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인데 왜 '개콘' 안 나가냐면..."

[인터뷰] '소통테이너' 오종철

등록 2014.09.27 15:21수정 2014.09.27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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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소통 열풍'이다. 소통의 시대에 이름도 생소한 '소통테이너' 오종철(43) 에이트스프링스 대표를 만났다. 그는 수많은 공연을 기획하는 공연 기획자이자, 소통에 대해 강연하는 강사, 멘토, MC다.

오 대표는 이 모든 수식어보다 자신을 더 잘 표현하는 말은 '온리 원(Only one)'이라고 말한다. 지난 22일, SBS 공채 개그맨이기도 했던 그가 말하는 소통에 대해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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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테이너 오종철 ⓒ 진형준


- 많이 바쁘실 텐데, 인터뷰에 흔쾌히 응해주셔서 놀랐어요.
"저는 '재미'를 가장 우선시해요. 제 개그의 신념이죠. 개그맨 시절에는 "야, 이거 얼마 준대? 이거 하면 인기 얻을 수 있을까?"와 같은 것들이 판단 기준이었죠. 그런데 이제 인생이 단순해졌어요. 그러니까 판단의 기준이 두 개로 나뉜 거죠. 이번에도 "서울과학기술대 신문사에서 인터뷰 온다는데 이거 재미있을 것 같아? 그럼 해"라고 말했어요. 신문을 읽는 그 몇 명이라도 재밌게 해줄 수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하는 거죠.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취재 오는 사람들만이라도 재미있게 해주면 되죠."

- SBS 공채 5기 개그맨이시던데, 어떻게 개그맨이 되신 거예요?
"어릴 때부터 타고난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 같아요. 집에서는 조용한 아이였는데, 학교에 가면 늘 진행을 도맡아 했어요. 기획할 때 아이디어도 늘 넘쳤고요. 집에서는 부모님이 엄했고 나이 차가 많은 형도 무서웠어요. 그런데 그렇게 무서운 사람들도 TV에 나오는 개그맨을 보고 웃는 게 신기했어요. 마냥 '재밌는 사람이 돼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어릴 때 사진 보면 마이크 잡는 사진이나 사람들을 웃기고 있는 사진이 많죠.

대학에 진학할 때, 저는 연극영화과에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집안 반대가 심했죠. '네가 무슨 연예인이냐'라고요. 집에서의 모습과 밖에서의 모습이 일치하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었죠. 부모님의 의견대로 토목공학과에 진학했어요. 그런데 크게 다르지 않았죠. 어느새 전 또 마이크를 잡고 있더라고요. 군대에서도 마찬가지였고요. 제대하고 1년간은 정말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아요. 1, 2학년 때 너무 놀아서 학사경고를 받았었거든요.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돌아와서 식사하는데 TV에서 <LA 아리랑>이라는 시트콤을 하고 있었어요. 그 밑으로 'SBS 5기 공채 개그맨을 모집한다'는 광고 문구가 보이더라고요. 분명 다른 때에도 그 광고는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날은 그게 눈에 띄더라고요. 1년 전에 전역신고를 할 때 대대장이 '오종철이는 전역하면 개그맨 시험을 볼 건가?' 물었던 기억이 나더라고요. 흘려들었던 말인데 그 말이 자막과 함께 의미 있게 다가오더라고요."

- 개그맨 시험은 어렵지 않았나요?
"어렵진 않았지만, 긴장을 많이 했어요. 원서를 받으러 가는 길에 얼마나 떨었는지 모르겠어요. 저도 나름 개그 좀 한다는 사람인데 전국에 있는 웃긴 애들을 다 모아놨더라니까요. 제 동기만 해도 유명한 개그맨이 꽤 있거든요. 김준호, 심현섭, 강성범도 다 동기고 정종철, 박준형도 같이 시험을 봤으니까요. '저런 사람들이 개그를 하는구나!' 싶어서 그냥 갈까 하다가 홧김에 응시했죠.


저는 토크에 자신이 있었어요. 시사풍자 개그를 했죠. 그때만 해도 연기나 성대모사 같은 건 많았지만, 토크로 개그를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경쟁력이 있었죠. 심사기준은 '재능, 무대매너, 발전 가능성'이었어요. 재능이나 무대매너는 자신 없었지만, 발전 가능성 하나에 대해서는 스스로 무한한 믿음이 있었죠.

시험을 보러 갔는데 강성범, 지상렬과 같은 조였어요. 너무 웃겨서 계속 웃었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을 보니까 경쟁의식이 있어서 잘 웃지 않더라고요. 후에 들은 건데, 잘 웃은 게 높은 점수를 받은 이유 중 하나더라고요. 남들보다 뛰어나야 하지만, 남들과 다른 또 하나의 무기가 있어야죠."

- 그렇게 시작된 개그맨 생활은 어땠나요.
"특출난 건 없었어요. 개그맨들을 살펴보면 다른 사람들을 받쳐주는 사람이 있고, 본인이 웃기는 사람이 있잖아요. 저는 받쳐주는 역할이었어요. 게다가 개그맨이 되고 막 신인일 때 IMF가 터졌어요. '온 국민이 힘들어한다'는 이유로 방송사에서 개그 프로그램을 전부 없앴어요. 개그맨실이 해체됐죠. 많은 능력 있는 개그맨들이 타 방송사로 옮겨야만 했죠. 주로 교양프로그램을 진행하거나 리포터로 활동했죠. 진행이 편해서 MC를 많이 봤었어요."

- 여러 행사에서 사회를 많이 보시던데, 비결 있으세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게 중요해요. 그 사람이 본인의 얘기를 100% 다 할 수 있도록 이끌어내기만 하면 되잖아요. 잘 들어주고, 잘 웃어주고. 세상에 저보다 잘난 사람들이 많아요. 저보다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고요. 구태여 제가 빛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을 빛나게 하면 사회자 본연의 역할을 다 하는 거죠."

15년 무명개그맨, '소통테이너' 되다

- 개그맨에서 공연기획자로 변신하셨어요. 어떤 일이 있으셨어요?
"평소에 공연기획에 대한 꿈만 가지고 있었어요. 열심히 준비했던 건 아니지만요. 공연 기획 쪽으로 방향을 돌리기에는, 라디오 진행에서 나오는 안정적인 월급이 정말 좋았어요. 그러다 하차 통보를 받았어요. 딱 일주일 남기고요. 최소한 한 달 전에는 통보해주는 것이 일반적인데 말이에요. 잘하고 재밌어하는 일이라 일방적인 하차 통보는 상상도 못했어요. 갑자기 절박해졌죠. 머릿속으로 그려왔던 것을 당장 해야만 했어요. 없던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그때 모 기업에서 제안서를 받아서 무료 공연을 하는 무대가 있었죠. 무작정 찾아갔는데 제안서를 쓰라고 했어요. PPT를 해본 적도 없고 막상 문서로 만들려니 어려웠어요. 제안서를 내고 넉 달간 거의 매일 찾아갔어요. 그랬더니 결국 2회 한정해서 공연할 수 있게 해 주더군요. 기회를 얻고 나니 누구를 섭외해서 어떤 공연을 해야 할지 고민이 많이 되더라고요.

우연히 모임에 나갔는데,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저자 김난도 교수님이 있었어요. 일전에 같이 방송할 때 무척 좋은 기억이 있으셨나 봐요. 출연을 부탁했더니 흔쾌히 응하셨어요. 평소 50명도 못 채우던 객석에 400명 넘는 사람이 몰렸어요. 그야말로 '대성공'이었죠. 관객들 반응이 좋았어요. 공연을 주최하는 기업에서 '고정으로 맡아달라'고 하더라고요. '오종철의 드림스테이지'라는 이름으로 그 자리에서 2년 8개월간을 진행했어요. 제 인생 2막이 열리는 순간이었죠."

- 절박할 때 기적이 일어난 셈이네요.
"그렇죠. 정말 절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어요. 극단적인 선택을 할 뻔한 적도 있었죠. 하지만 순간순간 '이것만 지나면 좋은 날이 오겠지' 싶었어요. '나에게도 좋은 기회가 올 거야'라고 생각하면서요.

이런 일도 있었어요.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어떤 퀴즈를 냈는데, 특정 단체에서 그걸 근거로 소송을 제기했어요. 작가와 저를 피고로 해서요. 제가 제 사람들을 지킬 수 없다는 무기력감에 빠지게 되더라고요."

- 많이 힘드셨겠어요.
"일과 소통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그때 얻었어요. 세상에 재미를 더하고 웃을 일을 만들자. 그 나만의 신념을 찾는 순간 '소통 엔터테이너'가 된 거예요. 일과 소통했다는 의미로 '소통테이너' 다섯 글자를 만들었는데 뜻밖에도 사람들이 무척 좋아했어요. 단번에 특허를 등록했죠."

- 소통테이너라는 단어의 뜻이 '일과 소통한다'는 뜻이군요?
"네. 맞아요. 남들과의 소통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내 일과 소통하는 사람이 진짜 매력적이잖아요. 그게 우선이죠. 제가 일과 소통하고 나니까 누군가에게는 소통하고 싶은 사람이 된 거죠. 저는 사람들에게 그런 소통을 얘기해주고 싶어요. 그래서 당신이 하는 일, 그 역할과 소통하면 사람들이 제각기 더 매력적인 사람으로 거듭나지 않을까 싶어요."

- 일반적으로 소통이라 하면 타인과의 소통을 많이 얘기하는데 오종철씨의 소통은 의미가 약간 다르네요.
"사람들은 흔히 타인과 소통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죠. 자기 자신도 모르면서, 내 안에 내가 없는데 어떻게 타인과 소통할 수 있겠어요. 그걸 알게 되면 사람들과 자연스레 소통하게 되죠. 보통 '그 일을 왜 하고 계시냐'고 물으면 그냥 먹고 살기 위해 한다고 대답하죠. 그런 사람이 만드는 물건이 얼마나 좋을 것이며, 함께 일하는 누군가는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요? 그런 신념을 되게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게 소통이죠."

- 보통 사람들이 자신과 맞지 않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일과 소통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전 부모님의 말씀대로 성적에 맞춰 토목공학과에 진학했어요. 그런데 개그맨이 되고 보니 토목공학과 사람들이 한 명도 없더라고요. 연극영화과는 신인인데도 서로서로 아는 거죠. 좀 서운했어요. 제가 못 뜨는 게 저런 학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성공한 개그맨이 모두 연극영화과 출신은 아니잖아요? 실패의 원인은 제게 있었던 거죠. '모든 것이 내 탓이구나'를 받아들이는 순간 남다른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우리는 부모님이 바라는 인생을 살면서 뭔가 잘못되면 나중에는 부모 탓, 남 탓하곤 하죠. 이걸 39살이 돼서야 깨달았어요. 라디오 진행에서 잘린 이후 4년간, 제 인생은 정말 완전히 다른 삶이 됐어요. 15년을 무명 개그맨으로 살면서 남 탓을 했던 시간보다, 온전히 제 책임으로 살았던 4년이 무엇보다도 더 소중했죠."

오종철이 말하는 '온리 원'

- 오종철씨가 강연에서 말씀하시는 '온리 원(Only one)'이 뭐죠?
"'Only one'이란, 이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해요.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잖아요. 우리는 누구에게도 이해될 수 없어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이해를 바랄까요.

우리는 그 다양성을 무시하는 사회에 살아요. 우리는 일생이 확고하게 정해져 있죠. 20대에는 취업을 하고 30대에는 결혼을 하고 40대에는 양육을 해야 해요. 그렇게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고요.

그런데 사람마다 타고난 것이 있잖아요. 제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소통테이너가 된 것처럼요. 사람들은 개그맨이라는 직업에 익숙해져 있지만, 오종철의 개그는 소통테이너인 오종철이 펼치는 개그로 희소성이 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 의사들이 많은데 의사라는 직업에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잖아요. 몸을 치료해주는 게 아니라 마음을 치료해준다. 그러면 마음닥터가 되는 거고, 마음닥터는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는 거죠. 그게 'Only one'이죠.

이제는, 세상이 자신과 싸울 수 있는 사람을 원해요. 제가 '어떻게 연예인이 넉 달 동안 같은 곳에 나가서 부탁해?'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겠죠. 자신과 싸워서 이겼으니 지금의 제가 있는 거죠. 나의 직업, 나의 한계를 뛰어넘는 순간 새로운 가능성을 만나게 되는 거죠."

- 'Only one'이 되기 위해 개개인이 희소가치를 발견하고 높이는 방법이 있다면?
"여러 가지가 있겠죠. 제 직업이 개그맨이잖아요. '개콘'에 안 나오느냐, 코미디 안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그런 것들이 한계고 세상이 정해놓은 틀이라는 것이죠. 그걸 깨는 순간 희소가치라는 것이 생기고, 그다음에 열심히 하면 희소가치는 자연스레 높아지게 되겠죠."

- 기부 공연도 열심히 하시던데, 어떻게 시작하신 거예요?
"개그를 무대에서만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기업 교육을 가도, 딱딱하게 자기계발방법만 강의할 게 아니라 재밌게 할 수 있잖아요. 문득 나눔도 재밌게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그래서 '모발나눔콘서트(아래 모나콘)'을 만들었어요. 입장료 만 원이 아깝지 않은 공연무대를 만들 테니 즐겁게 놀다 가시라는 거죠.

'모나콘'은 그렇게 탄생했어요. 놀았는데 가발은 저절로 만들어졌고 나눔을 받는 사람의 사연을 대중에게 공개할 필요도 없죠. 지금까지 120개, 1억2천만 원 상당의 가발을 기부했어요. 우리는 1억2천만 원이 모여야 애들 가발을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잖아요. 개그맨이라는 일의 영역을 재정의하는 순간 세상에 없던 가발 120개를 세상에 나눌 수 있게 됐어요."

- 일의 영역을 재정의한다는 말이 인상 깊어요.
"역할을 늘려가는 사람들이 끝내 이기는 게 아닐까요? 개그맨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었다면, 무대연출 기획자의 역할을 만나지 않았다면 '모나콘'은 만들어질 수 없었겠죠. 만약 대학생인데 자기가 글쓰기에 자신이 있다면, 고등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면서 글쓰기 선생이 될 수 있죠. 기존에 가지고 있던 역할에서 탈피해 계속 역할을 늘려나갈 수 있잖아요. 그러면 아까 얘기했듯이 내가 과연 어떤 역할로 살 수 있는지를, 직업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그 직업 안에서 찾는 거죠.

얼마 전에 간호사를 컨설팅해줬어요. 그녀는 일주일 중 6일을 병원에서 근무하고 하루를 글을 쓰면서 보낸다고 하더라고요. 그분은 병원에 있는 6일을 너무너무 싫어해요. 책 읽고 글 쓰는 게 좋아서 500만 원을 주고 배운대요. 그 간호사가 보는 환자는 얼마나 불행하겠어요? 답답하다고 생각하는 병원에서 만난 환자가 어떻게 그분을 좋게 보겠어요? 당장 책 읽는 것이 좋으면 당신이 하는 일에 적용하라고 조언했어요.

간호사 역할만 할 필요가 없잖아요. 약봉지를 나눠줄 때 인상 깊었던 구절을 약봉지 위에 써서 환자에게 주면 어떨까 싶었어요. 그 말 한 마디가 그 사람을 살릴 수도 있잖아요. 퇴근하고 나서 한 시간 반만 투자해 환자들과 독서클럽을 만들어보는 것도 좋죠. 독서토론도 하고, 책도 돌려 읽고요. 당신이 추천한 책의 어떤 점이 좋고 왜 읽어야 하는지를 설명해주면 좋잖아요. 그러면 그녀는 인문학을 하는 간호사가 되죠. 또, '인문 간호사'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면서 'Only one'이죠."

- 아 이제 'Only one'이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아요.
"우리는 태어날 때 'Only one'으로 태어나요. 그런데 사회제도 때문에 순위가 생기고, 치열한 경쟁을 하죠. 상위권에 들면 인재 소리를 듣다가 순위가 떨어지면 무시당하곤 해요. 그런데 죽을 때는 어떻게 되나요? 삶이라는 것이, 쌓아온 순위를 언젠가 다 잃어버리게 돼 있어요. 슈퍼스타나 국민 MC도 언젠가는 다 없어지는 거죠. 그럼 남는 건 뭘까 생각해봐야죠. 결국, 기존에 가지고 있던 나만의 특별함, 'Only one'이 남는 거예요."

- 마지막으로, 대학생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그냥 정답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질문을 많이 바꿔봐야 하는 것 같아요. 주어진 질문을 자기에게 맞게 능동적으로 바꾸라는 말이죠. 무슨 일이든 옳고 그름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니까 일단 실행해 봤으면 좋겠어요. 어떤 의미 있다고 생각되는 일이 생기면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마음 내키는 대로 움직여보고. 설령 그걸로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실패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신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소통테이너 #소통 #개그맨 #오종철 #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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