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남자-남한 여자의 사랑 이야기, 흥미롭다

[서평] 6·25 전쟁을 관통하는 순애보, 소설 '약속'

등록 2015.03.09 12:25수정 2015.03.09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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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에 학생운동을 하다가 잠시 감옥에 간 적이 있었다. 내가 간 곳은 '대용감방'이라고 불리던, 구치소가 없는 지역에서 경찰서 유치장을 감옥 대신 쓰는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곳의 수용자 관리 규칙은 제 멋대로였다. 수형자들의 처우 기준을 정한 행형법 대신 대용감방을 관리하는 경찰관의 말 한마디가 그냥 법이었다.

그런 조건 하에서 나는 더 미움을 받았다. 그 지역에서 발생한 공안 사건의 첫 구속자였던 나는 그들의 눈엔 '빨갱이'였던 것이다. 그런 핍박은 그런대로 참겠는데 가장 힘들었던 것은 정보의 차단이었다. 특히 바깥세상의 정보를 알려줄 신문이나 시사 주간지를 일절 반입할 수 없도록 금지했다. 그것도 나만. 이에 항의하니 돌아온 답이 가관이었다. "사상범에게 신문은 교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전 국민이 다 보는 신문을 가지고 그게 말이 되냐"라며 따지니 반입 허용할 수 있는 신문은 <조선일보>뿐이라고 했다. <동아일보>도 안 된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동아일보>가 지금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어처구니없어 "차라리 안 보고 말겠다"라고 했다. 신문값은 내가 내는 것인데 아무리 그래도 <조선일보>를 사 볼 생각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그곳에 있던 몇 개월 동안 내가 본 책은 전부 소설책이었다. 신문 반입은 안 되지만 소설책은 문제 없다며 그들이 낸 생색이었다.

그래서 돌이켜 보면, 그 덕분에 나는 대한민국에서 꼭 읽어야 할 소설은 그때 다 본 것 같다. 수백 권은 족히 읽은 듯하다. 태어나서도 처음이고, 또 이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도 그렇게 많은 소설책을 읽어본 것은 그때가 유일하다. 석방 후 재야단체에서 인권운동가로 일해오며, 또 여러 국가기관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소설책을 읽을 여유나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참 오랜만에 나는, 소설책 읽는 재미에 푹 빠지게 됐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기며 잊었던 그 오래전 기억을 다시 떠올린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 2월 출간된 이 책의 제목은 <약속>(눈빛 펴냄). 푸른색 표지가 인상적인데 저자의 이름은 더 인상적이다. 박도, 외자 이름을 쓰는 독특한 이력의 '독특한' 작가다.

북남남녀의 사랑과 분단 이야기, 소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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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약속' 표지 ⓒ 고상만

2015년 설을 며칠 앞둔 2월 어느 날 주말 아침, 강원도 원주에 거주하시는 저자 박도 선생에게 한 통의 전화가 왔다. 평생을 국어 선생님으로 살아오신 분 그리고 <오마이뉴스> 독자라면 낯익은 시민기자로 여러 권의 책을 내신 분이기도 하다. 1945년생이시니 만 나이로 꽉 찬 칠순의 어르신이시다. "무슨 일로 전화를 주셨냐"라고 여쭈니 "이번에 소설책을 하나 출판하여 보내주고 싶다"라는 말씀이셨다.


사실 놀랐다. 그동안 여러 권의 의미 있는 책을 내신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다른 장르도 아닌 소설을 책으로 내셨다니 새삼 놀라웠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2013년 6월 25일부터 그해 12월 16일까지, <오마이뉴스>를 통해 무려 99회나 <어떤 약속>이란 제목으로 소설을 연재하셨던 기억이 떠올랐다. 저자 박도 선생은 그때 쓴 초고 2000매의 원고 중 다듬고 덜어내며 절반 이상을 다시 써 책으로 내셨다며 작가 특유의 들뜬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 도착한 책은 통상의 책보다 약간 작은 사이즈가 앙증맞기까지 했다. 그리고 읽기 시작한 책 <약속>. 고백하자면 첫 장을 펼치며 이 두터운 책을 언제 다 읽을까 내심 걱정도 됐다. 일주일에 한 번씩 진행하는 고정 방송과 이를 위해 따로 준비해야 하는 방송 원고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고, 그 외 청탁받아 써야 할 여러 원고와 또 이러저러한 강연 준비로 시간 여유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정말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누구 말처럼 '참 맛있게' 한 장 한 장 먹어가며 야금야금 책을 읽었다. 어느 때는 무서운 집중력으로 이야기를 탐닉했고, 또 어떨 때는 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 담을 뛰어넘듯 책갈피를 넘겨 갔다. 이렇게 내가 소설책을 재미있게 읽었던 것은 정말 그때, 24년 전 감옥에서 읽었던 그때 말고는 없었던 것 같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이토록 흥미롭게 했을까.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은 1950년 6월 25일로 시작된다. 우리 민족 최대 비극인 6·25 전쟁(한국전쟁)과 이 과정에서 주인공인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흥미롭게 전개된다. 주인공 면면도 흥미롭다. '남남북녀'라는 말이 있다. 어학 사전에서 보면 '예로부터 남쪽 지방은 남자가 잘나고, 북쪽 지방은 여자가 아름답다'는 뜻으로 일러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의 남녀 주인공 설정은 정반대였다.

서울 출신의 간호학교 여학생이었던 열여덟 살 최순희와 그보다 두 살 아래인 평안북도 출신 김준기가 각기 인민군으로 참전해 전쟁터에서 만난 것이다. 그리고 포연이 자욱한 전쟁터에서 이들 두 어린 남녀는 그 나이다운 호기심과 관심 그리고 치기 어린 말로 서로에게 끌린다. 그러면서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이들은 생과 사를 넘어서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 어떤 이념보다 그 어떤 총구보다 더 강한 사랑과 연민이었다. '남남북녀'가 아닌 '북남남녀'의 사랑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전쟁을 다큐처럼 승화한 저자의 또 다른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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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약속>의 저자 박도 시민기자 ⓒ 박도

이 책 <약속>의 큰 줄거리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지만 그 못지 않게 흥미로운 점은 6·25 전쟁의 속살을 켜켜이 보여주는 소설 전개 방식이었다. 사실 나 역시 이 책을 보기 전 6·25 전쟁에 대해서는 나름 상당한 지식과 정보를 알고 있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던 6·25 전쟁에 대한 지식은 이 소설을 읽으며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인 6·25 전쟁에 대해 저자는 한 편의 '잘 만든'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는 것처럼 독자들을 흡입하고 있다. 자칫 지루해 질 수 있는, 또는 고루하게 읽혀질 수 있는 시대 배경을 저자는 저자 특유의 기법으로 이를 매우 흥미롭게 유도했다. 이러한 능력은 단언컨대, 이 책의 저자 박도 선생이기에 가능하다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이유가 있다.

저자 박도 선생은 흔치 않은 이력의 소유자다. 33년간 국어 선생님으로 봉직한 것보다 더 유명한 그의 전문성은 '한국 근현대사 전문가'라는 점이다. 저자는 2004년부터 세 차례나 미국의 국립문서기록보관청(NARA)을 방문해 그곳에 보관 중인 한국 현대사 관련 자료를 수집한 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특히 한국전쟁 당시 외국 기자와 군인들이 촬영한 사진 자료를 수집하여 이를 귀중한 책으로 발간하기도 했다. 6·25 전쟁을 직접 경험했던 저자가 자료와 현장 답사를 통해 책을 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이 책 <약속>의 말미에 쓴 '향연'이라는 '작가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저자가 이 글을 쓰기로 처음 작정한 때는 놀랍게도 지금으로부터 무려 60여 년 전 이라고 한다. 1950년대 말, 어느 깊은 겨울 밤에 저자는 자신의 친척 고종 형에게 이 책의 모티프가 되는 실화를 전해 들었다고 한다. 이 책 남자 주인공인 김준기의 모티프가 된 인생 역정을 들으면서 저자는 이 아름답고 슬픈 소설을 반드시, 언젠가는 꼭 쓰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 약속을 60여 년 만에 지켰다. 소설 속 남녀 주인공들이 전쟁의 공포와 혼란 속에서 "만약 우리가 헤어지게 된다면 매년 8월 15일 낮 12시 서울 덕수궁 정문 대한문 앞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이를 지킨 것처럼, 작가 역시 스스로에게 했던 그 약속을 60년 만에 지킨 것이다. 그렇기에 소설 속 주인공들이 만나고 헤어지며 다시 재회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칠순의 노 작가가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그 약속을 지켰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 아름다운 '약속'이 지금 독자 앞에 펼쳐진다.

그래서 원로 평론가 염무웅 선생 역시 이 책 <약속>에 대해 격찬했다. 그는 "이념적 편향에 사로잡히지 않는 공정한 시선을 통해 전쟁의 실상에 더 가까이 접근하고자 시도했다"라면서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 한복판에서도 사랑하는 두 남녀를 주제로 한 이 책에 대해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 증언한 것이야 말로 이 작품의 진정한 미덕이다"라고 추천사에 썼다.

이 책을 덮으며 나는 전쟁을 생각했다. 다시는 반복돼선 안될 일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지난 1950년 6·25 전쟁은 '잊혀진 전쟁'이 돼선 안 된다. 전쟁의 참혹함, 고통과 현실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난 순애보를 말하는 이 책이 고마운 이유다. 이를 기억해야 평화의 소중함도 깨닫지 않겠는가. 소설 <약속>은 그래서 참 귀한 책이다. 함께 읽자.
덧붙이는 글 <약속> (박도 지음 / 눈빛 펴냄 / 2015. 2. / 12,000원)

약속

박도 지음,
눈빛, 2015


#박도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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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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