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면 죽는 조선판 김영란법

<경국대전> 속 '분경 금지조항'... 접촉만으로도 죄 물을 수 있었다

등록 2016.10.05 10:23수정 2016.10.05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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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 한눈에

  • 조선 <경국대전> 중 '분경 금지조항'이 있다. 이를 근거로 '공직자의 꽁무니를 바삐 쫓아다니는 행위'를 벌했다.
  • 친족·사돈·이웃이 아니면서 공직자의 집에 출입하면 법을 위반하는 게 됐다. 법을 저촉하면? 곤장 100대와 유배형 3000리(실제 900리)
  • 물론 한계는 있다. 공직자를 쫓아다니는 사람은 벌하고, 그 공직자는 벌하지 않았다. 그래도 법의 엄격성만 놓고 보면 김영란법보다 더 무거웠다.
  • 조선왕조가 문 닫을 때까지 이 조항은 개정되거나 폐지되지 않았다. 그래도 부정부패를 막진 못했지만...
김영란법(부정청탁 금지법)이 발효된 지 일주일 정도 흘렀다. '자기 밥값은 자기가 내는 시대가 됐다' '단군 이래 이런 법은 없었을 것이다' '역사는 2016년 9월 28일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는 등의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우리가 지난 한 주간 품었을 그런 느낌들. 조선시대 사람들도 그런 느낌을 품은 순간이 있었다. 그들 시대에도 그런 법이 제정되는 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그 유명한 '분경 금지조항'이 있었다.

달릴 분(奔)과 다툴 경(競)으로 된 '분경'은 공직자의 꽁무니를 바삐 쫓아다니는 모습을 표현한 단어다. 부정청탁이나 금품제공을 목적으로 공직자에게 접근하는 행위를 그렇게 표현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의 형전 즉 형법 편에 바로 이 분경을 금지하는 조항이 나온다. "분경하는 자는 곤장 100대와 유배형 3000리에 처한다"라는 조항이 그것이다.

만나는 것만으로도 죄라 여겼던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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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 표지. ⓒ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김영란법이 금지한 행위는 부정청탁과 금품수수다. 법률의 정식 명칭 자체가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다. 이 법 제5조 및 제8조에서 두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이에 비해 <경국대전> 분경 금지조항은 훨씬 더 강도 높았다. 부정청탁과 금품수수의 이전 단계인 만남 자체부터 봉쇄했다. 일반인이 공직자의 집에 드나드는 것조차 금지했던 것이다. 그런 집에 드나드는 행위 자체가 범죄구성요건이었다.

지금처럼 식당이나 찻집, 술집이 많지 않을 때였다. 그래서 부정청탁이나 금품수수가 이뤄질 장소로 집만큼 괜찮은 곳이 없었다. 또 관청 안에서는 보는 눈이 많기 때문에 청탁이나 수수가 일어나기 힘들었다. 그래서 공직자의 집에 출입하는 행위를 금지함으로써 불법행위를 원천 차단하고자 했던 것이다. 


김영란법 위반자를 적발해 포상금을 타려는 이른바 란파라치(김영란법 파파라치)들이 진을 칠 만한 장소는 고급 식당, 결혼식장, 골프장 등이다. 만약 이런 사람들이 조선시대에 뚝 떨어진다면, 이들은 스마트폰 대신 붓과 화선지를 들고 공직자 집의 대문 주변에 포진할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장소에 '분파라치'(분경금지법 파파라치)들이 몰려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공직자의 집에 드나들면 무조건 처벌을 받았을까? 그렇게 되기가 쉬웠다. <경국대전> 형전에서는 분경 금지조항의 예외로 '성이 같은 8촌간, 성이 다른 6촌간, 부인 쪽으로 6촌간, 사돈, 이웃이 집을 출입하는 행위'를 뒀다. 친족·사돈·이웃이 아니면서 공직자의 집에 출입하면 이 법에 저촉된다는 의미였다.

김영란법 못지 않은 장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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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 형전의 분경금지 조항. ⓒ 김종성


따라서 공직자의 집에 들어갔다가 적발된 사람은 자신이 공직자의 친족·사돈·이웃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부득이한 사유가 있어 출입했다는 사실이라도 증명해야 했다. 검사가 피고인의 유죄를 입증하는 게 아니라 피고인이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야 했던 것이다.

만약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하면, 곤장 100대를 맞고 3000리 유배형을 받아야 했다. 중국이라면 모를까, 조선처럼 좁은 나라에서 3000리나 되는 곳으로 귀양을 떠날 일은 없었다. 중국한테 지기 싫어서 3000리라고 규정했을 뿐, 실제로는 900리였다. 900리면 해안가나 외딴섬이었다. 이런 곳으로 유배를 떠나야 했다.

하지만, 곤장 100대를 제대로 맞으면 굳이 유배형을 떠날 필요도 없었다. 집행관이 봐주지 않는 한, 곤장 100대를 맞고 살아남을 확률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공직자를 잘못 접촉했다가는 곤장을 맞고 세상을 떠날 확률이 높았다. 살아남는다 해도, 시커멓게 골병 든 엉덩이를 끌고 3000리(실제는 9백 리) 유배를 떠나야 했다.

김영란법에서 규정한 형벌 혹은 제재조치의 상한선은 징역 3년 및 벌금 3천만 원(제22조), 과태료 3천만 원(제23조), 특정한 경우에 수수금품의 5배에 상당하는 과태료(제23조 5항), 소속기관장에 의한 징계처분(제21조) 등이다.

이에 비해 분경 금지조항을 위반하면 곤장 100대에 유배형 3000리였다. 분경을 하는 쪽만 처벌을 받고 분경을 받는 쪽은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점이기는 하지만, 형벌의 수준과 범죄구성요건의 엄격성만 놓고 보면 지금보다 훨씬 무서운 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조항도 김영란법 못지않은 핵폭탄급 장치였다.

소문만으로도 수사할 수 있도록 한 <경국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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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관청이 많았던 육조거리(광화문 거리).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이다. 사진 아래쪽의 대문은 광화문이다. ⓒ 김종성


이렇게 무서운 법이었기 때문에, 조선왕조는 이 법의 적용범위를 한정했다. 김영란법처럼 광범위하지는 않았다. 분경 금지조항의 적용을 받는 집은 이조 및 병조 관리의 집, 각 부대 당상관급(정3품 상급 이상) 장교의 집, 이방·병방 담당 승지(임금 비서)의 집, 사헌부·사간원 관리의 집 등이었다.

이조는 문관 인사권을 행사하고, 병조는 무관 인사권을 행사했다. 주상 비서실인 승정원의 이방과 병방도 이조 및 병조에 대응됐다. 당상관급 이상 장교도 각 부대의 인사권을 행사했다. 그리고 사헌부와 사간원은 국정을 비판하거나 관료들을 탄핵하는 등의 권한을 행사했다. 인사권을 갖거나 국정에 영향을 미치거나 사법권을 행사하는 부서에 근무하는 공직자의 집에 출입하는 행위만을 처벌했던 것이다. 

김영란법에 비해 적용범위가 좁기는 하지만, 불법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공무원들과의 접촉 기회를 엄격히 차단했으니 이런 면에서는 김영란법에 뒤지지 않았을 것이다. 공직자의 집에 드나드는 행위만으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었으니, 어찌 보면 김영란법보다 무서운 법이었다. 이 무서운 법은 조선왕조가 문을 닫을 때까지 개정되거나 폐지되지 않았다.

분경 금지조항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반인이 아니라 공직자를 처벌하는 규정도 많았고 그런 규정들도 엄격했다. 예컨대 <경국대전> 형전에는 지방 아전들이 백성들에게 금전적 피해를 주는 행위를 관청에 신고하라고 권장하는 규정이 있다. 또 지방 관리가 백성에게 그런 피해를 입힌 경우에는 물증 없이 소문만으로도 수사를 개시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경국대전> 형전과 함께 형법 역할을 한 것이 또 있다. 명나라 법인 대명률을 조선 실정에 맞게 수정한 <대명률직해>가 그것이다. <대명률직해>에서는 공직자가 뇌물을 받은 경우에는, 직무상의 부정을 했건 안 했건 뇌물 액수에 따라 형량을 선고하도록 했다.

위와 같은 법적 장치들에서 느낄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도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에 대한 법적 견제와 감시가 까다로웠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근절되지는 않았다. 무섭고 까다로운 법률을 둔다고 해서, 오랫동안 벌어진 불법이 쉬이 사라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전례를 볼 때, 부정청탁과 금품수수를 없애기 위한 입법 이상의 피나는 노력을 계속해서 하지 않는다면, 분경 금지조항 같은 핵폭탄급 장치를 두고도 부정부패를 근절하지 못한 조선왕조의 전철을 피하기 힘들 것이다.
#김영란법 #경국대전 #세조 #조선시대 #부정청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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