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자살도시 (Suicide City) - 60

열일곱고개 역성(易姓) - 1

등록 2010.10.21 12:01수정 2010.10.21 12:01
0
원고료로 응원
그날은 폭풍우가 휘몰아쳤다고 혹자는 유성우(流星雨)가 쏟아지는 만월(滿月)이라고 했다. 오소독스(Orthodox) 교파들은 날이 어두웠기에 북극성 같은 항성(恒星)들을 착시(錯視)한 거라는 학설은 이단이라며 공격했다. 어쨌든 그날 서방에서 온 3명의 박사들이 아기 재림자를 축도(祝禱)하고 아기 재림자의 성혈(聖血)을 채혈해서 북방과 남방의 지성소(至聖所)에 보관했다는 민요(民謠)는 미륵보살(彌勒菩薩) 신화의 멍석이 되었다. 그날이 칠야(漆夜)임에는 분명한데 기상(氣象) 탓인지 자살도시의 정전(停電)으로 인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이 갈렸지만 그날의 발화점(發火點)은 로빙이었다.

---------------------------------------------------------------


숨만 쉬어도 장기(臟器)가 와들와들한 추위였다. 풍속(風速)이 갈수록 올라가 자살도시 국경선 철망에 성에가 끼었고 동사자(凍死者)가 속출했다. 자살부대들은 이판사판이 되어 결사적으로 철책과 담벼락을 넘으려 했고 이에 자살도시 시민들은 월장(越牆)하는 자들을 사살했다. 의례 총성(銃聲)이 울리면 자살부대는 오합지졸이 되어 도망갔지만 이날은 주검으로 진지를 구축하고 자신을 총알받이 삼아 조국을 위해 산화(散花)하려는 무명용사였다. 디데이(D-Day)이려나. 자살부대의 전우애는 식을 줄 몰랐고 스스로 해방군의 창검이 되겠다는 충정(忠情)으로 진공(進攻)하자 자살도시 군경들도 점점 밀려났다.

저러다 말겠지. 왜 이리 추워.
밤잠은 건너갔어. 야근 수당이나 나오려나.

여차하면 출격할 자살도시 별동대(別動隊)는 막사에서 불을 쬐며 한담(閑談)을 나누고 있었다. 자살 청원자들이 몰리면서 휴가도 휴식도 제때 취하지 못하고 급료도 연체된 터라 그들도 궁핍하게 보내며 시간을 때우는 중이었다. 오늘은 자살부대의 투지가 격렬해서 조마조마했지만 몇 번 회전(會戰)하다 종내 그치리라 여기며 온수(溫水)로 으쓸으쓸한 삭신을 녹이려 했다.

피이. 피이이.

주전자가 동면(冬眠)에서 깨어나 포성을 터트리자 별동대 대원들이 쪼르르 난로가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잔을 들고 물을 받으려할 때 마개에서 나오는 수증기가 싹둑 가라앉았다. 전기가 나갔고 막사 안은 컴컴한 야경(夜景)에 파묻혔다. 불이 들어오길 기다렸지만 전원(電源)은 끊긴 듯했다. 마개가 푸푸거리며 수온이 낮아지는 야릇한 음조가 별동대를 감아서 목을 메마르게 했다.


변압기 내려갔어?
아니야, 조명탑도 나갔는데.
변전소가 동파(凍破)됐나.

별동대가 막사 밖으로 나오니 자살도시 전체에 전기가 끊겼고 하늘도 빛 한 점 보이지 않게 캄캄했다. 사위를 유전에서 막 뽑은 석유로 환칠한 것처럼. 냉풍(冷風)과 야릿야릿한 서슬에 국경선의 자살부대와 군경들도 접전을 멈추고 현묘(玄妙)한 전조(前兆)에 치아를 오도독거리며 떨었다. 

피피핏.

자살도시 청사(廳舍)의 전광판에 전류가 흐르며 불이 켜졌다. 자살도시에 홀로 빛을 발하며 반짝여서 국경선에서도 환히 보였다. 전광판은 지지직거리다 밑에서 검은 고딕체의 자막을 자궁에서 산아(産兒)를 해산(解産)하듯 서걱서걱 올려 보냈다.

떠나라
내가 남는다
고마웠다

느리게, 꽤나 느리게 그 자막은 곰살맞게 부상(浮上)하다 사라졌다. 자구(字句)의 비밀을 캐려는 쿵적한 침묵이 자살도시에 감돌다 천부(天部)를 가를 굉음이 터져 나왔다.

"시장님! 안됩니다!"

자살도시는 그 뜻을 알아채고 공황(恐惶)에 빠졌고 시민들은 어미를 잃은 지빠귀처럼 짹짹거렸다.

막아야 해!
시장님을 찾아!
어디에 계신 거야!

국경선이 뚫렸다. 국경의 수비가 허해지자 자살부대가 방벽을 허물고 밀렵자를 추격하는 코뿔소떼처럼 밀고 들어왔다. 시민들은 전의를 잃고 퇴각하다 제발에 쓰러지거나 자살부대에 밀려 넘어지다 압사했다. 자살도시 외곽에 포진해서 자살도시를 강점(强占)하려던 레믹스폴리스의 친위대가 침공하다 골드폴리스의 특공대와 교전했다. 피아(彼我)를 분리할 수 없는 난장판. 쓰러진 자가 흘리는 진물과 시장을 외쳐대는 비탄, 성도(聖都)로 향하는 욕정이 어우러져 셀프 존으로 뻗어갔다. 아마겟돈의 태동이었다.

---------------------------------------------------------------
#자살 #현존(現存) #재림자 #폴리스 #집단지성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캐나다서 본 한국어 마스크 봉투... "수치스럽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300만명이 매달 '월급 20만원'을 도둑맞고 있습니다
  4. 4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5. 5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