지만 통계상으로는 아직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지위는 같지 않아 보인다. 이를테면 취업이나 연봉과 같은 것들이다. 젊은이들이 인식을 바꾸어 서로 동등하게 대해도, 그들을 둘러싼 취업시장은 여전히 불평등하다. 그래서 여성들은 사회가 변하지 않는다고 체감하게 되고, 남성들은 노력하고 있음에도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한다.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와 윌리엄 포크너의 <헛간방화> 사이

영화 <버닝>의 한 장면 ⓒ CGV 아트하우스


종수는 무능력한 아버지와 생기 없는 시골과 취업 안되는 문예창작학과라는 세 가지 페널티를 지니고 있다. 앞서 해미가 여성문제를 지적한다고 말했지만, 그에겐 남자라서 얻는 이득이 하나도 없는 듯 보인다. 군대를 다녀왔다는 대사로 고통뿐인 의무를 수행했음이 짧게 언급된다. 종수는 의무만을 짊어진 채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은유다. 국민건강보험을 꼬박 내도 돌려받는 건 그에 못 미치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계급은 세 가지로 나뉘게 된다. 여성과 가난한 남성과 부유한 남성. 이 세 사람은 영화상에서 해미, 종수, 벤으로 나타난다. 종수와 벤은 같은 남성임에도 같은 지위가 아니다. 오히려 종수와 해미가 가난하고 꿈 없다는 점에서 동등함에 가깝다. 그래서 종수는 한국 남성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여자인 탓에' 약자라고 느낀다면, 남성은 '남자면 뭐하느냐'라고 느낀다. 주안점은 '성차별'이 아니라 '권력'의 문제에 있다. 두 사람 모두를 억압하는 건 벤이라는 이름으로 형상화된 권력이다.

벤은 두 달에 한 번씩 애인을 갈아치우는 한량이다. 그는 여러 모임에 참석하고 다니는데, 하나같이 부유층과의 만남이다. 사실 벤은 부유한 사람이기에 부유한 사교 모임이 그다지 이상하지는 않다. 다만 그가 사교 모임 자리에 애인을 데려와 조롱거리로 만드는 행동은 사실상 부유층이 하층민을 하대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겉으로는 무척 올곧아 보이는데 속은 능구렁이처럼 새까맣듯 하다.

엄밀하게 말해 영화가 끝날 때까지 벤이 무언가를 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모든 것이 정황상으로 추측될 뿐이니 사실 정말로 악의가 없는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경우 종수는 열등감에 가득 찬 것뿐이겠지만, 감독의 인터뷰를 고려할 때 벤은 정말로 악인이었을 것이다.

이 부분은 반론의 여지가 적다. 영화의 원작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이지만, 윌리엄 포크너의 <헛간방화>도 첨가되었기 때문이다. 재밌게도 <헛간방화>는 가난한 백인이 부유한 백인에게 대항하는 이야기다. <버닝>은 그 두가지 원작을 바탕으로 무언가를 강렬하게 태우려 한다. 소설에서는 헛간, 영화에서는 비닐하우스다. 하루키에게 헛간은 여성과 함께 사라진 존재였고, 포크너에게 헛간은 불합리에 대한 항거의 표시였다. 여기서 전자는 첫사랑 혹은 여성문제에 관한 은유, 후자는 말 그대로 방화행위다.

영화 이창동 버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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