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고무신 가게를 아시나요"

42년 역사의 충남 예산 '조양고무'

등록 2016.11.29 10:22수정 2016.11.29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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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 사장이 일러주는 대표적인 브랜드를 보면 왕자표, 말표, 기차표, 범표, 타이어표다. 이 가운데 타이어표가 유일하게 고무신과 장화만을 전문으로 생산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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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비껴 나는 전(全)-군(群)-가(街)-도(道)
퍼뜩 차창으로 스쳐 가는 인정(人情)아
외딴집 섬돌에 놓인
하나 둘 세 켤레


1980년대 고등교과서에 올랐던, 장순하 시인이 1966년에 발표한 현대시조 <고무신>이다.

시인은 눈보라 치던 날 전주에서 군산으로 가는 버스 안에 있고, 순간 버스차창으로 스쳐가는 풍경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외딴 초가집 섬돌 위에 나란히 놓인 세 켤레의 고무신, 하나는 아기것, 나머지 둘은 엄마, 아버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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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정보> ⓒ 이재형


남자 고무신은 멋없이 둥굴너부적하지만 여자 고무신은 외씨버선을 본따 만든 듯 오똑한 코가 있어 참 어여쁘다.

고무신, 그 이름이 처음 생겨난 건 1920년대 석유화학제품이 다양해지면서다. 그리고 60년 넘는 세월을 국민의 편안한 발로 참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요즘 신는 신발이야 발을 보호하고 보행을 편안하게 하는 기능 한가지이지만, 고무신은 달랐다. 꼬맹이들에게는 십리도 훨씬 넘는 하교길에 심심해지면 도랑 막고 물고기를 잡는 쓸모까지 있었다. 도랑물을 퍼내는 바가지 대용으로도 쓰였고, 물고기를 잡으면 넣는 그릇이 되기도 했다.


어디 그 뿐인가. 모래밭 위에서 삼삼오오 모여 고무신을 뒤집어 끼워 만든 자동차 놀이는 또 얼마나 재미있었던지 해지는 줄 몰랐다. 또 꿰매 신을 수도 없을 만큼 닳아 해지고 찢어진 고무신은 마루 밑에 모아놓고 엿장수 가윗소리를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어른들에게도 고무신은 참 편했다. 논일 하다가도 읍내에 나갈 일 생기면 도랑에 앉아 신에 묻은 흙 깨끗이 씻어내고 발가락에 신을 꿴 뒤 발 뒤꿈치에 '탈탈' 부딪쳐서 물기를 털어내면 그만이었다.

어느 자린고비는 신발이 닳을까 사람들 없는 곳에서는 뒷춤에 들고 걷다가 누가 보이면 '툭' 떨어뜨려 신었다고 한다. 신고 벗기가 얼마나 편했으면 그게 가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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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앞에 진열된 다양한 신발들. ⓒ <무한정보> 이재형


고무신은 차등이 없었다. 비싸고 싼 것도 없고 모양새도 똑같아 고를 것도 없이 "10문 7 하나 주슈" 하고 치수만 얘기하면 된다.

당시 한국사람의 보편적 치수는 남자가 10문 5(250mm)에서 11문(260mm)까지이고, 여자가 17문(225mm)에서 20문(240mm)이란다. (남자신은 크기가 10문 5에서 12문(280mm)까지 있고, 여자신은 17문에서 22문까지 있다고 한다.)

더욱이 머슴이건 주인이건 위아래 안따지고 똑같이 신는 신발이 고무신이었으니 마을에 잔치라도 벌어지면 댓돌 위에, 멍석 가장자리에 똑같은 고무신들이 수두룩 했다. 그래도 돌아갈 때는 용케 제 신발을 찾아 신었다. 간혹 새 신발과 헌 신발이 바뀌기라도 하면 시끄러워지기도 했고, 죄없는 꼬맹이들이 애비 신발을 찾아 넘의 집을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래서 꼼꼼한 아녀자들은 신발코 쪽에 바느질로 이름 첫 자를 새겨놓기도 했다.

참 쓸모 많았던 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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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제 사장이 청년기에 시작한 42년 역사의 조양고무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바로 옆에는 90년 역사의 동신고무가 나란히 있다. ⓒ <무한정보> 이재형


오늘은 오일장. 고무신 한짝 장만하러 1970년대 충남 예산군 예산읍내장으로 나가보자. 쌍소나무배기에서 장터 아래쪽으로 쭉 내려간다. 다리를 건너고 쇠전(우시장) 쪽으로 꺾어지면 장옥 한 편에 젊은 사람이 하는 신발가게 '조양고무'가 있다.

"그땐 장꾼들이 참 많았어. (지금은 예산천을 복개해서 안 보이지만) 요 앞에 예산천을 건너는 다리가 있었는데 다리는 좁고 사람들은 많아서 가끔 사람들이 다리 아래로 떨어지기도 했지. 예산군 인구가 17만명이나 되던 시절이었으니까. 내가 1974년 3월 8일날 신발가게를 차렸는데 우리가게가 목이 워낙 좋아서 장사도 잘 됐지"

조양고무 조세제(69) 사장은 42년 전 기억을 더듬는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살 때 얘기다.

서천에서 태어나 19살 나이에 광천으로 올라와 거기있던 태화고무상사에서 7년 동안 영업사원으로 근무했다. 도소매를 하며 장항선 일대 신발장사를 하는 사람들과 안면을 텄고, 장사 기술을 익혔다.

청운의 꿈을 품고 올라 온 예산에서 '조양고무'란 간판을 걸었다. 10평 남짓한 장옥 한 칸에 40만원을 주고 샀다. 그 땐 큰 돈이었다. 1979년 시장재개발로 상설시장이 생겼고, 가게터를 넓혀 16평을 1000만원에 분양받았다. 42년 세월을 오롯이 한 자리에서 그 간판 그대로 조양고무는 오늘도 어김없이 문을 열고 있다.

조 사장에게 예산에서 가장 오래된 신발가게가 어디냐고 묻자 "우리가게 바로 옆에 있는 '동신고무'인데 90년이 넘었지. 백윤흠씨가 1대 사장으로 50여년을 했고, 아들 백승훈씨가 40년을 하다가 작년에 돌아가셨어. 그 부인이 계속 가게를 열다가 몸이 아파 지난 3월에 정리를 해서 내가 인수했지"

지난 40여년 동안 신발도 변화를 거듭해 제품이 다양해졌다. 지금은 16평 가게 안에 슬리퍼, 장화, 방한화 등 각종 기능성 신발들이 꽉 들어차 있다. 종류만 해도 수십종이 넘어 보인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봐도 고무신은 보이지 않는다.

"요즘 고무신을 누가 신어. 실지(진짜) 고무로 만든 고무신은 아예 안나와. 다 PVC로 만든 고무신이지"

조 사장은 재고로 남은 거라면서 진열대 구석에서 진짜 고무신을 꺼내 보여준다. 너부죽한 하얀 남자 고무신과 앙증맞은 여자 코 고무신이다.

"이게 진짜 고무로 만든 신발이라서 부드럽고 미끄럽지도 않어. 고무값이 비싸지니까 요즘은 PVC로 만드는데 맨질맨질하고 뻣뻣해서 이것만 할라믄 어림도 없지"

고무신이 한참 잘 팔리던 시절엔 신발생산업체도 많았다. 조 사장이 일러주는 대표적인 브랜드를 보면 왕자표, 말표, 기차표, 범표, 타이어표다. 이 가운데 타이어표가 유일하게 고무신과 장화만을 전문으로 생산했다고 한다.

1970년대엔 고무신과 더불어 운동화도 쏟아져 나왔다. 학생화가 대부분이었다. 남학생용 검정색 운동화와 여학생용 하얀색 끈 끼우는 구멍 세 개 뚫린 곤색운동화가 대세였다.

"그 땐 장사가 참 잘됐지. 특히 학생들 운동화가 많이 팔렸어. 학생들은 활동력이 좋으니까 금방 떨어지지 않남. 그러다가 1980년대에 메이커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학생 손님이 뚝 끊어졌지. 매상이 3분의 1이나 줄었으니까 큰 타격이었지"

대기업이 골목상권으로 침투한 대표적 사례가 여기서도 나온다.

그래도 전통적 신발가게들이 예산읍내만 대여섯곳 유지하는 것은 이곳이 농촌지역인데다 값싸고 질긴 신발들을 찾는 노령층 인구가 많기 때문이란다. '조양고무'에도 그런 단골 손님들의 발길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여기선 대기업의 체인점들이 일삼는 '세일'이란 얄팍한 상술이 없다. 그저 말만 잘하면 "주인 입에서 본전치기"란 말이 나올만큼 왕창 깎기도 한다.

신발문수 물을 것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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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한 분이 털신을 한쪽은 신고 한쪽은 손으로 매만지며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 <무한정보>이재형


"날이 추워져서 따뜻한 신발 하나 사러 왔다"며 할머니(80) 한 분이 가게 안으로 들어 온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소설(小雪)'이다.

조 사장이 냉큼 일어나 할머니를 따뜻한 평상 위에 앉히고 신발 문수(사이즈)도 물을 것 없이 골라 신겨주니 꼭 맞는다. 할머니도 맘에 들어하는 눈치다.

"아이고 이쁘다. 딸네 갈 때만 신어" "왜 딸네갈 때만 신어! 올매여(얼마여)" "2만5000원 밖에 안혀" "왜 그르키 비싸" "비싸믄 2만3000원만 내셔" "에이 그냥 두장만 받어" "아이고 난 뭐 냉겨 먹고?"

할머니는 당신 뜻대로 2만원에 고운 털신을 장만했다.

"한 40년 하다보니 오래된 손님들이 고객으로 안보이고 그냥 친척 같어. 어디서 만나도 항상 반갑지. 멀리서 신고 있는 신발만 봐도 알아 보니까. 거동이 불편해 장에도 못나오시는 분들을 가끔 시골마을에서 만날 땐 정말 마음이 아퍼"

42년 가게를 하면서 수지 맞았던 때는 언제였냐는 물음에 "이 장사는 마진이 박해서 큰 돈을 못 벌어. 그냥 애들 키우고 산 거지"라며 사람좋은 웃음을 짓는다.

그래서인지 조 사장은 부동산 일도 겸하고 있다. 투잡인 셈이다. 가게를 비울 땐 큰 아들이 손님을 맞는다.

"아들에게 가게를 물려 줄 계획이냐"고 물으니 "비전이 있어야지. 인구는 자꾸 줄고…. 내가 힘닿는 데까지만 하고 말 거여"라고 단호하게 결론 짓는다.

사람들이 북새통을 이뤘던 예산전통시장은 반세기 세월을 건너오며 한산해졌다. 농촌은 초고령사회로 진입했고 전통시장을 이용했던 소비층이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그 때의 영화를 다시 누릴 순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시장문화가 오랫동안 지속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조양고무 앞에 서있는 조 사장을 사진에 담는다.
덧붙이는 글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와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
#고무신 #신발가게 #조양고무 #역사 #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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