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에 둘러본 청산리 전투 유적지

'박영희 시인과 함께하는 만주기행'을 다녀와서(8)

등록 2010.09.20 17:15수정 2010.09.20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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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기행 넷째 날(8월15일), 아침에 눈을 뜨니까 6시 30분이었다. 천고의 비밀을 간직한 천지(天池)에서 발원한 물이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갈라지는, 하늘과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 아내와 하룻밤을 지냈다고 생각하니까 감회가 남달랐다.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니까 맑고 찬 공기가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한산한 거리는 흑백사진을 통해봤던 1960년대 서울 변두리 지역과 흡사했다. 10분쯤 산책을 하고 들어와 샤워하니까 고지대 지하수여서 그런지 차가움을 느낄 정도로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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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가 다가가도 버티고 있는 소. 버스를 막고 있는데도 웃음이 나오더군요. ‘중국은 중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조종안

 

 

아침을 먹고 버스에 올라 화룡을 향해 출발했다. '이도백하'에서 버스로 2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도로에 버티고 서 있는 소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버스가 가까이 가도 왕방울만 한 눈만 껌뻑였다. 일행들은 중국은 소들도 만만디 문화에 길들여져 있는 모양이라며 웃었다. 

 

폭염이 절정인 8월 중순인데도 하늘은 한국의 가을 하늘처럼 청잣빛이었다. 시골이고 아침이어서 그런지 기분이 무척 상쾌했다. 전날 백두산에 다녀온 피곤도 풀리는 것 같았다. 버스 창밖 풍경들이 낯선 듯하면서도 거리감을 느낄 수 없었다. 

 

청산리 전투 유적지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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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룡시를 상징하는 용 탑. ‘비약’이라고 새겨 있는데요.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라서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단어들이 강하다고 합니다. ⓒ 조종안

 

버스가 화룡시로 접어드니까 박영희 시인이 마이크를 잡았다. 아파트에 접시 안테나가 세워진 집에는 한국 TV를 시청하려는 조선족이 산다는 것. 우리 돈으로 1천 원 하는 화룡시장 보신탕이 맛있다며 보신탕 예찬도 곁들이며 말을 이어갔다.

 

"화룡시에서 청산리 전투가 있었던 현장까지는 약 24km 됩니다. 시가지를 벗어나면 비포장도로인데 봉오동에서 이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와 마을 주변이 모두 전투지였습니다. 오늘이 광복절인데, 저희가 광복절을 '청산리'에서 맞게 됐네요.

 

'청산'이라는 단어가 두 가지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는 '푸른 산'이고 또 하나는 뭔가를 '청산해야 한다'는 뜻. 그러니까 뭔가를 청산해야 합니다.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청산하러 가는 겁니다!"

 

박 시인은 역사의 현장에서 광복절을 맞으니까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었다. '청산'의 의미를 설명하면서도 앞에 '일제 잔재'를 붙이지 않았다. 아이들까지 웃는 것이 구태여 붙이지 않아도 무엇을 청산하러 간다는 뜻인지 모두 이해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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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룡 시내를 벗어나니까 청산리 전투 유적지까지 비포장도로였고 평화로운 농촌풍경이 펼쳐졌는데요. 항일부대와 일본군의 전투지였다는 설명을 들으니까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 조종안

 

버스는 계속 달렸다. 옥수수밭과 콩밭을 조각 모음 해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들녘과 산줄기를 오른쪽으로 끼고 달렸다. 쓰러질 듯 허름한 가옥, 시냇물이 자갈을 때리며 흐르는 냇가, 방목해놓은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은 한국의 1950년대 농촌풍경을 연상시켰다. 제 65회 광복절이라니,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던 항일 독립투사들의 넋을 마음속으로 기렸다. 일본군을 대파한 청산리 전투 유적지에 대한 박영희 시인의 현장감 넘치는 설명은 감격을 더하게 했다.

 

박 시인은 창밖으로 펼쳐지는 막막한 산들과 마을 풍경을 가슴에 새기면서 봐달라고 당부했다. 그냥 보면 한가로운 농촌일 뿐이지만, 수많은 항일투사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피를 흘리며 쓰러져갔던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이기 때문이라며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저는 식민지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스물다섯 살 때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갔었습니다. 3개월 동안 막노동을 해서 번 돈으로 갔지요. 왜냐, 조선인 광부들이 끌려가서 그곳에서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인생이 빗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길로 갈 수 있었는데, 이렇게 늘 신작로 길을 달리니까요.

 

저는 2004년에도 이 길을 걸어갔던 적이 있습니다. 이빨이 물리고 가슴이 울렁거리더군요. 3년 전에는 딸과 함께 걸어갔습니다. 딸이 저에게 '아버지는 왜 막막한 산이나, 터덜터덜 비포장 길만 다니시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우리가 싸웠던 곳이기 때문에 가야 된다. 도심에서는 못 싸운다. 전쟁은 항상 산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길은 그런 길입니다."  

 

완승으로 끝난 '청산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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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시인이 기념비 앞에서 일행들에게 청산리 전투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해 광복절이어서 술도 한 잔 올리고, 단체로 묵념도 했습니다. ⓒ 조종안

 

일본은 봉오동 전투의 피해를 만회하려고 1920년 10월 연해주에 있는 부대와 심양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까지 러시아 쪽으로 철수시켰다. 독립군을 싹쓸이하기 위함이었다. 독립군의 뿌리를 뽑으려는 일본의 대대적인 전투 선포였다. 이름 하여 '청산리 전투'.

 

일본군의 낌새를 알아차린 항일군은 화룡현 서북쪽 산간지대로 속속 집결했다. 항일군은 산세가 험한 지역의 지리를 가장 잘 아는 마을 사람들을 앞세우고 일본군이 침투해올 위치와 시간, 거리 등을 점검함으로써 유리한 지역을 선점할 수 있었다.

 

이날(1920.10.20) 모인 항일군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 1800명, 홍범도 대한독립군 300명, 안무 장군의 국민군 250명, 대한신민당과 광복단 각각 200명, 한민회와 의민단 각각 100명, 이범석 장군이 이끄는 사관학교 졸업생 200명, 신병 270명이었다. 여기에 맞서는 일본군은 2만 5천 명으로 대규모 부대였다.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숫자였으나 전투는 완승으로 끝났다.

 

청산리 전투는 독립군이 간도로 출병한 일본군과 대결한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독립군이 최대의 전과를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1주일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독립군은 26일 새벽까지 10여 회의 전투를 벌인 끝에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명을 사살하였고, 독립군 측은 전사자 100여 명을 내었다. 

 

김좌진 휘하의 북로군정서군은 10월 12일 정예군을 이끌고 청산리에 도착해 진지를 구축했다. 김좌진은 백운평 전투 등 5차례의 전투를 단독으로 수행했으며, 어랑촌 전투 등 2차례의 전투를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연합부대와 공동으로 수행했다.

 

참패 후에 이루어진 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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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항일 대첩 기념비. 만주 유적지를 방문하면 기념비에 새겨진 비문을 촬영해올 것을 권합니다. 조선족 언어 공부도 되고, 문구를 풀다 보면 더욱 가깝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 조종안

 

기념탑으로 향하는 길목엔 빈집들이 많았다. 박영희 시인은 청산리 전투 이후 일본군을 피해 마을을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아 아예 사라진 마을도 있고, 주민 모두 몰살당하다시피 했던 마을도 있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박 시인은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 전투도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처럼 항일투사들이 집에 오면 방을 내주고, 일본군이 오는지 대문 앞에서 보초를 서는 등 주민의 협조가 컸는데, 전투가 끝나고 잔인하게 학살당했다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청산리 전투에서 참패한 일본은 독립군은 물론 무고한 주민까지 토벌의 대상으로 삼았다. 젖먹이까지 집안에 가두고 불을 질렀으며 뛰쳐나오면 칼로 찌르고 기관총으로 쏴죽이고 시체를 불 속에 집어넣는 만행을 저질렀단다.

 

마을 남자들이 한 사람도 남지 못하고 학살당하는 광경을 끝까지 지켜보도록 부녀자들을 강제로 서 있게 하는 등 인류 역사상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잔인하고 참혹하게 학살한 주민의 수가 3천 명에 달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3천 명이라는 말을 흘려들을 수 없었다. 필자가 사는 면 인구도 3천 명 가까이 되기 때문이었다. 박 시인의 설명을 듣는 순간 필설로 설명하기 어려운 참혹한 장면들이 떠올랐다 사라지면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박영희 시인은 기념탑에서 내려오며 기념비에 새겨진 비문 내용이 우리가 알고 있는 청산리 전투와 만주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며 안타까워했다. 중국 공산당이 개입하기 때문이라는 것. 필자가 보기에도 중국은 '항일'보다 '반일'을 즐겨 사용하는 것 같았다. 그냥 구경만 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덧붙이는 글 현지 가이드와 박영희 시인의 설명, ‘2010만주기행’ 자료집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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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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