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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들여다보던 사장...'모던타임즈'는 계속 된다

[김성호의 씨네만세 45] 기계화·자본주의 풍자한 찰리 채플린 대표작 재개봉

15.03.18 10:17최종업데이트15.03.18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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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던 타임즈 메인 포스터 ⓒ 모던 타임즈


미래학자 다니엘 핑크의 저서 <새로운 미래가 온다>에는 인간과 기계의 대결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등장한다. 실화인지 확인할 길 없으나 당대 영국인들에게 전설처럼 회자되었다는 존 헨리(John Henry)와 굴착기의 대결이 그것이다.

이야기는 한 사업가가 공사장으로 증기 굴착기를 가져와 자신이 가져온 기계가 어떤 인간보다도 땅을 잘 판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된다. 당연하게도 오랫동안 육체의 힘으로 땅을 파왔던 노동자들은 이 말에 반발했다. 그들은 자신들 가운데 가장 숙련된 노동자 존 헨리를 대표로 내세워 인간이 기계를 능가한다는 걸 증명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렇게 인간과 기계의 역사적인 대결이 펼쳐졌다.

존 헨리와 굴착기는 하나의 산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굴을 파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한참, 마침내 존 헨리가 반대쪽 산을 뚫고 먼저 밖으로 나왔다. 인간이 승리한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뿐, 기력을 모두 소진한 그는 그 자리에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존 헨리의 죽음은 상징적이다. 근대 과학기술의 빛나는 성과는 기계가 산업현장으로 들어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걸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럽게 산업현장의 기계화와 분업화를 불러왔다. 덕분에 산업생산량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향상되고 자본가의 부는 끝없이 축적되어 갔다. 하지만 이로부터 모두가 행복해진 건 아니다.

무엇이 인간을 괴롭게 하는가

▲ 모던 타임즈 공장에서 단순반복작업을 하는 찰리 ⓒ 모던 타임즈


19세기 초 영국의 노동자들은 만성적인 실업과 생활고에 시달렸다. 일자리가 부족하다보니 열악한 근무조건과 저임금을 감수해야 했고 쉴 틈 없이 일해도 늘 가난했다. 빈부격차와 절대빈곤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는 실업과 빈곤이 기계의 탓이라고 믿었다. 여럿이 모여야 할 수 있었던 일을 기계가 가볍게 해내니 노동의 가치가 갈수록 떨어지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기계에 대한 노동자들의 반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분노한 노동자들이 산업현장에 침입해 닥치는 대로 기계를 파괴하는 러다이트 운동을 벌인 것도 이 무렵이었다.

산업화는 서구사회 전반에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변화는 놀라운 것이었다. 산업 전반에 걸쳐 기계화와 분업화가 이루어졌고 기술적인 혁신도 잇따랐다.

그러나 그 혁신은 오직 생산량에 한정된 것이었다. 십 수 년 전 영국이 먼저 경험한 바 있는 빈곤과 실업문제가 미국에서도 되풀이되었다. 빈부격차는 그보다 심각한 수준이었다. 일부 기업이 여러 산업분야를 장악하고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는 재벌화 현상도 두드러졌다. 각계각층에서 이러한 상황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온 것도 당연한 일이다.

오는 3월 19일 국내에서 재개봉하는 <모던 타임즈>(1936)도 그런 목소리 가운데 하나였다. 떠돌이 찰리(Little Tramp) 캐릭터가 주연으로 등장하는 마지막 작품으로도 유명한 이 영화에서 채플린은 분업화와 기계화, 제약없는 자본주의 속에서 인간성을 잃어가는 미국의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풍자했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인간을 기계의 부품처럼 파편화시키는 당대의 산업을 정면에서 비판하며 점차 설 자리를 잃고 소외되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온정어린 시선으로 그려낸다.

영화의 주인공은 떠돌이 찰리다. 공장에서 나사를 조이는 일을 하던 찰리는 지나친 반복노동으로 이상증세를 보이고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치료가 끝나고 퇴원하는 길에 찰리는 파업을 주도했다는 오인을 받아 교도소에 수감된다.

우여곡절 끝에 형기를 마치고 출소한 그는 우연한 계기로 한 여자를 알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갈 곳을 잃은 그녀는 배가 고파 빵을 훔쳤다가 경찰에게 쫓기지만 찰리의 도움으로 도망치게 된다. 둘은 가난과 배고픔 속에서도 안락한 보금자리를 꿈꾸며 새로이 일을 시작하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형사에 의해 쫓기듯 길을 떠난다.

채플린의 비판이 여전히 유효한 2015 대한민국

▲ 모던 타임즈 몰래 휴식을 취하던 찰리를 발견하고 스크린을 통해 호통치는 사장 ⓒ 모던 타임즈


채플린이 이 이야기를 통해 당대의 시대상을 비판하려 한 건 분명하다. 그는 <모던 타임즈>가 개봉하기 5년 전인 1931년에 '실업은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이며 '기계는 인류에게 도움을 주어야 하지 비극을 불러오고 일자리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는데 이와 같은 생각이 그대로 영화의 주제까지 이어진 듯하다. 실제로 그는 영화에서 여러가지 에피소드와 설정, 소품 등을 통해 당대의 시대상을 적극 반영하고 풍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우선 주인공 찰리가 나사를 조이는 노동을 반복하다 이상행동을 보이는 초반부는 채플린이 자동차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같은 작업을 반복해온 노동자들이 신경쇠약 증세를 나타냈다는 기사를 읽고 구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의 노동문제를 영화에 적극 반영한 결과가 역사적인 초반부로 남은 것이다.

뿐만 아니다. 영화 속에선 노동자들이 파업하고 행진하며 권리를 요구하는 장면도 여러차례 등장한다. 이 장면들은 채플린이 노동문제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봤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영화 속 시위장면은 평화적이며 합리적이다. 그들이 들고 있는 피켓에는 자유와 권리 같은 것들이 적혀있으며 그들로부터 폭력적인 행동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경찰들이 노동자들의 평화행진을 폭력으로 진압하며, 몇 차례 등장해 의미심장하게 보이는 신문 헤드라인은 이같은 시위를 폭도에 의한 폭동(STRIKES AND PIOTS! BREADLY BROKEN BY UNRULY MOB)으로 규정짓고 있기까지 하다.

▲ 모던 타임즈 장관 부인과 찰리. 같은 벤치에 앉아 같은 커피를 들고 있지만 거리감이 느껴진다. ⓒ 모던 타임즈


영화는 공상과학 장르의 형식을 차용해 기계화의 부정적 미래상을 멋드러지게 그려내기도 한다. 찰리가 일하는 회사의 사장은 커다란 모니터를 통해 화장실까지 속속들이 들여다보며 직원들을 감시하는데, 마치 조지 오웰의 유명한 소설 <1984>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비록 많은 분량이 할애되진 않았으나 <모던 타임즈>가 <1984>보다 13년이나 앞서 만들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놀라운 통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얼마 전 <경향신문>에 의해 폭로된 삼성의 직원 미행 의혹이나 지난해 있었던 롯데 자이언츠의 cctv를 동원한 선수단 감시 등은 <모던 타임즈>의 경고가 80년 가까이 흐른 오늘까지도 여전히 유효함을 입증하고 있다. 이밖에도 영화는 식사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발명된 급식기계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통해 지나친 기계화가 오히려 비효율적일 수 있음을 풍자적으로 그려내기도 한다.

가난 속에서 거리를 헤매는 고아소녀와 팍팍한 현실 속에 범죄로 내몰리는 인물들,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호화로운 백화점의 모습도 적잖이 인상적이다. 백화점과 거리로 상징되는 두 세계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물과 기름처럼 한 차례도 섞이지 않고 시종일관 명확히 구분된다. 장관 부인이 교도소에 들렀다 찰리와 벤치에 나란히 앉았을 때조차, 둘이 같은 커피를 마시고 같은 생리현상을 드러낼 때조차, 이들에겐 한 마디 대화도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당대의 빈부격차가 사회적 계층으로 고착화되고 있음을 풍자적으로 내보이는 장면이다.

부조리한 세상 헤쳐나갈 수 있다는 믿음, 채플린답다

▲ 모던 타임즈 영화의 엔딩씬 ⓒ 모던 타임즈


영화의 결말은 채플린의 다른 작품들과 비슷하다. 모든 것을 잃고 지쳐버린 소녀는 길 가에 주저앉아 말한다. "살려고 노력한들 무슨 소용이죠?"

그러자 빛나는 눈을 가진 떠돌이 찰리가 답한다. "기운을 내요. 포기해선 안돼. 우린 잘 해나갈 수 있어!"

그리고 그들은 웃으며 걸어간다. 서로의 손을 꽉 잡고. 뒤이어 떠오르는 자막. The End.

떠돌이 찰리의 영화는 항상 이렇다. 혼자서도 눈물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를 껴안고 서로에게 기대서 따뜻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항상 그 따스한 사람들을 비추며 보는 이로 하여금 더 나은 모습을 그리게끔 한다. 실업자 신세의 남자와 경찰에 쫓기는 소녀가 함께 웃으며 떠나는 이 영화의 결말은 그래서 더욱 채플린답다.

<모던 타임즈>는 채플린이 떠돌이 찰리로 출연한 마지막 영화다. 무성영화 시대의 끝에서 유성영화의 가능성을 보였다는 점에서 나름의 가치가 있다.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과 번뜩이는 감각으로 당대의 부조리를 풍자한 솜씨 역시 돋보인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연대를 통해 부조리한 세상을 헤쳐갈 수 있다는 채플린의 믿음이 아로새겨진 따스한 작품이다.

그의 비판이 여전히 유효한 한국의 현실에서 <모던 타임즈>의 재개봉은 적잖은 의미를 갖는다. 오는 3월 19일부터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모던 타임즈 찰리 채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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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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