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의 '새로운 나라'와 문재인의 '나라다운 나라'

[서평] 조선시대 역사와 현실 정치 연결한 정치소설 <조선개국투쟁사>

등록 2017.07.28 09:55수정 2017.07.28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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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이인임이 권력을 틀어쥐게 된 것은 1374년 공민왕 시해사건을 통해서였다. 내전의 환관에게 왕이 살해당하자 수사 책임을 맡게 되면서 권력은 이인임의 것이 된다. 우왕이 즉위했으나 허수아비일 뿐이었다. 마치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 과정에서 수사 책임을 맡아 실권을 쥔 전두환을 보는 느낌이다.

공민왕 시해 사건은 이후 고려 정국을 혼란으로 몰아넣으며, 1392년 조선 개국으로 이어진 중요한 단초가 된다. 18년이란 시간 동안 조정에서는 무수한 권력투쟁이 벌어지며 희비가 엇갈린다. 권력을 장악한 쪽은 승승장구했고, 빼앗긴 쪽은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다. 정치적인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때론 오랜 시간 유배생활을 떠나게 하거나 권좌에 화려하게 복귀하는 발판이 되기도 했다.


정도전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이상주의자로 비쳤던 그는 당시로서는 급진사상과도 같은 성리학에 몰두한 유생이었다. 성리학은 지금으로 치면 마르크시즘과 다름없을 정도로 앞서나간 사상이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좋은 이치도 있으나 덕을 잃은 군주는 갈아치워야 한다는 반역으로 해석될 수만큼 아주 무서운 사상이었다. 자칫 잘못 발설했다는 목숨부지가 어려운 내용이기도 했다.

정치적 비주류였던 그는 성리학이란 이론을 바탕으로 토지개혁으로 대표되는 사회개혁을 주창한다. 하지만 거대한 벽을 넘기는 쉽지 않고 돈키호테처럼 무모하게 비칠 뿐이다. 그럼에도 기득권 세력에 줄서지 않고 꼿꼿하게 자신의 생각을 내세우던 그는 시대의 이단아였다. 모난 돌이 정 맞듯 안팎의 견제와 질시를 받게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꿈꾸던 이상을 현실로 만들어 낸 한국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인물이라는 데 있다. 구체제이 기대 현실과 타협하며 살았던 경쟁자들과는 방향이 전혀 달랐다. 조선 개국과정에서 체제 변화를 위해 끊임없이 토론하고 논쟁하며 그 뜻을 관철시킨 그의 투쟁은 결실을 맺었고, 지금도 그가 남긴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 전율하게 된다.

역사소설로 치장한 정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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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표 정치소설 <조선개국투쟁사> ⓒ 글통출판사

<조선개국투쟁사>는 이 과정을 지금 한국사회 정치 현실과 결부시켜 풀어낸다. 과거의 이야기지만 현재의 이야기고, 현재의 모습은 과거의 역사에서 이미 지나온 부분이다. 그 점에서 아무 매력 있는 소설이다. 정도전의 성리학을 중심에 두지만 촛불혁명과 정치개혁 등의 시대적 요구는 정도전이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과정과 유사하다.


읽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게 만든다. 고려 말과 조선 초가 소설 속의 공간이지만 정치적 당파 투쟁과 이론가들의 논쟁은 우리 정치 현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에서 역사소설보다는 정치소설로서 힘을 얻는다. 새로운 시대와 변혁의 열망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다.

곳곳에서 등장하는 정치적 경구들은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이다. '역사의 진실이란 밝혀지는 것이 아닌 다음 권력에 의해 정리되는 것이다'든지 '정치는 공간의 예술'이라 설명하는 부분이나 '사람들의 분노와 두려움이 공존하는 지금이 정치를 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 '권력 운동은 내부와 외부를 넘나들어야 한다', '정치는 불순물들과 함께하는 것이지 순수한 정치가 어딧냐?"는 물음 등은 현재의 한국 정치를 조선 개국 전후의 시대상을 통해 정리해 주는 인상이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로 바뀌고, 목숨을 살려준 은인이 어느 순간 배신자로 바뀌거나 상황 변화에 따라 스승과 친구가 서로 등지고 경쟁자로 바뀌는 부분은 정치의 비정함과 냉정함을 일깨워준다. 개혁에 저항하는 수구세력의 반대와 방해 역시도 이를 돌파하기 위한 정치적 힘의 필요성과 함께 다른 정치세력과의 합종연횡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저자는 당시 상황을 정치적 당파 투쟁의 시선에서 세세하게 그려냈다. <조선개국투쟁사>가 소설보다는 정치 교양서로서의 무게감이 더 와 닿는 부분이기도 하다. 언관의 말 한마디가 칼을 앞세운 무장을 무력시키는 부분이나, 정치인생에서 어떤 후퇴를 설계하느냐가 중요한지를 강조하는 사례는 마치 끝없는 욕심을 부리는 몇몇 정치인들을 향한 훈계로 들리기도 한다.

고려 말 명나라와 원나라를 놓고 정치적 입장에 따라 선택을 달리하는 고려 신하들의 모습은 강대국 틈바구니 외교가 지속되는 우리 외교 현실을 고민해 보게 한다. 힘겨웠던 권력교체를 이루고 개혁을 통해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세상을 그리는 모습은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과 주요 개혁 과제 설정을 빗댄 측면이 엿보인다.

새로운 나라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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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정도전은 성리학의 다섯 덕목인 인의예지신을 4대문과 보신각에 새겨 넣었다. 예에 해당하는 숭례문 ⓒ 문화재청


<조선개국투쟁사>는 '새로운 나라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를 부제로 하고 있다. 어떤 정치를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근원적 질문이기도 하다. 관념적인 정치가 아닌 현실적인 정치 중요성은 이 소설이 강조하는 부분이다. 몽상처럼 보이는 이상이 어떤 의지를 갖느냐에 따라 꿈을 이루게 되는 과정은 여전히 사회변혁 의지를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길잡이 역할을 제시하고 있다. 

600년 전 조선을 개국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정도전의 사상은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중요한 상징물로 남아 이어지고 있다. 맹자가 주창한 유학의 중요한 다섯 덕목인 인의예지신은 4대문의 이름과 보신각에 구현돼 있다. 비록 정적에 의해 비참하게 삶을 마쳤으나 그의 사상과 정신만큼은 유구한 역사 속에 그대로 배어있는 것이다.

이색이나 정몽주 등과 다른 선택을 한 정도전을 통해 우리 시대의 개혁의 방향이 어떠해야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은 이 책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이다. 당시 사회개혁 과정에서 기득권의 저항이 심했던 토지문제는 지금 현실에서 부동산 문제로 심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문제를 이야기거리로 끌어온 작가의 예리한 시선을 엿보게 한다.

저자 홍기표는 90년대 후반 PC통신에서 홍자루라는 필명으로 필력을 과시했던 논객으로 진보정당 주변에서는 꽤 유명한 인사다. 87년 6월항쟁을 겪은 고등학생 때부터 사회변혁운동에 뛰어 들었고, 국회의원 비서 등으로 활약했으며, 오랜 시간 진보정당 브레인으로 활동해 왔다. 경제학을 전공한 영향으로 복지 문제를 중요시하고 다방면에서 본질을 꿰뚫는 능력이 탁월한 데다, 보수인사들과의 대화에도 적극적일 만큼 넓은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그의 이런 바탕은 책 속에 주요 인물들의 발언에 녹아 있다. 그는 고려 말의 성리학이란 80년대 학생운동의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으로 소설을 구상했다고 밝히고 있다. 오래 전에는 노동 분야를 다루는 진보인터넷 매체에 <빨간 삼국지>라는 소설을 인기리에 연재하기도 했는데, 역사적 상상을 통해 사회운동 기원과 권력운동의 속성을 현대적 감각으로 다시 표현한 창작물이었다. <조선개국투쟁사>도 그 연장선으로 같은 바탕을 두고 있다.

조선개국투쟁사 - 새로운 나라는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홍기표 지음,
글통, 2017


#정도전 #조선개국투쟁사 #홍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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