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의 아들, 그의 눈물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항일독립운동가의 조동선 선생 아들, 고금도 조장원씨

등록 2017.09.04 11:04수정 2017.09.04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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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가 조동선 선생의 아들 조장원 옹(87) ⓒ 완도신문


퇴각을 모르던 조국·민족 최전위 전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떻게 잊을까요? 해지는 저녁바다 반짝이는 노을이 떠오르면, 그 노을만 바라보아도, 입술 아프게 깨물어도 남몰래 흘리는 눈물! 내 가슴 한가운데 묻어두어도,나에겐 눈물이고, 바람인 것을... 그리고 영원한 나의 붉은 태양인 것을... 나는 당신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나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사랑하는 아들아! 눈 뜨고 있는 나의 품 속에 안긴 너의 꿈을 바라보는 것은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신비로운 은혜다. 축제처럼 맑은 너의 이마의 내부보다 어린애처럼 손에 와 닿는 신비롭기만 한 너의 몸의 습성보다, 아버지의 뜻과 정신으로써 너의 삶을 이어가는 너의 나날이 나를 기쁘게 한단다."

아버지는 정맥과 동맥의 피, 그는 최후의 남은 한 방울까지 조국과 민족을 위해 뿌릴 뿐이었다. 비바람이 험궂다고 역사의 바퀴가 역전할 것인가? 마지막 심판날을 기약하는 우리의 정성이 굽힐 것인가? 그는 퇴각을 모르는 조국과 민족의 최전위의 전사였다.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옥고 치른 조동선, 고금면에 거주하는 아들 조장원

일제강점기였던 1934년 '전남운동협의회 사건'은 해남과 완도의 대표적인 사회주의 활동가인 김홍배와 황동윤이 각자 자기 지역에서 활동하다 농민 운동을 중심으로 한 대중 운동을 지도할 기관의 필요성에 대해 인식을 같이 하고 전남운동협의회를 결성해 혁명적 농민 조합 건설을 통해 일제 지주들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됐지만 모두 체포됐다.


조동선 선생은 일제에 항거하는 농민조직인 전남운동협의회에 참가했다가 1년 반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당시 일제의 재판기록에서 그는 '공산주의에 공명(共鳴)하게 된 자'로 적혔다고.

그의 아들 조장원(87)씨는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전후로 아버지를 본 적이 거의 없었는데, 아버지는 이따금씩 한밤 중에 잠깐 들르는 정도였으며 말이 1년 반 옥고지 재판이 이뤄지기까지 구속됐던 걸 합하면 5년은 족히 될 것"이라며 "이는 협의회 사건에 가담했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사정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아버지는 옥살이까지 하고 나왔지만 고통은 끝나지 않아 일본 경찰이 따라붙으면서 가족은 졸지에 도망자 신세가 됐다"라며 "그 와중에도 아버지는 계속해서 농민운동에 가세했는데, 어린 나이에 해남을 거쳐 홀로 고금도 외조부 집에 맡겨지는 등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라고 말했다.

외조부집에 맡겨진 조장원씨, 머슴살이하는 것으로 위장 은신

조장원씨는 외조부집에 거주하면서도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지 않으려 '머슴살이'를 하는 것으로 위장했다고.

그는 "당시에는 집 앞 문패에 거주자들의 이름을 다 적도록 했는데, 거기에 '고용인'(머슴) 란에 내 이름을 썼다"면서 "일본경찰에 적발되지 않으려 가족들과 흩어진 것은 물론 수년간 머슴 행세까지 해야 했다"고 전했다.

숨어 사느라 당연 학교도 다니지 못했다는데, 당시 조 옹의 어머니는 일제 순사에 붙잡혀 형무소 신세를 져야했다고.

붙잡힐 당시, 조씨의 막내 동생은 어머니의 등에 업은 채 형무소로 가게 됐지만, 어머니는 마침 출소하는 사람에게 동생을 맡겨 내보냈다고. 그는 "후일 어머니의 말씀은 형무소 안에서는 먹일 게 없으니 막내 동생을 내 보낼 수밖에 없었다"며 "그때, 막내동생을 잃어버린 줄 알고 한 동안 막내 동생을 찾아다녀야 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참혹했던 시기를 거치고 조국의 광복은 맞았지만,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 들어서는 아버지가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가족 전부가 숨어 지내야 했다. 아버지는 그때까지도 행방이 묘연했다. 남은 가족들은 연좌제가 두려워 고금도에만 머물렀다. 배운 게 없어 출세도 못했다. 조씨 또한 옷 장사를 하고, 떡 방앗간을 운영하며 살다보니 어느덧 80대가 됐다고 했다.

그나마 다른 유족들의 끈질긴 요구 끝에 1990년대 들어 일부 참가자들은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조씨의 아버지도 지난 1993년 김영삼 정부에서 국가유공자로 추서됐다. 이후 조씨는 아직껏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 참가자들과 유족들을 대신해 전남운동협의회를 알리고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완도 고금면 테마공원에 독립유공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고금항일운동 충혼탑'을 세우는 데 앞장 섰다.

조씨는 "전남운동협의회 사건 당시 아버지 나이가 29살이었다. 옥고를 당한 지사들의 연령대를 보면 죄다 20~30대였다. 청춘을 항일운동에 던진 것"이라며 "조국을 위해 몸 바치고도 8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외면받는 현실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고 말했다.

[항일독립운동가 조동선 선생은]

생애: 1908. 6. 29 ~ 1957. 4. 12 / 출생지: 전남 완도 군외면 / 운동계열: 국내 항일 / 훈격(연도): 애족장(1990)
공적내용 : 전남 완도 사람이다. 1929년 4월 서울 경신학교 3학년에 재학하고 있을 때 악질적인 교사들을 배척하기 위한 운동을 주동하다가 퇴학당하고, 일본 동격에서 입명관대학 전문부에 진학하였다가 1931년 11월 귀국해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해 그 뒤 1931년 12월 중순 전남 완도에서 동지들과 함께 완도군 내의 농민운동과 어민운동의 활동방법을 협의하고 유력한 인사들을 이 운동에 참가시키고 동지를 규합할 것을 결의하였다.

1932년 11월 완도 농민운동을 위하여 우선 소작인과 어업조합원들을 동원해 소작쟁의와 어업조합 폐지운동을 일으키고 야학을 설피해 운영하는 등 항일투쟁을 위한 활동을 하다가 피체됐다.

1936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조동선 #전남운동협의회 #독립운동 #완도 #조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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