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아름다운 11자을 본 적이 있는가?

빼빼로데이엔 '책빼로'

등록 2012.11.08 21:23수정 2012.11.09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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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1일이다. 넘쳐나는 '데이'들 가운데 남녀노소를 통틀어 인지도 1위 아닐까? 그렇다. '빼빼로데이'다. 빼빼로데이는 1994년 부산에서 여고생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게 통설이다. 기사에 따르면 롯데제과에서는 1996년부터 마케팅을 시작했다고 하니 벌써 스무 해 가깝게 지낸 기념일이다.

롯데제과는 작년에만 빼빼로로 870억 원의 매출을 올렸고 빼빼로데이 시즌에만 전체의 30%가 팔린다고 한다. 안 준다고 뭐라할 사람은 없지만 막상 당일이 되면 편의점에 들려 하나라도 사가지 않으면 왠지 서운한 마음이 든다. 이러니 과자 하나로 저런 매출이 가능할 만도 하다. 유부남도 이럴진대 갓 시작하는 연인들이나 어린 학생들은 오죽하겠는가? 그나마 올해는 일요일이라 슬쩍 넘어갈 수 있겠다고 안심하는 사람들도 꽤 많으리라.


11월 11일은 옆 나라에서도 좋은 날인지, 일본에는 빼빼로와 비슷한 과자인 '포키'의 이름을 딴 '포키데이'가 있다고 한다. 중국도 비슷한데 '싱글족'이라는 뜻의 '꽝꾼(光棍)'을 붙여 11월 11일을 '꽝꾼지에(光棍节)'라는 날이 있단다. 젊은 연인들이 상대에게 사랑의 고백으로 선물을 주고 받는 날로 쇼핑 업체들의 판촉 이벤트가 몰린다고 한다.

난 사실 빼빼로데이를 잘 챙기는 편이다. 어느 해 빼빼로데이에는 식구들한테 젓가락을 선물했다. "젓가락질 잘 하면 똑똑해지고 치매도 안 걸린다"며 앞으로는 국가적으로 '11월 11일 젓가락 데이 제정 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너스레도 떨었다. 아마 당시엔 황우석 박사 이름을 팔았던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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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빼연필 넘치는 빼빼로보다야 연필이 낫다. 젓가락도 강추한다. ⓒ 이대연


또 어느 해는 직장 동료들한테 연필을 두 자루씩 리본으로 묶고 "이런 빼빼로는 어때요"라는 스티커도 붙여 나눴다. 하루 종일 책상에 엎드려 빨간 펜으로 오자와 씨름하는 동료들한테 꽤 요긴한 선물이었고 동료들이 좋아해서 나도 기뻤다. 그날 내 책상엔 '답례'와 '우정'의 빼빼로만 쌓였다는 것이 실망이었지만.

빼빼로데이가 다가오면 그 상업성을 지적하는 의견이 많이 나온다. 이런 상술에 휘말릴 수 없다며 그간 '가래떡 데이'나 '우정의 날' 등으로 부르자는 대안이 있었고 최근엔 나눔을 실천하자는 '하나누리'의 날로 삼자는 주장도 나왔다. 하지만 이미 20년의 세월 동안 각인된 '빼빼로데이'를 바꾸긴 쉽지 않을 듯하다.

빼빼로데이, 그냥 두자. 바꾸자고 해서 바뀌지도 않을 이름은 그냥 두고 차라리 '빼빼한' 다른 것들을 선물하며 마음을 나누자. "일 년에 한 번쯤은 주변사람과 마음을 나누"자는 카피, 꽤 멋지지 않은가. 길쭉하고 마른, 그러니까 빼빼한 젓가락이나 필기구. 물론 가래떡도 좋고 엿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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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빼로 가지런히 꽂혀있는 책들. 책등에 쓰인 제목을 읽는 것만으로도 뿌듯하다.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11자를 본적이 있는가? ⓒ 이대연


내가 찾은 올해의 '빼빼로'는 책이다.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책을 보면 마음이 뿌듯하다. 책은 누워 있어 얼굴을 보일 때도 좋지만 1자로 가지런히 서 있어 등을 보이는 것도 참 매력적이다. 책등에 쓰인 제목을 보면서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상상해보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다.

올해 빼빼로데이엔 맛 좋고 배부른 빼빼로도 좋지만 재미있고 마음부른 '책빼로'는 어떨까? 빼빼로 대신 책을 선물하자고 하는 것은 올해 2012년이 아무도 모르는 '독서의 해'였기 때문도 아니고, 독서의 해임에도 불구하고 출판 불황이기 때문도 아니고, 출판 불황이라 출판사 다니는 나의 월급이 걱정되기 때문도 아니다.

적어도 내 눈엔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11자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블로그에도 함께 올린 글입니다.
#빼빼로데이 #빼빼로 #11월 11일 #책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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