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만에 죽은 아들 위해, 왕비가 만든 '특별한' 조각상

[프랑스 기행 29] 프랑스 투르(Tours) 생 가티앵 성당(Cathedrale Saint-Gatien) 기행

등록 2018.03.30 15:08수정 2018.03.30 15:08
0
원고료로 응원
프랑스 투르(Tours) 시. 나는 투르 미술관(Musee des Beaux Arts de Tours)에서 한참 동안 시간을 보내다가 밖으로 나왔다. 미술관 북쪽으로 압도적인 규모를 과시하는 성당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생 가티앵 성당(Cathédrale Saint-Gatien)은 투르 미술관 맞은 편의 대성당 광장(Place de la Cathédrale)에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듯이 높게 세워져 있다.

투르 미술관이 원래 주교궁으로 사용된 곳이었다. 대성당과 투르 미술관은 원래 한 구역 안에 있던 종교시설이었다. 중세 종교의 시대에 대성당이 자리했던 곳이니 당시에 이곳은 투르 시내의 중심지였다. 그래서 투르 미술관을 방문했던 여행자들은 미술관 건너편에 있는 생 가티앵 성당에 항상 들르기 마련이다.


a

생 가티앵 성당 두 개의 첨탑을 가진 웅장한 고딕 양식의 성당이다. ⓒ 노시경


문 위의 조각, 자세히 보니 전부 다르네

생 가티앵 성당은 누가 보아도 전형적인 고딕 양식의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생 가티앵 성당은 고딕 건축의 변천사가 집약된 건축물로서, 고딕 양식의 백과사전이라고 소개되는 곳이다. 높이 솟은 고딕양식의 첨탑 덕분에 큰 성당은 더욱더 높게만 느껴진다. 투르 사람들은 이 성당을 투르 성당이라고 하지 않고, '투르 대성당'이라고 부른다.

16세기에 완성된 이 성당은 투르의 초대 주교인 생 가티앵(Saint Gatien)에게 바쳐졌고, 성당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따르게 되었다. 성당 이름이 프랑스에서 널리 사용되는, 성모 마리아를 뜻하는 '노트르담(Notre Dame)'이 아니고 주교의 이름을 따랐다는 것은 그만큼 투르에서의 주교 영향력이 막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 가티앵 성당은 전면 양쪽에 약 70m 높이의 첨탑 두 개를 가진 웅장한 건물이다. 이 성당은 1170년부터 1547년까지 4세기에 걸쳐 지어졌기 때문에 아름다운 고딕양식 외에도 로마네스크 양식 등 여러 시대의 양식들이 섞여 있다.

성당 정면에 솟아 있는 첨탑 양식도 조금 다르다. 한 첨탑은 로마네스크 양식 위에 고딕 양식으로 이루어진 반면, 다른 한 첨탑은 전체가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설되었다. 자세히 보면 첨탑의 높이가 조금 달라 보이는데, 1957년에 재건된 북쪽 첨탑이 1547년에 완성된 남쪽 첨탑보다 약 1m 정도 높다. 완벽하게 똑같이 생긴 구조의 숨 막힘보다는 밸런스를 조금 깨트린 첨탑의 구조가 더 편안해 보인다.


성당 전면 파사드에 있는 끝이 뾰족한 아치형 문은 화려한 중세시대의 플랑부아양(flamboyant) 조각들로 꾸며져 있다. 고딕 후기의 이 양식은 화려함을 자랑하며 불꽃 모양으로 타오르고 있다. 플랑부아양 문양은 단순한 듯 하면서도 복잡하고 길게 뻗어 나가는 모습이 인상적인데, 이 생 가티앵 성당에서 절정기를 맞이하고 있다.

a

플랑부아양 양식 파사드에서 보았던 불꽃문양은 성당 내부에서 빛을 받아 화려해진다. ⓒ 노시경


나는 성당 입구 아래까지 가서 성당 전면부를 장식하는 파사드를 살펴보았다. 아치형으로 굽은 정문 위에는 그리스도교 성인들의 조각상이 마치 벌집 속의 벌처럼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성인 조각상들은 발코니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성당에 들어오는 이들에게 종교적인 삶을 설파하고 있는 듯하다. 자세히 뜯어보면 조각상마다 모두 복장과 자세가 다르고 표정이 정교하기 이를 데 없으니 감탄사가 계속 터져 나온다.

a

성인 조각상 아치형 정문 위에 그리스도교 성인들의 조각상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 노시경


프랑스의 성당들은 비슷한 듯하면서도 내부의 모습에는 각기 개성들이 있다. 총 길이가 100m에 달하는 생 가티앵 성당의 예배당 내부는 엄숙하고 장엄해서 여행자를 압도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제단 앞에 설치되어 있는 제대이다. 디자인의 나라 프랑스답게 제대의 아래에 자연석을 덩그러니 받침으로 넣어두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파격적인 디자인이 그렇게 현대적이고 멋스러울 수가 없다.

a

성당의 제대 자연석을 받침으로 하고 있는 디자인이 그렇게 멋스러울 수가 없다. ⓒ 노시경


엄숙한 성당 안에서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자연석이 성당 안에 잘 녹아 들어가 있다. 생 가티앵 성당도 프랑스인들의 수백 년 전통 위에서 세워진 건축물이고, 성당 내부의 현대적 디자인도 프랑스 디자인의 유구한 전통 위에서 발전한 것이다. 역사적인 대성당 내부에도 프랑스 디자인의 강력한 전통이 현대까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성당 내부는 중세 13~15세기에 만들어진 채색 유리창, 스테인드글라스로 현란하고 아름답다. 성당 벽체를 온통 둘러싼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쏟아져 들어온 햇빛은 성당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줄기는 성스럽고 신비로워 보였다. 생 가티앵 성당이 스테인드글라스로 유명하다는 말이 헛말은 아니었다.

a

성당 스테인드글라스. 현란하고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성당 내부를 둘러싸고 있다. ⓒ 노시경


가장 오래된 스테인드글라스는 무려 13세기의 것이다. 스테인드글라스에는 다양한 패턴의 문양과 함께 구약∙신약성서의 장면, 그리스도교 성인들, 투르의 세 번째 주교이자 성인인 생 마르탱(Saint Martin)의 기적이 묘사되어 있다. 깨지기 쉬운 유리창 속의 이야기들이 세계대전의 참화에서도 파괴되지 않고 수백 년간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

a

스테인드글라스의 이야기들.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성서와 그리스도교 성인들이 묘사되어 있다. ⓒ 노시경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을 혼자서 연주하다니

스테인드 글라스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성당 전면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원형 스테인드 글라스, 로자스(Rosace)이다.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한 이 장미꽃 모양의 장식은 순수하고 화려한 15세기 고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이 '장미의 창'은 생 가티앵 성당 내에서 최고의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성당 외부 파사드에서 보았던 플랑부아양 양식이 성당 내부에서는 이렇게 로자스 양식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되어 활짝 빛나고 있었다. 마치 붉은 장미 여러 송이가 머리 위에서 만개하여 빛을 뿜어내고 있는 것만 같다.

a

예배당의 양초. 조용한 발자국 소리만 들리는 성당 안에서 양초의 불꽃만이 춤을 추고 있다. ⓒ 노시경


성당 안에 자리한 작은 예배실에는 신자들이 켜둔 양초에서 촛불이 흔들리고 있었다. 거대한 성당 안에서 작은 발소리만 들리는 지금, 양초의 불꽃만이 희미한 바람을 따라 춤을 추고 있었다. 엄숙함 속의 작은 움직임이 마치 성당 안에 모셔진 망자(亡者)들에 대한 위로 같이 보였다.

a

성당 파이프오르간. 생생한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성당 전체로 퍼져나갔다. ⓒ 노시경


순간, 생생한 파이프오르간 소리가 귓가에 울리듯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유럽의 성당을 다니면서 파이프오르간 소리를 몇 번 들어봤지만 이렇게 장엄하고 웅대한 소리는 처음이다. 고개를 들어보니, 프랑스 내에서도 크기로 유명한 파이프오르간의 파이프들이 스테인드글라스 아래에 마치 첨탑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다양한 파이프의 개수도 프랑스의 다른 성당에 비해서 많다. 이렇게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울려 나왔고, 그 소리는 성당 전체로 파도가 밀려들 듯이 퍼져나갔다.

파이프오르간 오른쪽 옆의 작은 거울을 보니 오르간 연주자가 연주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 작은 사람 한 명이 거대한 파이프오르간을 움직이며 성당 전체를 울린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연주자가 천천히 건반 몇 개만 눌러도 별개의 음 자체가 스스로 아름다웠다. 나는 파이프오르간 소리에 홀려 예배당 중앙의 예배석에 앉았고, 한참 동안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니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성당 안이었다. 눈을 오래 감고 있었기 때문인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성당 안이 밝게 눈 안에 들어왔다. 나는 성당 안을 다시 시계 방향으로 돌았다. 잠시 후 내 눈앞에 무언가 묘한 분위기의 석관이 나타났다. 다른 성당에서는 볼 수 없는, 어린이 2명의 조각상이 장식된 석관이었다.

석관 앞에는 석관의 사진과 함께 석관의 내력을 설명해 주는 자세한 안내문이 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찾는 유물이어서인지 프랑스에서 흔치 않은 영문 설명문도 함께 있다. 내용을 읽어보니, 이 석관은 프랑스 왕 샤를 8세(Charles VIII, 재위 1483년~1498년)와 안느 드 브르타뉴(Anne de Bretagne)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의 석관이다. 석관 위의 어린이 조각상으로 알 수 있듯이 이 석관에는 일찍 세상을 떠난 어린 생명들의 유해가 담겨 있다.

이 유명한 석관은 왕비 안느 드 브르타뉴의 명에 의해 프랑스 조각가 미셸 콜롱브(Michel Colombe)가 1506년에 조각하였다. 이 아름다운 석관과 석상은 투르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원천으로 하여 이탈리아 양식으로 장식한 최초의 기념물이다.

이 석관은 원래 투르 시내 구시가 서쪽의 생 마르탱 성당(St. Martin basilica)에 자리하고 있었다. 프랑스혁명 기간에 프랑스의 많은 문화재들이 파괴되었지만 이 석관은 너무나 아름다워 다행히 파괴의 손길은 피해 갔다고 한다. 이 석관은 1834년에 투르를 대표하는 이 생 가티앵 성당으로 옮겨졌다.

이 석관은 화려한 고급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석관은 이탈리아 서북부의 유명한 대리석 산지인 카라라(Carrara)의 대리석을 사용하여 청회색 빛이 나는 백색으로 빛나고 있다. 이 석관은 프랑스 조각가들과 이탈리아 장식주의자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통해 새로운 조각상을 만들어 낸 것으로 평가 받고 있는 명작이다.

a

샤를 8세 아들 석관. 일찍 세상을 떠난 아들들의 유해가 담긴 석관이 애처롭다. ⓒ 노시경


석관 위 어린이들, 실제 나이와 다른 이유

석관 윗부분에 사실적으로 묘사된, 누워 있는 아이들 조각상은 15세기말의 전통적이고 정형적인 프랑스 양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반면 석관 아래의 장식부분은 샤를 8세 당시 이탈리아 양식의 영향을 보여주는 완전히 획기적인 작품이다. 르네상스 초기의 이 작품은 당시 프랑스 조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프랑스인들이 현재도 자랑스러워 하는 명품이다.

석관 외부의 장식들은 르네상스기의 현란한 조각으로 호화롭다. 두 어린 조각상이 어깨에 걸친 외투, 모서리 상단의 돌고래 조각, 관을 둘러싼 매우 사실적인 노끈 조각, 석관의 가장 아랫부분을 장식한 기둥의 날개 달린 발은 당시에 가장 아름다웠다는 이탈리아 현지의 양식을 뛰어넘고 있다.

석관 중앙에서 파도치듯 펼쳐지는 식물 문양 속에는 신화 속 인물들이 마치 숨은 그림 찾기 하듯이 숨어 있다. 석관 중앙의 양 끝에는 삼손과 헤라클레스가 석관을 지탱하며 자신들의 삶이 담긴 힘을 과시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반은 인간, 반은 말 형상인 켄타우로스(Kentauros)가 험상궂게 정면을 노려보고 있다. 바다에 살면서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선원들을 유혹하는 여자 모습의 사이렌(Siren)도 신화 속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다.

석관의 하단에는 어깨에 날개를 달고 발가벗은 어린이, 큐피드가 있다. 큐피드는 서로 마주 보고 서서 사랑의 화살을 들고 있다. 화살을 쏘며 장난을 좋아하는 어린이 모습이 석관 안에 묻힌 안타까운 어린 생명들을 연상시킨다. 마주보고 있는 이 큐피드는 석관 속에 누운 죽음에 대한 연민의 마음을 보여준다.

이 석관에 자꾸 눈이 가는 것은 이 석관에 묻힌 어린이들의 나이 때문이다. 이들은 프랑스 왕 샤를 8세의 아들들인 샤를 오를랑(Charles Orland)과 샤를(Charles)이다. 샤를 오를랑은 만 3살에 사망하였고, 이름도 만들지 못한 샤를은 태어난 지 불과 26일 만에 죽었다. 석관의 두 석상은 꽤 성장한 두 어린이로 묘사되어 있지만, 실제로 석관 안에 묻힌 시신은 세상도 경험하지 못한 작은 몸일 것이다.

이 석관을 프랑스 일대의 명품으로 만들고 조각상을 큰 어린이로 묘사한 것은 바로 이들의 어머니 안느 드 브르타뉴 왕비이다. 꽃도 피어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아들들에 대한 애절한 어머니의 마음이 이 석관에 담겨있는 것이다.

브르타뉴 지방의 공주로서 프랑스 왕과의 결혼을 통해 브르타뉴를 부흥시켰던 여걸 안느. 역사적 업적을 보면 강인해 보이는 그녀의 인생사에 아들들을 먼저 보낸 아픔이 있었던 것이다. 어린 아들들의 석관을 장식한 어머니의 마음. 그 마음이 어땠을지 나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들들의 죽음을 겪은 후에도 쓰러지지 않고 더욱더 강인해진 여인. 화려하게만 보이던 왕비의 생활사에 녹아든 희로애락이 애잔하기만 하다.

a

성당 광장의 오후. 성당 광장에는 몇 명의 투르 시민들만이 발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 노시경


나는 성당 밖으로 나갔다. 아직 추위가 남아 있는 성당 앞 광장에는 투르 시민들이 발걸음을 바쁘게 옮기고 있었다. 광장에는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도 있고, 아직 나뭇잎이 붙어있는 나무들도 함께 서 있었다. 사람의 삶도 저 나무들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나이에 죽은 삶을 보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절절하게 느끼게 된다.
#프랑스 #프랑스 여행 #투르 #생 가티앵 성당 #성당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4. 4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5. 5 "윤 대통령, 류희림 해촉하고 영수회담 때 언론탄압 사과해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