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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바퀴로 가는 호주 아웃백 18] 아웃백의 심장 앨리스스프링스

등록 2011.08.30 15:48수정 2011.08.30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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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을 걸어서 넘는다고?

호주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A87도로, 그 선 위의 쿨게라(Kulgera)는 마을이라기보다 파출소, 식당, 주유소, 캠핑그라운드를 갖춘 휴게소다. 핀케(Finke)를 떠나 밤길을 달려 늦게 도착했을 땐 그저 오아시스나 구원자처럼 다가왔다. 밤새 그르렁거리는 발전기소리를 떨치고 맞은 아침이 되어서야 밤에 보았던 그만큼이 전부라는 걸 알았다.


어찌 보면 마운트 데어(Mt.Dare)의 확장판이다. 그래도 애들레이드(Adelraide)와 앨리스스프링스(Alice Springs)를 잇는 주요도로에 있는지라 그 황량함의 무게가 덜하다는 차이가 있을 뿐. 마운트 데어보다 15센트 싼 경유값도 그 무게의 차액이다. 지도 위에 나름 큼지막하게 표시된 곳이라도 실제론 마을이 아닌 거점시설이며, 이 거대하고 광활한 아웃백은 실상 이렇게 유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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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게라 전경 지도를 보며 마을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냥 휴게소였다. ⓒ 오창학


쿨게라의 냉동 피쉬앤칩스는 별 감동을 주지 않았지만 자체 브랜드 모자나 티셔츠 등의 기념품을 파는 게 인상적이었다. 이런 작은 가게도 자기만의 것을 판다. 우리 나라 유명 관광지에 산처럼 쌓인 국적불명의 획일화된 기념품들이 아닌.

'겨우' 270Km 떨어진 앨리스스프링스를 향해 도로에 올라탔을 때, 최 감독이 오랜만에 포장도로를 달리는 소감을 묻는다.

"어? 지금 차가 가고 있어요?"

짐짓 너스레를 떨었지만 거의 일주일 만에 포장된 도로를 달리는 느낌은 어색하면서도 안락하다. 아내는 목욕하는 느낌에 비유한다. 시원하고 개운하며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란다. 여행이란 일상의 재발견이 아닐까 싶다. 늘상 다니던 도로가 시원하고, 개운하며, 머리가 맑아지게 하는 느낌이었음을 처음 알았다.


앨리스스프링스로 향하는 길은 이제까지 호주에서 보아왔던 것처럼 일망무제로 뻗어있다. 왕복2차선도로는 좁지만 정말 시원시원하다. 그래서 제한속도도 130Km. 이 속도로도 전혀 빠르다는 느낌 없이 풍경을 완만하게 밀어낸다. 특이한 점은 이 도로에선 유독 캥거루 사체를 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만큼 사고가 안 난다는 말일까? 아니면 앨리스스프링스로 가는 주요도로라서 사체를 빨리 치우기 때문일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어제 핀케에서 쿨게라까지의 야간 운전 때도 다른 지역에 비하면 그리 많은 수의 캥거루가 출몰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서행하는 캠핑트레일러 뒤로 '바다에서 개안(開眼)까지 (From sea to see)'라는 현수막이 눈에 띄었다. 캠핑트레일러 앞에 두 남자가 열심히 걷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한 눈에 보기에도 도보순례자임을 알겠다. 의외다. 1000~ 2000Km 단위를 헤아리는 이런 곳에서 도보 여행자를 만나다니. 더구나 현수막 밑에 있는 '애들레이드에서 다윈까지(Adelraide to Darwin)'라는 문구를 보니 이들이 걷고자 하는 구간이 약 3000여Km임을 알겠다. 군 시절 행군의 경험으로도 감히 꿈꾸지 못했던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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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 종단자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애들레이드에서 다윈까지 3600km를 걷는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은 절반인 앨리스스프링스까지 걷고 나머지 구간은 다른 팀이 이어간다 한다. ⓒ 오창학


그들에게 대화를 요청하니 쾌히 응한다. 28살의 리 코이(Lee Coy)와 35살의 네일 매시그(Neil Masseg)는 시각장애인들을 돕기 위한 이벤트로 도보 국토종단을 하고 있단다. 하루 7시간씩 40Km를 걷는다는데 걸음이 여간 빠른 편이 아니다. 남쪽 애들레이드에서 북쪽 다윈까지는 150~300Km마다 로드하우스가 있는 관계로 숙식은 캠핑트레일러의 지원으로 해결하고 있단다.

이들은 애들레이드에서 앨리스스프링스까지만 걷고, 그 뒤론 다음 주자들이 이어서 걷게 된다는데 아무리 그래도 1500Km의 거리면 이 뙤약볕에서 40일이나 고군분투해야 하는 길이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이제 목적지인 앨리스스프링스까지 4~5일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목적지를 앞에 두고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미루어 짐작컨대 누군가를 도왔다는 보람도 보람이지만 자신에 대한 대견함이 더 앞설 것 같다.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자신에 대해,  단 한 치도 놓치지 않았던 길들의 풍경에 대해. 아내와 같이 해남에서 공주까지 삼남대로를 도보 답사했던 적이 있다. 숨이 턱까지 오르는 뜨거운 여름 볕 아래, 주머니 속 동전의 무게까지도 부담스러워했던 그 열흘의 기억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짬짬이 우리 산하의 길들을 밟고, 퇴직 후엔 아프리카에서 이탈리아까지 옛로마인들의 자취를 도보로 느껴보자 약속했었다. 그 날은 아직 멀게 느껴지고, 지금은 사륜구동을 통해 지구의 깊은 속살을 경험하고픈 열망에 사로잡혀 있다. 

아웃백의 심장, 앨리스스프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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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스프링스의 진입로 드디어 아웃백의 심장 앨리스스프링스에 도착했다. ⓒ 오창학


얼둔다 휴게소(Erdunda Roadhouse)에서 스크램블과 베이컨으로 늦은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점심 허기를 느끼기 전 앨리스스프링스에 닿았다.

"앨리스스프링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Welcome to Alice Springs)."

으레 써놓은 글귀일 만도 하건만 이 글이 새겨진 입석(立石) 앞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시드니를 출발한 이후 해변과 도로, 섬, 광야, 그리고 사막을 지나 어렵게 도착한 아웃백의 심장이어서일까. 호주 횡단의 중간 기착지이면서 울룰루와 카타추타가 있는 붉은 건조지대에 마련된 문명의 공간이 낯설다. 그간 지나쳐 온 마을들에 비하면 인구 2만 8000명의 이곳은 가히 대도시라 할 만하다. 여러 개의 쇼핑몰과 치과까지 갖춘 곳을 얼마 만에 보는 것인지.

1871년 대륙 횡단 전신망의 중계지 건설을 위해 도착한 측량 기사가 이곳 샘에 공사 책임자 찰스 토드의 부인 이름을 붙여 '앨리스의 샘'이라 명명할 때만 해도 오늘날의 이런 흥성거림을 예측이나 했을까. 

그러나 또 잊고 있었다. 이 대도시(?)도 애초엔 맨 땅이었고, 그 맨땅은 애보리진들의 터전이었다는 걸. 그러나 거리에서 마주친 애보리진들은 이 땅에서도 겉도는 이방인이다. 한결같이 행색이 남루하고 표정은 고단하다. 딱 맞닥뜨렸을 땐 아예 길을 피해가기도 한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움츠러들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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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보리진 아트 센터 공원 이 땅의 원래 주인이었을 애보리진들은 이제 소수자요 방외인이다. 한 애보리진 그림 몇 점을 놓고 행인을 기다리고 있다. ⓒ 오창학


숙소를 정하고 애보리진 아트 센터 근처 공원에 나가봤다. 그냥 볕을 쪼이며 소일하거나 그림 몇 점을 깔고 하루를 죽이는 애보리진들이 많다. 원색의 점을 찍어 완성하는 특이한 형태의 그림들이 눈길을 끈다. 노던 테리토리(NT)의 한 부족 제사장이 나무 껍질에 그린 그림을 보고 피카소가 그랬다지.

"이게 바로 내가 평생 성취하고자 노력했던 그것이다."라고.

화려한 빛깔과 구성을 보면 빈말은 아니지 싶다. 아내도 끈질기게 보채는 애보리진 노파에게 그림 한 점을 샀다. 모닥불 주변에 여인들이 모여앉아 부시터커(Bush Tucker:호주 원주민들의 음식으로 씨앗이나 양치류, 과일과 얌 같은 뿌리 음식, 그리고 살이 오른 굼벵이까지 다양하다)를 생각하는 단순한 장면으로 심오한 예술과는 거리가 한참 먼 작품이다. 그러나 곰곰 뜯어보노라면 소유하고 있는 차, 사면이 막힌 집, 몸에 걸치는 과도한 치장과 죽음을 부르는 과식이 아니더라도 삶을 가치 있게 할 것들은 많이 있다는 말을 하는 것 같아 정이 간다.

안작, 호주인의 절규

중심가인 토드 몰(Todd Mall)을 둘러보고 해질 무렵 시가지 북쪽 언덕인 안작힐(Anzac Hill)에 올랐다. 대개 안작 기념탑은 마을, 혹은 도시를 포용하는 높은 곳에 있어 전망이 좋기 마련인데 여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맥도넬(Macdonell) 산맥에 안긴 앨리스스프링스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오는 천혜의 요지다. 노을을 배경으로 사람들의 거처에 하나 둘 불이 켜졌다. 지상은 갓 뜨기 시작한 별들로 소복하다. 어둠이 내린 사막 도시 전경은 한없이 눈을 현혹하지만 나는 이 언덕에 우뚝 선 하얀 안작탑에 더 마음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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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스프링스 전경 안작힐에서 내려다 본 앨리스스프링스의 전경. 맥도넬 산맥에 둘러싸인 아담한 도시의 풍경이지만 내륙아웃백 지역에선 가장 번화한 곳이다. ⓒ 오창학


오벨리스크를 닮은 탑신에 글귀가 선명하다.

"그들을 잊지 않게 하소서(Lest we forget)"

먼 나라 이방인의 눈에도 이것은 탑이 아니라 묘비이며 절규처럼 보인다. 1차 세계대전에 영국의 동맹국으로 참전한 호주·뉴질랜드 연합군을 이르는 말이 안작(ANZAC:Australia and Newzealand Army Corp)인데, 1915년 터키의 갈리폴리(Gallipoli) 해안에 상륙작전을 개시한 4월 25일을 호주 현충일인 '안작 데이'로 기념하고 있다.

12월 19일 철수하기까지 갈리폴리에서 8천 명 이상의 호주군과 2천 명 이상의 뉴질랜드군이 전사했고 부상자만도 1만 9000여 명이 넘었던 참담한 실패의 경험을 호주인이 더욱 단결하고 역사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계기로 삼고 있는 것이다.

호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안작탑에서 1차대전 동안 5만 9000여 명의 전사자를 낸, 인구 500만에 불과했던 신생독립국 호주의 충격이 어떠했을지를 짐작할 만하다. 오죽하면 예수까지도 농담거리가 된다는 이 거칠고 화통한 나라에서 안작 만큼은 예외라는 말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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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작 기념탑 호주군이 참전했던 전쟁의 전몰자를 기리기 위한 안작기념탑. 아시아 속 유럽섬이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자 절규처럼 다가온다. ⓒ 오창학



나 역시 안작을 떠올리면 맬 깁슨이 한창 젊었을 때 출연한 <갈리폴리(1981)>란 영화의 끝장면이 생각나 마음이 무겁다. 육상선수를 꿈꾸던 청년이 죽음이 뻔한 돌격명령에 몸을 던지고 적탄에 맞아 숨지는 끝장면에서 오랫동안 멍했던 기억이 있다. 어이없는 영국 장군의 명령과 이에 따른 호주 젊은이들의 죽음. 

이런 저런 생각에 탑돌이 하는 신도처럼 안작탑 주변을 서성이다보니 한국전 참전 내역도 눈에 띈다. 이렇다 할 설명 없이 'KOREA 1950-1953'이라 양각된 동판이 박혀있을 뿐이지만 가슴 한 쪽이 파이는 느낌이다. 계절마저 반대인 이 먼 나라에서까지 우리 아픈 역사를 복기해야 한다.

한국전 당시(1951.4.23) 로열오스트레일리안 연대 3대대가 남하하는 중공군 118사단의 포위에 맞서 가평군 죽둔리 504고지에서 끝까지 진지를 사수한 '가평전투'는 호주군의 역사에서나 한국전사에서도 중요한 사건이다. 밀리기만 하던 유엔군에게 반격의 시간을 벌어줄 수 있었고, 중공군을 상대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로 3대대의 부대명은 '가평대대'가 되었고 현재도 시드니 외곽의 주둔지에는 가평에서 가져온 바위가 상징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니 전몰자를 기념하는 안작탑에 한국전쟁의 기록이 빠질 수 없었을 게다.

전망 좋은 언덕에 세워진 작은 탑이라 치부해도 그만이지만, 안작탑은 인구도 얼마 되지 않는 아시아 속 유럽 섬나라 호주의 비애를 반영하는 것만 같다. 어둠 속에서 대하는 탑의 모습은 더욱 그렇다. 적은 인구로 스스로를 지키기에 역부족이었던 그들로서는 늘 자신을 지켜 줄 보호막이 필요했을 것이다.

때문에 영국이라는 보호막을 위해서는 1,2차 세계대전을 자신의 것인 양 끌어안아야 했고, 2차 대전 후 노쇠한 영국을 대신해 새 보호막으로 삼은 미국을 위해서는 한국전쟁과 월남전, 그리고 이라크, 아프카니스탄전까지 참전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이 살아남고자 하는 몸부림처럼 느껴져 애처로움이 더하다.

우리는 하나(all for one, one for all)

새 날이 와도 짐을 꾸릴 필요가 없는 앨리스스프링스의 며칠은 달콤하다. 고립된, 그러나 모든 곳을 연결하는 아웃백의 심장에서 우리의 여정도 중반을 맞았다. 이전 경험을 비추어 볼 때 이쯤에선 신체부작용을 경험하기 마련인데 이번에도 예외가 없다.

나는 이미 며칠 전부터 임플란트를 위해 걸어둔 교정와이어가 풀려 잇몸이 찢기고 있었다. 이곳을 벗어나면 아마 퍼스쯤에나 가야 치과가 있는 곳을 만나게 될 것이어서 열 일 제치고 치료부터 받았다. 교정와이어를 끊어내는 5분의 수고비로 20만 원을 뜯겼다. 집 나와선 절대 아프지 말아야 할 일임을 처절하게 통감한다. 경숙은 설사로 체력을 소진하고 있고 아내는 감기인지 머리가 아프고 다리가 시리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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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을 볼수 있는 열기구 비행 새벽에 시행하는 열기구 투어는 아웃백의 장엄한 일출과 지상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 오창학


이런 상황은 열기구 투어 후 더욱 악화되었다. 돈을 내고 열기구를 펴고 접는 노역까지 치루고 맛보는 하늘은, 아니 지상의 광경은 황홀했다. 그러나 시드니와 30분 시차가 난다는 사실도 모른 채 일찍 나왔거니와 비행 준비를 하는 동안, 그리고 비행하는 내내 새벽추위에 떤 탓에 모두가 기운 저하를 맞았다.

특히 고소공포로 기구에 오르지 않고 지상에 남았던 최 감독의 상태는 더욱 심각하다. 남편의 심장부정맥이 도진 게 아닌가 하여 경숙은 여행을 중도 포기하는 상황까지 고려했다. 병원행을 거부한 최 감독이 포도주로 몸을 회복하기까지 아픈 당사자가 다른 아픈 사람을 서로 염려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 어느 때보다 나 아닌 누구에게 의지가 되고 고마웠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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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립항공의료서비스(Royal Flying Doctor Service) 앨리스스프링스 본부에 마련된 전시공간. 호주 아웃백 지역의 의료를 담당하는 시스템이다. 무선과 전화로 진료 상담을 진행하고 비행기를 이용해 환자를 후송한다. 앨리스스프링스 본부는 3대의 비행기로 반경 600Km를 담당한다. ⓒ 오창학


그래서인지 앨리스스프링에서 들른 곳 중 왕립항공의료서비스(Royal Flying Doctor Service) 본부와 방송통신학교(School of the Air)가 인상 깊다. 아웃백지대의 반경 600Km를 담당하며 환자를 진료하고 후송하는 항공의료서비스는 비용 대 효과의 문제를 떠나서 단 한 사람까지 책임지겠다는 의지처럼 보인다.

또 왕립항공의료서비스의 무선 인프라를 활용해 아웃백 지대 아이들에게 무선통신교육을 실시해 왔던 방송통신학교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이제 호주, 혹은 아웃백만의 독특한 시스템으로 자리 잡은 두 시설은 '우리는 하나(all for one, one for all)'를 외치던 '삼총사'의 구호를 떠올리게 한다. 아무도 포기하지 않겠다며 개인는 팀을 염려하고 팀은 개인을 염려했던 우리의 모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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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통신학교(School of the Air) 아웃백에 흩어져 있는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무선통신과 인터넷 등을 활용하여 교육이 이루어진다. 영국 넓이의 10배에 해당하는 지역의 학생들 120여 명을 대상으로 방송 수업이 진행된다. ⓒ 오창학


앨리스스프링스의 왕립항공의료서비스와 방송통신학교
●로열 플라잉 닥터 서비스(Royal Flying Doctor Service)
1928년 호주 태생의 장로교 선교사 존 플린(John Flynn)이 설립한 왕립항공의료서비스는 그 당시 갓 태동한 퀸스랜드 & 노던 테리토리 항공(콴타스 항공의 전신)으로부터 임대한 항공기로 처음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앨리스스프링스 본부가 문을 연 것은 1939년부터다.

호주 전역에서 운영하는 50대의 비행기 중 앨리스스프링스 본부에서는 3대를 운영한다. 한반도의 몇 배에 달하는 면적을 비행기 3대로 담당하고는 있지만 대상 인구라야 3만 6천 명 가량에 불과하므로 무리한 일은 아니다. 질병 상담과 진료는 전화나 무선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항공기 후송 여부는 의사만 결정할 수 있다.

왕립항공의료서비스에 이용되는 기종은 필라투스 PC-12단발기로 최대 4명을 후송할 수 있는 의료장비를 포함해 대당 가격이 6백만 달러를 넘는다. 일반적 운영비는 정부가 부담하지만 항공기를 교체하거나 의료장비를 구입하는 등의 자본설비비는 자체적으로 마련해야 하므로 모금과 RFDS 방문센터의 상품 판매이익금 등으로 충당한다.

이 서비스는 호주 의료보험이 가입된 국민에게만 무료여서 여행자보험조차 들지 않은 외국인은 치료도중 야반도주하는 일도 있다 한다. 그러나 왕립항공의료서비스는 아웃백 내의  거주자 뿐 아니라 여행자의 생존을 책임지는 든든한 구원자이다.

●앨리스스프링스 방송통신학교(Alice Springs School of the Air)

로열 플라잉 닥터 서비스를 위한 광역 고주파 무선 체계를 확립하면서 그 통신망을 교육에 활용할 수 있도록 1951년 설립한 것이 앨리스스프링스 방송통신학교다. 이곳에선 영국의 10배 면적인 130만 ㎢m의 영역을 포괄하며 약 120명의 학생이 등록되어 있으니, 그들 표현처럼 '세상에서 가장 넓은 교실'인 셈이다. 예전엔 무선 통신을 통해 수업을 진행했으나 세월이 좋아진 만큼 지금은 인터넷 화상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 외에 우편과 이메일, 전화, 팩스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다. 일 년에 한 차례씩은 교사들이 직접 방문하기도 하고 세 차례 앨리스스프링스에서 학생들이 다 모이는 행사를 하기도 한다.

#호주 #아웃백 #대륙횡단 #자동차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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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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