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구리는 무엇 때문에 발자국을 남겼을까

[새 터 찾아 삼만리-38] 너구리 발자국 따라 걷는 해변 산책길

등록 2011.02.12 14:18수정 2011.02.12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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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모래사장은 봄여름보다 깨끗합니다. 바닷물 역시 갯물을 정화시킨 듯 맑고 깨끗합니다. ⓒ 송성영

겨울 모래사장은 봄여름보다 깨끗합니다. 바닷물 역시 갯물을 정화시킨 듯 맑고 깨끗합니다. ⓒ 송성영

붉은 햇살이 바다를 흥건히 적히기 전, 이른 아침입니다. 바닷바람이 찹니다. 어제도 차가왔고 오늘도 차갑습니다. 어디에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 바람일까. 벌써부터 볼때기가 얼얼해집니다. 손이 시립니다.

 

우리 집 앞 바다에는 작은 모래 해변이 있습니다. 겨울 모래사장은 봄, 여름보다 깨끗합니다. 바닷물 역시 갯물을 정화시킨 듯 맑고 푸릅니다. 그래서 이른 아침에 만나는 겨울 바다는 태초의 바다, 시원의 세계 같습니다. 모래사장에 발자국을 남기는 것조차 조심스럽습니다.

 

거기에는 모래사장과 함께 자갈밭도 있습니다. 자갈이 모래가 되려면 얼마나 더 오랜 세월동안 제 몸을 굴리고 굴려 깎여야만 할까요? 해변은 자갈을 굴려대는 파도가 쉬어가는 곳입니다. 시간이 잠시 머무는 곳입니다. 언제나 파도는 시계처럼  째깍 째깍 흐르지만 파도와는 별개로 해변은 시간이 멈춰져 있습니다. 바람만이 시간을 가늠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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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 가까이에 눈을 맞춰 보면 마치 시간이 멈춰진 사막 같습니다. 하지만 '해변의 사막'은 온갖 생명들의 흔적이 남겨져 있습니다. ⓒ 송성영

해변 가까이에 눈을 맞춰 보면 마치 시간이 멈춰진 사막 같습니다. 하지만 '해변의 사막'은 온갖 생명들의 흔적이 남겨져 있습니다. ⓒ 송성영

 

해변 가까이에 눈을 맞춰 보면 마치 시간이 딱 멈춰진 사막 같습니다. 하지만 '해변의 사막'에는 온갖 생명들의 흔적이 남겨져 있습니다. 거기에는 멈춰진 시간처럼 선명하게 찍혀 있는 발자국이 있습니다. 오늘 카메라를 들고 나선 이유입니다. 그 멈춰진 시간의 발자국들을 시린 손을 호호 불어가며 카메라에 저장합니다.

 

녀석의 발자국은 아침 해변 산책길에서 늘 마주 대합니다. 언제나 나보다 먼저 산책을 나오는 녀석은 누굴까? 동물입니다.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맨발, 발자국의 주인공은 너구리 입니다. 분명 너구리 녀석의 날카로운 발톱, 앙증맞은 발자국입니다. 억겁의 세월이 담겨진 파도가 쓸고 간 자리, 거기에 남겨진 태초의 발자국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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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해변 산책길에서 늘 마주 대하는 너구리 발자국 ⓒ 송성영

아침 해변 산책길에서 늘 마주 대하는 너구리 발자국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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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구리 발자국과 내 발자국 ⓒ 송성영

너구리 발자국과 내 발자국 ⓒ 송성영

나는 사람입니다. 신발에 양말까지 껴입은 사람의 발자국을 살그머니 가져다 대 봅니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습니다. 갑자기 세상이 혼탁해 집니다. 얼른 발자국을 치웁니다.

 

해변은 온갖 것들이 있으면서도 없습니다. 없으면서도 있습니다. 파도가 그렇게 만들어 냅니다. 오고가는 시간들을 아낌없이 지워나가는 겨울 해변에는 가을의 흔적이 있습니다. 낙엽 하나가 멀리 떠나지 못하는 작은 배처럼 가만히 모래밭에 파묻혀 있습니다.

 

나는 그 낙엽을 한참이나 내려다봅니다. 내일이나 모레쯤 또 다른 파도와 더불어 어디론가 떠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멀리 떠나지 못하는 작은 배처럼 되돌아와 모래에 파묻히게 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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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고가는 시간들을 아낌없이 지워나가는 겨울 해변에는 가을의 흔적이 있습니다. 낙엽 하나가 멀리 떠나지 못하는 작은 배처럼 가만히 모래밭에 파묻혀 있습니다. ⓒ 송성영

오고가는 시간들을 아낌없이 지워나가는 겨울 해변에는 가을의 흔적이 있습니다. 낙엽 하나가 멀리 떠나지 못하는 작은 배처럼 가만히 모래밭에 파묻혀 있습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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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끈한 모래사장에는 조개껍질도 있습니다. 너구리 녀석의 발자국처럼 앙증맞게 생긴 아주 작은 조개껍질입니다. ⓒ 송성영

매끈한 모래사장에는 조개껍질도 있습니다. 너구리 녀석의 발자국처럼 앙증맞게 생긴 아주 작은 조개껍질입니다. ⓒ 송성영

나는 어린 시절의 한 소년을 떠올립니다. 작은 내에서 강줄기를 타고 바다로 향해 멀리 떠나고 싶었던 기억을 되살립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듯이 나는 늘 제자리에 있습니다. 파도에 떠밀려 해변으로 되돌아 온 낙엽처럼 늘 제자리입니다. 작은 냇물이 바다와 이어져 있듯이 늘 제자리입니다. 하지만 어디론가 늘 떠나고 싶어 합니다.

 

해변에는 조개껍질도 있습니다. 너구리 녀석의 발자국처럼 앙증맞게 생긴 아주 작은 조개껍질입니다. 조개껍질은 모래이고 모래는 조개껍질입니다. 조개껍질은 언젠가 모래가 될 것입니다. 모래와 조개껍질은 둘이지만 하나입니다. 조개껍질은 고운 모래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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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으로 떠 밀려온 온 작은 게의 주검. 왜 죽었을까요? ⓒ 송성영

해변으로 떠 밀려온 온 작은 게의 주검. 왜 죽었을까요? ⓒ 송성영

매끈한 모래사장에는 조개껍질뿐만 아니라, 게도 있습니다. 해변으로 떠 밀려온 온 작은 게의 주검. 왜 죽었을까요? 바다 속에 가라앉아 있지 않고 왜 해변으로 떠밀려 왔을까요? 게는 제 생명을 다 살았을까요? 죽어서도 누군가의 밥이 되고 싶지 않아 해변으로 떠밀려 왔을까요?

 

게는 껍질째 그대로 삭아 모래가 되어 영원히 바다와 함께 하길 원했지만 너구리 녀석은 이 작은 게를 찾아 해변으로 나섰는지 모릅니다. 인간의 마을에서 벗어나 시원의 바다에서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발자국을 찍어댔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너구리 녀석이 해변에 나섰을 때는 게가 모래 속이나 바닷물에 잠겨 있었던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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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 가까이에 떠 있는 용섬, 저만치 동쪽에서 아침 해가 떠오릅니다. 갯바위들이 하나 둘 셋 실루엣으로 떠오릅니다. ⓒ 송성영

해변 가까이에 떠 있는 용섬, 저만치 동쪽에서 아침 해가 떠오릅니다. 갯바위들이 하나 둘 셋 실루엣으로 떠오릅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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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해초들이 뒤섞여 있는 곳에 또 다른 작은 게 한 마리가 떠오릅니다. 하마터면 속을 뻔했습니다. 큰 손 하나가 잘려 나간 채 죽어 있습니다 ⓒ 송성영

온갖 해초들이 뒤섞여 있는 곳에 또 다른 작은 게 한 마리가 떠오릅니다. 하마터면 속을 뻔했습니다. 큰 손 하나가 잘려 나간 채 죽어 있습니다 ⓒ 송성영

해변 가까이에 떠 있는 용섬, 저만치 동쪽에서 아침 해가 떠오릅니다. 갯바위들이 하나 둘 셋 실루엣으로 떠오릅니다. 온갖 해초들이 뒤섞여 있는 곳에 또 다른 작은 게 한 마리가 떠오릅니다. 하마터면 속을 뻔했습니다. 큰 손 하나가 잘려 나간 채 죽어 있습니다. 살아 있는 듯 꼿꼿이 서서 죽어 있습니다. 아침 햇살로 모든 것이 살아나고 있는데 게는 살아 있는 듯 죽어있습니다. 

 

죽은 게를 바닷물에 띄워 보낼까 하다가 그만둡니다. 바닷속이 아닌 해변에서 죽은 이유가 따로 있을 것입니다. 내가 떠난 사이에 굶주린 너구리 녀석이 찾아올지도 모릅니다. 배가 고파집니다. 잇몸이 좋지 않아 오십줄로 접어 들면서 이빨을 하나 둘씩 뽑고 있는데 여전히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먹을 궁리를 합니다.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몇 개 남지 않은 이빨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여전히 똑같은 음식들을 탐욕스럽게 씹어 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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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붉은 햇살이 하얀 모래사장에 색깔을 입혀 나갑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 송성영

어느새 붉은 햇살이 하얀 모래사장에 색깔을 입혀 나갑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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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보니 너구리 녀석의 발자국이 해변을 따라 길게 찍혀 있습니다. 아침 햇살에 더욱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 송성영

가만히 보니 너구리 녀석의 발자국이 해변을 따라 길게 찍혀 있습니다. 아침 햇살에 더욱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 송성영

어느새 붉은 햇살이 하얀 모래사장에 색깔을 입혀 나갑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입니다. 찰라 입니다. 그 찰라 속에 모든 생명이 살아있습니다. 그 순간들을 느끼지 못하면 죽음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여 매 순간 깨어있지 못하면 죽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모든 시간들이 그렇게 빤히 흘러가고 있음에도 그 순간순간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죽어 있으면서도 살아있는 것처럼 버티고 서 있는 게처럼 말입니다.

 

가만히 보니 너구리 녀석의 발자국이 해변을 따라 길게 찍혀 있습니다. 아침 햇살에 더욱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뒤 따라가 보니 어딘가에서 더 이상 발자국이 보이지 않습니다. 사라졌습니다. 자갈밭으로 이어진 것도 아닌데 어디로 사라졌을까? 파도가 녀석의 흔적을 지워 냈을까? 녀석은 무엇 때문에 바다로 나섰을까? 불현듯 먹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너구리 발자국을 쫓아온 내 흔적들을 되돌아 봅니다. 너구리의 발자국은 단순합니다. 너구리의 발자국은 숨김없이 한 방향으로 길게 찍혀 있지만 내 발자국은 잡다한 생각만큼이나 어지럽습니다. 뭔가를 찾아 헤매는 탐욕의 발자국입니다. 갈팡질팡 여기저기 찍혀 있는 발자국을 거둬 해변 밖으로 나옵니다.  조만간 파도가 내 흔적을 가뭇없이 지워내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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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구리 발자국을 뒤 따라가 보다보니 어딘가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사라졌습니다. 자갈밭으로 이어진 것도 아닌데 어디로 사라졌을까? ⓒ 송성영

너구리 발자국을 뒤 따라가 보다보니 어딘가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사라졌습니다. 자갈밭으로 이어진 것도 아닌데 어디로 사라졌을까? ⓒ 송성영

   

#아침 해변 #너구리 발자국 #사람 발자국 #해변의 흔적들 #탐욕과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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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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