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팔에서 온 수제 달력을 소개합니다

정이 말라간다고 한탄만 해서는 안 되겠지요

등록 2012.05.12 10:58수정 2012.05.12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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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서재를 정리했습니다. 책에다 신문, 그리고 여러 가지 페이퍼 등으로 무척 어지러운 방을 대충이나마 치울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환경이 복잡하면 사고도 복잡해지고 자연 생활도 왔다갔다 꼬이기 쉽습니다.


책을 주제별로 정리하리라고 애초 생각했지만 책장에 꼽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또 공부할 때 애써 준비한 소논문 등을 훑어가며 정리하려니까 시간이 꽤 걸렸습니다. 청소는 정리하고 닦는 것으로 그쳐야지 그것 이상을 기획하면 결과가 좋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서재 정리는 지난 날을 뒤돌아보는 것도 됩니다. 그중 저에게 온 초청장, 홍보물, 개인 서신 등을 들춰 보는 것은 삶에 에너지를 흡입(吸入) 받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어 좋습니다. 지나 일들을 하나하나 반추하는 것은 저의 대인 관계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고, 주고받은 정을 되살릴 수 있어 비타민과 같은 활력소도 됩니다.

그런데 까마득히 잊고 있던 것 하나를 발견한 것은 과외 소득입니다. 이럴 때는 청소하며 소비하는 노동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까지 됩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특별히 발견된 물건이 사람까지 연결해주는 역할을 할 때는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이 따라옵니다.

청소를 하면서 제 눈에 들어온 것은 하나의 달력입니다. 인쇄술이 고도로 발달한 지금 달력은 흔한 물건에 속할 것입니다. 연말연시에 달력 몇 개 이상 입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희소성으로 말하면 달력은 얘깃거리가 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서재 청소를 하면서 제 손에 들어온 달력은 색다른 달력입니다.

국산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영미권에서 들어온 알파벳에 아라비아 숫자가 박힌 달력도 아닙니다. 이런 유(類)의 달력은 '카렌다'라는 콩글리쉬가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어디서 온 달력인지 상상해 보시지요. 아시아의 한 나라입니다. 등반 관광으로 먹고사는 나라, 히말라야 산맥이 에워싸고 있고 세계 제일의 에베레스트 산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나라 네팔에서 온 것입니다.


아는 후배가 2009년 하반기 네팔 여행을 다녀와서 제게 준 선물입니다. 알고 지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텐데, 제게까지 이런 선물을 전해준 마음이 고마워 2010년엔 일 년 내내 이 달력을 서재에 걸어두고 날짜를 살폈습니다. 준 사람의 성의에 덧붙여 사람 냄새가 나는 달력으로 이것이 제게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달력은 인쇄한 것이 아닙니다. 손으로 직접 만든 2010년 달력입니다. 제목으로 뽑은 것처럼 'NEPALESE HANDMADE PAPER'입니다. 그러니까 네팔에서 사람이 손으로 직접 만든 두루마리 달력이라는 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표지까지 총 일곱 장으로 된 달력엔 온통 사람이 직접 그려 넣은 그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달을 나타내는 'JANUARY' 등 알파벳 글자뿐 아니라 요일의 두(頭) 문자 'S, M, T, W, T, F, S' 도 손으로 직접 써 넣은 것이고, 1에서 30 또는 31까지의 아라비아 숫자로 된 날짜도 예외 없이 손 작품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인쇄한 것 못지않다는 것입니다. 아주 세밀합니다. 물감으로 쓰고 그렸을 터인데 손으로 비벼도 전혀 번지지 않습니다. 인쇄한 것에 전혀 뒤지지 않습니다.

네팔은 불교의 나라입니다. 불교 중에서도 소승불교의 한 종파에 속하는 밀교(密敎)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손으로 직접 만든 이 달력엔 불교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군요. 굳이 묻어나는 냄새를 이야기한다면 샤머니즘 내음이 조금 난다고나 할까요. 사람과 동물 그리고 나무를 비롯한 자연물이 마치 상형문자들 마냥 중심 없이 그려져 있습니다. 모르긴 해도 기독교 문화 속에 살아가고 있는 서양 사람들에게 판매할 목적으로 만든 것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끔 선물을 할 때마다 주고받는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가급적 일회로 소비하는 선물보다는 오래 두고 볼 수 있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 중 제일 무난한 것이 마음의 양식이 되는 책입니다. 제가 읽은 책 중 감동받았거나 읽는 이의 정신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것을 골라 선물합니다. 농담 삼아 책 읽고 독후감을 보내라고 하지만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냥 전하는 것으로 만족하게 됩니다.

네팔의 수제(手製) 달력을 제게 선물한 후배의 아이디어는 기발합니다. 1년을 두고 볼 수 있는 선물이 되니까요. 저는 이 선물을 일년 내내 보면서 지냈습니다. 약속 날짜를 잡을 때도, 기념일을 찾을 때도 그리고 기독교 절기를 따져 볼 때도 2010년 한 해 동안 네팔에서 온 이 달력에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선물한 그 후배의 훈훈한 마음을 생각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情)이 메말라 간다고들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한탄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너나없이 조금씩의 여유를 떼 내어 나눌 때 서서히 풀릴 수 있는 것입니다. 작은 것부터 나눌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늘 거창한 것을 먼저 상정합니다만 주님도 작은 것에 충성하는 자에게 큰 것을 맡기셨습니다. 작은 것의 위대함, 그리고 작은 자와 손잡고 더불어 살겠다는 각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수제 달력 #네팔 #후배가 준 선물 #샤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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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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