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상규명 후 딱 하루만 더 사는 게 소원"

[인터뷰] 세월호 참사로 사망한 고 오준영군의 부모 오홍진·임영애씨

등록 2015.04.14 21:29수정 2015.04.14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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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인양을 촉구하는 서명을 하는 학생들 서명지 앞으로 모여드는 이들 대부분이 교복 입은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세월호라는 이름만 듣고도 쫓아왔다. ⓒ 황윤희


지난 8일, 세월호 참사로 사망한 고 오준영군의 엄마 아빠, 임영애·오홍진씨는 경기도 안성의 한 번화가에서 세월호 인양을 촉구하는 서명을 받았다. 바람이 찬 날이었다. 임영애씨는 "우리 아이들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나왔다"며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또 "시끄럽게 해 죄송하다"고도 했다. 40여 분 남짓 440명이 서명했다.

서명지 앞으로 모여드는 이들 대부분이 교복 입은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세월호라는 이름만 듣고도 쫓아왔다. 놀라웠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저토록 자발적이었던가? 아니, 아이들은 다만 지독하게 공감하고 있을 뿐이었다. 1년 전 그날 만연한 거짓 속에서 산 채로 수장당한 또래의 친구들에게 말이다.

또 지독히 불신하고 있었다. 단 한 명을 구하지 못한 이 나라와 어른들을…. 줄 서서 서명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이를 여전히 남아 있는 '희망'이라 불러야 할지, 아니면 철저히 버림받은 아이들의 '비극'이라 불러야 할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다만 부끄러웠다. 대한민국의 어른이라는 것이….

세월호 참사로 아이를 잃은 부모들은 지금 병이 깊어가는 중이다. 오홍진씨는 얼마 전 디스크 수술을 했고 없었던 당뇨와 고혈압이 생겼다. 임영애씨도 디스크에, 피부질환에, 섭식장애를 앓는다. 참사 후 8일간 물도 못 마시면서 모든 장기가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그 뒤로 음식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다. 두 사람은 약으로 겨우 버티고 있다.

다른 유가족도 마찬가지다. 슬픔과 분노가 병을 부르고, 시위와 노숙, 도보행진 등 매일처럼 이어지는 강행군이 병을 깊게 한다. 뼈마디가 닳고 울화로 심장이 두근거리고 따끔거리는 게 공통된 증상이라 했다. 하지만 유가족들은 병원에 가지도 못한다. 가면 입원하라고 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싸움에 손 하나가 아쉬운 시간, 이들은 병원 침대에 누워 있을 수가 없다. 게다가 아직 해놓은 게 하나도 없어서 유가족들은 제 몸을 돌볼 수 없다.

자식을 잃은 부모는 그랬다. 자식이 왜 죽었는지 그 앞뒤를 설명하지 못하는 부모는 그랬다. 그들은 아이들과 같이 죽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제 수명을 줄여가며 진실을 위한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다. 오홍진씨는 몇 번의 질문에 다만 이렇게 대답해 더 이상 아무 말도 필요치 않게 했다.

"자식이잖습니까?" 


누가 유가족을 시체장사 하는 사람으로 모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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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오준영군이 만든 장갑 고 오준영군은 엄마가 손을 데자, 손수 바느질을 해 장갑을 만들어 엄마에게 줬다. 그 오래전의 장갑을 엄마는 아직도 가지고 있다. ⓒ 오홍진·임영애 제공


준영이는 어떤 아이였나? 사랑이 너무 많은 아이였다. 준영이는 반월공단 종이박스 만드는 공장에서 근무하는 아버지가 안쓰러웠다. 야간작업을 마치고 아침에 돌아오는 아버지가 힘들어보여서 준영이는 초등학교 때 이런 시를 썼다. '안산의 아침은 아프다.'

또 준영이는 살갑고 정이 많은 아이였다. 물건마다 이름을 지어놓고 살뜰히 아껴 엄마는 아직도 준영이 물건을 버리지 못한다. 한번은 임영애씨가 냄비에 손을 덴 적이 있었는데 그걸 보고는 못하는 바느질을 직접 해선 장갑을 만들어주더란다. 그러고는 "엄마 손 다치지 말라고 종일 만들었다"고 전했다.

또 준영이는 아침에 등교할 때도 손으로 키스를 날리던 아이였다. 엄마가 그걸 받아먹는 시늉을 했어야 했는데, 가끔씩 이쪽으로 던졌는데 왜 저쪽으로 받냐고, 그것도 제대로 못 받아먹느냐고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러던 준영이는 수학여행을 떠난 후 돌아오지 않았다. 준영이가 부모의 품으로 돌아온 것은 자신의 생일인 4월 23일, 참사 후 8일이 지난 날이었다. 많이 부패된 모습이었다고 한다. 임영애씨는 아이의 탯줄을 끊은 날, 아이의 시신을 받았다.

이전에 준영이는 가족들에게 별명을 지어주었다. 아빠는 지킴빠곰(지킴이 아빠곰), 엄마는 충전마곰, 여동생은 희망아곰, 자기는 꿈돌이곰돌이였다. 그걸 새긴 반지를 만들기로 했는데, 수학여행 가기 며칠 전에는 유난스럽게 더 졸랐다고 한다. 하지만 엄마는 준영이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다. 반지를 끼고 있었더라면 침몰의 순간, 준영이가 덜 외로웠을 텐데 말이다. 부모님은 그 반지를 이제서야 만들었다. 준영이 몫의 반지는 아이의 영정사진 앞에 있다.

유가족들 대부분 아이들의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다. 휴대폰도 해지하지 않았고 여행자보험도 수령하지 않았다. 휴대폰이 밤새 울기도 한다. 아이를 그리워하는 친구들이 문자 메시지를 보내오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돈을 말하며 그들을 시체장사나 하는 사람으로 몰고 있는가?

"유가족들은 보상에 관한 논의조차 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의사자라니요? 우리 아이들은 독립운동하다 죽은 게 아닙니다. 아이들은 의사자가 아니라 피해자입니다. 대학 특례입학이요? 아이가 죽었는데 누구를 특례입학시키라는 겁니까? 우린 다 필요없습니다. 보상금도 필요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저 진실입니다. 내 아이가 왜 죽었는지 그것만 알려달라는 겁니다."(오홍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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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오준영군의 가족을 대신하는 곰인형들 준영이는 아빠는 지킴빠곰(지킴이 아빠곰), 엄마는 충전마곰, 여동생은 희망아곰, 자기는 꿈돌이곰돌이라고 별명을 지었다. 그걸 새긴 반지를 만들기로 했었는데, 수학여행 가기 며칠 전에는 유난스럽게 더 졸랐다고 한다. ⓒ 오홍진·임영애 제공


해명된 적 없는 1만 가지 의문

1년이 지났다. 그만 덮자고, 그만 보내주자고 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홍진씨는 세월호 참사에는 해명되지 않는 의문이 1만 가지쯤 있다고 비유적으로 전했다. 그 수많은 의문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누가, 어디를 걸어도 2014년 4월 16일에 발이 붙들려 휘청거릴 것이다.

그 수많은 의문 중 몇 가지를 돌이켜볼까? 세월호가 지겨워서 말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세월호가 아파서 말하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입이 마르고 닳도록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이 해명될 때까지 수시로 검은 망각의 주머니를 툭툭 건드려야 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영원히 반복되는 고통 속에 머무는 것, 그리하여 진실을 인양해내는 것, 그것만이 남은 자들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그날 유독 세월호만 안개 낀 인천항에서 출항했는지 모릅니다. 다른 배들이 다 출항을 포기할 때 어째서 그랬는지 알지 못하지요. 또 사고 전부터 배가 이상했다는 증언, 이미 군산 앞바다에서 한 번 휘청했다는 증언들도 해명되지 않았습니다." (오홍진)

세월호참사국민대책회의와 가족대책위원회가 공동제작한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도 같은 선상의 질문을 던진다. 다큐에서는 사고 발생시간을 기관마다 다르게 표기한 까닭에 대해 묻는다. 또 진도VTS와 세월호의 교신 파일이 의도적으로 편집된 듯하다는 전문가의 주장을 인용하며 해명을 요구하고 있다.

침몰 원인에 대해서도 질문은 이어진다. 다큐는 정부가 두 차례나 수정된 항적도를 제시했지만 그마저도 변침 전후 29초간의 기록은 없었다고 밝힌다. 다큐 속 전문가는 기록이 없을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대해 오홍진씨는 "사라진 29초의 일부를 유가족들이 찾아냈을 정도다"라고 말했다. 유가족들이 찾아낸 자료에 따르면 세월호는 지그재그로 운항하던 중 갑자기 급변침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왜 그렇게 운항했는지 우리는 설명을 들은 적이 없다.

오홍진씨는 "6천 톤급 여객선이 그렇게 갑자기 방향을 선회하는 건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 다큐에 등장하는 레이더 영상을 보면, 급변침하는 순간 50~100m에 달하는 의문의 물체가 보이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직 확인된 바 없다.

"구조 활동도 의문투성이입니다. 해경은 123정 한 대를 출동시키더니 처음 10분 동안은 배에 다가가지도 않고 주위만 맴돌았지요. 이후에는 7인승 구명보트 한 대 보내 승무원을 우선 구조했을 뿐이고요. 해경은 그렇게 골든타임을 흘려보냈습니다. 그리고 침몰 마지막 7분을 남겨두고 거의 같은 시점에 구조를 멈추었지요." (오홍진)

그랬다. 난간에 승객이 매달려 있는데도, 민간 어선이 여전히 구조 활동을 하고 있는데도 해경은 그랬다. 침몰하는 세월호 곁으로 기어 들어가 함정으로 배를 떠받치고 있었어도 시원찮을 마당에 말이다.

"해경은 적극적인 구조를 하지 않았습니다. 구조를 못한 게 아니라, 안 했다는 소리가 나오는 이유이지요. 게다가 해경은 구조 초기에 해군의 투입도 막았다고 합니다. 또 도와주겠다는 미군의 도움도 거절했답니다. 그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오홍진)

다큐는 또 국정원과 세월호의 관계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진다. 세월호에서 발견된 선원의 노트북은 세월호가 국정원 소유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혹을 불러왔다. 또 세월호만 유일하게 해양사고 발생 시에 국정원에 보고하도록 돼 있었다. 실제로 청해진해운은 사고 직후 국정원에 보고했다.

"수사과정도 의문투성이죠. 해경은 놀랍게도 이준석 선장보다 단원고 교감을 먼저 조사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고 다음 날엔 선장을 해경아파트로 데려가 재우기까지 했고요. 그때 아파트에 누가 출입했는지 기록한 CCTV 영상도 일부 사라졌지요. 선원들 입을 맞출 수 있는 시간을 줬다고 추측되는 대목입니다." (오홍진)

마지막으로 우리는 세월호가 침몰하던 그때, 이 나라의 대통령이 무얼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장장 7시간 동안 어디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뭘 보고 있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대통령이 사건이 발생한 바로 그날, 어떤 추모행사에도 참여하지 않고 출국한단다. 박근혜 대통령은 무섭다. 아직도 배 안에, 저 푸른 바닷속에 자국민이 가라앉은 채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그 바다 위를 날아 남의 나라에 가겠단다. 박근혜 대통령은 과연 우리의 대통령이 맞는가?

그리고 이 모든 의문들에 엄마 임영애씨의 궁금이 하나 더해진다. 엄마는 준영이가, 아이들이 그날 아침밥이라도 든든히 먹고 갔는지 그걸 알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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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족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담은 노란 배 시민들이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적어넣었다. 힘내라는 응원과 잊지 않겠다는 다짐들이 적혔다. ⓒ 황윤희


그러니 미칠 것 같은 거다. 해명이 안 되니까 잊을 수 없는 거다. 잊긴 뭘 잊나? 뭘 알아야 잊고 말고 할 것이 아닌가? 유가족들이 가장 두려운 것은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잊히는 것이다.

"지금도 꿈에 준영이가 나타날까봐 두려워요. '엄마 그동안 뭐했어, 진실은 밝혀졌어?'라고 물어올까 봐요."(임영애)

유가족들은 진실을 가리고 선 권력의 저 거대한 벽이 얼마나 공고한지를 1년의 싸움을 통해 깨닫고 있다. 온 국민이 요구해 그나마 반쪽짜리로 세워진 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가 정부·여당에 발목 잡혀 식물위원회가 되게 생겼다.

"정부가 강행하려는 시행령을 보면 해경과 해수부, 국가안전처 공무원들이 특조위를 장악하게 됩니다. 도대체 누가 자기의 죄를 자기 손으로 밝히겠습니까? 시행령은 특조위를 무력화하고 자기들 맘대로 주무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오홍진씨)

또 대다수 주류 언론은 유가족의 목소리는 철저히 외면하고, 거기다 더해 그들의 뜻을 왜곡한다. 애가 끓어 죽을 것 같은 사람들에게 또 일부에선 '종북'이니, '세금도둑'이니, '시체장사'니 하며 사람으로서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퍼붓는다.

그런 말이 가능한 배경에는 이 나라의 정부가 있다. 정부가 돈을 내밀며 숫자놀이로 여론을 몰아가는 중이다. 한 사람당 얼마를 받을 수 있는지, 인양에 얼마의 비용이 드는지를 슬슬 흘리며 여론을 조작하려는 정부와 언론은 이 나라의 참담한 민낯, 바닥이다. 자식이 왜 죽었는지 알려달라고 눈물로 호소하는 부모에게 돈 받고 다시는 참사의 원인에 대해 질문하지 말 것을 서약하라는 건 조폭이나 하는 짓이 아닌가? 이 나라에 양심이란 게, 격이란 게 있는가?
 
하지만 유가족들은 포기가 안 된다. 이 모든 참담하고 어려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유가족들은 포기가 안 된다고 했다. 준영이 부모님은 죽을 때까지 진상규명을 위한 싸움을 할 거라고 했다. 맞벌이 부부였던 두 사람은 그날 이후 일체의 생계활동을 하지 못한다. 퇴직금과 옷가게 정리한 돈으로 그들은 버티고 있다.

"아이가 사라지면서 일상이란 게 사라졌어요. 돈은 벌어서 뭣해요? 돈 버는 이유였던 자식이 사라졌는데요. 우리는 이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복구가 안 돼요. 그러니 죽을 때까지 해야죠. 준영이 동생 생각도 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지 마세요. 진상규명을 위한 싸움이 바로 준영이 동생을 위한 거예요.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아이들을 위하는 길입니다. 정부고 뭐고 모두가 아이들을 버렸어요. 엄마마저 버릴 순 없잖아요?"

임영애씨가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제 소원이 뭔지 아세요? 진상규명 된 후 딱 하루만 더 사는 겁니다."

심장쯤에 세월호가 박혀 있다... 꺼내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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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오준영군의 부모님 세월호 참사로 사망한 고 오준영군의 부모님은 이날도 많이 울었다. 하지만 기자가 들이민 카메라 앞에서는 옅은 미소를 보였다. ⓒ 황윤희


진실에 다가가는 결정적인 한 걸음이 세월호 인양이다. 오홍진씨는 전문가들과 함께 열흘 동안 세월호가 가라앉아 있는 바다를 반경 2~3㎞까지 샅샅이 조사했다. 인양이 가능한지를 본 것이다. 그는 인양은 무조건 가능하다고 했다.

"세월호가 가라앉은 바닥은 평평하고 뻘이 거의 없는 암반입니다. 물이 차 있는 세월호는 1만 톤이 넘어갈 텐데 1년 동안 겨우 1미터 정도밖에 묻히지 않았습니다. 물론 정부가 보이지 않게 다이버들을 통해 세월호의 증거들을 많이 지웠으리라 짐작하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세월호를 인양하면 많은 것들이 밝혀질 수 있으리라 믿고 있습니다. 세월호가 인양될 수 있도록 국민들이 힘을 모아주십시오."

이제 봄이 오고 가을이 오면 학교에선 수학여행을 갈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수학여행은 어떠할 것인가? 아마 여행을 간 아이도, 아이를 보내놓은 부모도 여행기간 내내 마음을 졸일 것이다. 아무 일도 없겠지, 설마 또 그러겠어, 라는 막연한 추측 속에서 못내 안심하려 들 것이다.

그러면서 부모는 그런 자신의 논리가 이성적인지 끊임없이 돌이켜야 하리라. 아이들도 그럴 것이다. 비행기를 타거나 배를 타거나 바다를 보거나 강을 보거나 1년 전 죽임을 당한 친구들 생각에 시시때때로 우울할 것이다.

우리는 세월호를 저대로 두고 행복해질 수 없다. 그저 자기모멸감을 감추며 그 위에 술이나 부어대며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또 요행에 기대 나는 그런 일을 겪지 않겠지, 내 자식은 아니겠지, 라는 착각 속에 살아갈지도 모른다. 심장쯤에 세월호가 박혀 있다. 꺼내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다.  

마지막으로 준영이의 부모님께 이 사회의 무력함이 원망스럽지 않느냐고 여쭸다. 오홍진씨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600만 국민이 세월호 진상규명하라, 인양하라고 서명을 해줬습니다. 600만 명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의 아픔을 함께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임영애씨도 덧붙인다.

"예전엔 그저 슬프고 억울해서 많이 울었어요. 하지만 요즘은 다니면서 감사의 눈물도 많이 흘려요. 정말 많은 분들이 우리를 응원하고 도와주고 계십니다."

하지만 국민의 한 사람이며, 한 아이의 엄마인 나는 이 사회의 무력함이 원망스럽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연결되어 있다. 그물망으로 촘촘히 연결된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수십 척의 세월호를 맞닥뜨려야 할 것이다. 그런 세상은 지옥이다.
 
오는 4월 16일, 전 국민이 침묵의 애도로 1주기를 맞으면 좋겠다. 세월호가 완전히 전복된 10시 31분부터 선수만 남기고 가라앉은 11시 18분까지 전국에 사이렌이라도 울리며 묵념하기를 희망한다.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47분의 추모, 곡소리도 들리지 않고, 차 소리도 들리지 않는, 기차도 멈추고, 비행기도 뜨지 않는, 모든 것들이 멈춰진, 오직 위급을 알리는 사이렌만 맹렬히 울리는 정적의 시간을 통해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지금 얼마나 분노하고 있는지, 이 나라가 얼마나 급박한 위기상황인지 세상에 알렸으면 좋겠다.

그 정도는 해야 나라의 격이란 게 서지 않겠는가? 남의 나라 사람이 세월호 추모의 숲을 조성하겠다고 나서는데, 우리는 다만 그거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프다. 아파서 더 이상 못 쓰겠다. 준영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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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동 화백이 그린 준영이 준영이가 부모의 품으로 돌아온 것은 자신의 생일인 4월 23일, 참사 후 8일이 지난 뒤였다. 많이 부패된 모습이었다고 한다. 임영애 씨는 아이의 탯줄을 끊은 날, 아이의 시신을 받았다. ⓒ 황윤희


○ 편집|최규화 기자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안성신문에 15일자로 실릴 예정입니다.
#세월호 #인양 #참사 #유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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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강사, 전 안성신문 기자, 전 이규민 국회의원 보좌관, 현)안성시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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