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 옷 벗고 예성강 건너던 때 잊지 못합니다"

'실향민' 전일 선생님의 덩그런 뒷모습

등록 2010.08.15 14:56수정 2010.08.15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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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이 흘렀지만 잊히지 않는 뒷모습이 있습니다.

지난 8일 이른 아침, 모티프원의 1층 발코니에서 임진강 쪽을 향해 하염없이 시선을 주고 계신 어르신의 뒷모습입니다.

다른 게스트들은 아직 아무도 기상하지 않은 시각이었습니다. 저는 실내의 유리문 안에서 그 어른의 뒷모습을 덩달아 한참 바라보다가 미동도 않고 서 계신 그 어른께 혹 방해가 될까봐 까치발 발걸음으로 서재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날 오후시간 나들이 후 먼저 들어오신 어르신의 며느님으로부터 시아버님에 대한 짧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평양이 고향인 분입니다. 오늘 아버님을 모시고 오두산통일전망대와 문산교회를 다녀왔습니다. 문산교회는 아버님이 결혼식을 했던 곳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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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과 결혼식을 올렸던 문산교회를 방문하고 이북실향민들의 묘원인 동화경모공원을 다녀오시고, 피난길에 봇짐을 내려놓았던 임진각을 방문하신 후 마침내 밝은 표정으로 변하신, 실향민 전일선생님. ⓒ 이안수


며느님은 이번 가족 여행을 주선한 정경화 선생님이었습니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정 선생님은 일 년전에 결혼해서 남편의 직장이 있는 포항으로 내려갔고, 시아버님은 대구에서 홀로 사신다 하셨습니다.

"저희 부부가 아버님을 모시고자하지만 홀로 계시는 것이 편하다며 극구 사양을 하십니다. 그래서 울산에 살고 계시는 형님네 부부와 함께 찬을 마련해서 매주 토요일에 대구의 아버님집에 모이는 것으로 아버님에 대한 불효를 위안 삼고 있습니다."


이번 헤이리 여행은 어르신과 포항의 아들내외와 8개월 된 손주, 울산의 딸 내외와 함께한 여행이었습니다.

정 선생님이 올라가신 얼마 뒤 사위와 함께 어르신이 들어오셨습니다. 저는 어르신께 깊이 고개 숙여 인사를 드렸습니다. 피아노 옆에 천천히 지팡이를 세우시며 "75세의 전일"이라고 본인을 밝히셨습니다.

"내 생에 이렇게 좋은 집에 있어보긴 처음입니다."

전일선생님과 마주섰지만 전 선생님은 저와 눈을 맞추는 대신 시선을 제 어깨너머로 두고 느리면서도 격조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 아침에 헤이리 산책을 하셨습니까?
"걸어서 동화경모공원에 다녀왔어요. 아내를 먼저 보내고 나서는 방향이 잘 가늠이 되지않습니다. 그래서 사위와 함께 다녀왔습니다. 고향사람들을 만나는 기분으로 그곳에 들렸습니다."

동화경모공원은 주로 이북오도민들이 영면하고 있는 헤이리와 이웃한 공원묘원입니다.

 - 파주에는 간혹 다녀가셨나요?
"수십 년 전 문산을 떠나고 처음입니다."

- 결혼식을 올리셨다는 문산교회에도 다녀오셨다니 기쁘시겠습니다?
"내자(內子)없이 홀로 간 곳이라……."

- 부인과는 딸·아들 둘만 두셨습니까?
"네. 이번에 모두 함께 왔습니다. 딸 내외와 아들내외도 모두 생각이 깊어서 제게 모자람이 없습니다."

오래 서 계시는 것이 불편하실까보아 더 이상의 질문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날 늦은 밤, 정선생님 부부가 서재로 내려왔습니다. 남편분과 낮의 이야기를 이었습니다.

- 그럼 본인도 파주에서 자랐겠군요?
"그러나 일찍 파주를 떠났기 때문에 기억이 많은 것은 아닙니다."

- 아버님에게 제2의 고향이고 다른 가족들에게는 실제의 고향이기도한 파주로의 발길을 왜 그렇게 오랫동안 끊었었나요?
"고향을 지척에 두고도 갈 수 없는 이곳을 아버님은 당최 오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님과 함께 월남하신 할머님께서도 금강산 구경 한 번 가시지 않았습니다. 금강산 관광길이 열리고 저희가 아버님과 할머님을 제일 먼저 보내드리고 싶었지만 두 분 다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곳까지 가서도 고향한번 발길 못할 곳에 왜 가느냐'는게 그 이유였습니다. 할머니와 함께 단둘이 월남하시고도 평양에 제일 가까운 문산에 자리 잡고 고향으로 되돌아 갈 날을 10년을 넘게 기다렸지만 그 꿈이 실현될 실마리가 보이지 않자 모든 희망을 끊고 남쪽으로 내려간 다음 북쪽으로의 발길을 뚝 끊으신 거지요. 4년 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 아버지도 쓰러지셨다가 이제 상태가 호전되신 것입니다."

- 그럼 아버님도 이번 파주행이 파주를 떠나고 처음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이번에 3일간의 가족 휴가를 계획하면서 어디가 좋을까를 고민하다가 저의 처가 아버님을 설득한 것입니다. 서울에서 아버님의 건강검진을 받고, 파주를 한 번 둘러보자고……. 그래서 이번 파주 행은 아버님에게나 누나나 저에게 참 각별한 여행입니다."

그제야 그 날 아침, 북쪽을 향해 하염없이 시선을 두고 계시던 전일선생님의 뒷모습에 왜 제가 깊은 끌림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뒷모습에 흐르던 분위기의 정체는 탄식과 회한이었다 싶습니다.

다음날 아침, 먼 길을 가야한다며 정경화 선생님 일행이 모두 내려오셨습니다. 전일 선생님의 모습은 어제보다 한결 밝아져있었습니다. 작별 인사차 정원으로 따라 나간 저는 다른 가족들이 떠날 차비를 끝낼 때까지 전선생님과 말을 이었습니다.

- 북에서 내려오실 때 어머님을 업고 언 강을 건넜다고 들었습니다. 오두산통일전망대에 올라 북을 보니 감격스러운 마음이셨겠습니다?
"빤히 보이는 북을 두고도 가지 못하니 오히려 가슴이 아렸습니다. 제가 피난길에 맨몸으로 도강한 곳은 예성강입니다. 강 상류 쪽이라 대부분은 허리춤정도의 깊이였지만 깊은 곳은 목에 물이 닿는 곳도 있었습니다.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옷을 발가벗고 강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벗은 옷을 봇짐에 싸고 그것을 머리위에 얻었습니다. 저는 어머님을 엎고 어머님은 봇짐을 이고 강을 건넜습니다. 1951년도 1월이었습니다. 예성강의 겨울 추위가 매워서 모든 강이 얼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남진하다보니 피난민이 건너는 얕은 구간은 녹아서 온 몸이 물에 잠겼습니다. 여자 중에는 더러 옷을 입고 건너는 사람도 있었지만 강을 건너서는 옷이 얼음으로 변해 더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예성강을 건너서 주먹밥으로 연명하며 2주 만에 당도한 곳이 지금의 임진각입니다."

-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 추위와 굶주림은 불안감에 비하면 참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일행들을 의심하는 일이 더 큰 일이었습니다. 피난민의 행렬에는 민간인뿐만 아니라 국군과 인민군이 함께 섞여있었습니다. 말을 잘못했다가는 적으로 몰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국군에게는 제가 첩자일 수 있고, 인민군에게는 제가 반역자일 수 있었던 것이지요. 말하자면 피난민들에게 적이 둘이었던 셈입니다."

- 남하하셔서 바로 문산에 자리를 잡았습니까?
"아닙니다. 전선의 이동에 따라 부산까지 피난을 갔었지요. 그리고 군국을 따라 다시 북쪽으로 올라왔습니다. 전쟁이 오래가면 얼마나 가겠냐, 는 기대였습니다. 전쟁만 끝나면 바로 평양으로 가기위해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문산에 주저앉은 것입니다. 그런데……. 통일의 희망은 휴전협정으로 무산되고 곧 갈수 있겠지, 하는 기대는 휴전 후 십 수 년이 지나도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고향으로 갈 단 하나의 희망을 품고 어머님을 모시고 문산에서 생활을 꾸리면서 그곳의 처녀와 문산교회에서 결혼도 했습니다. 하지만 남북의 정치상황은 저의 모든 기대를 앗아갔습니다. 모든 것을 단념하고 저는 어머니와 내자를 대리고 살기위해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살고 있는 대구입니다. 그곳에서 남편의 고향으로 함께 가볼 수 있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내자는 4년 전에 먼저 떠났습니다. 파주가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었군요. 딸과 며느리는 제게 참 잘해요. 아들과 사위는 생각이 깊고. 이 식솔들과 파주에 다시 오게 되면 꼭 선생님을 다시 뵈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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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이 참 나긋나긋한 정경화선생님의 요청으로 우리 모두 함께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셔터를 누른 이는 정경화선생님과 남편분과 함께 새벽까지 맥주를 비우며 얘기의 만리장성을 쌓았던 저의 둘째딸 주리입니다. ⓒ 이안수


전일 선생님 부부는 늘 북쪽의 고향을 그리면서도 둘을 둔 자녀를 잘 훈육하여 딸은 성악을 하는 음악교사로, 아들은 한 방송국의 연출가로 사회에 내보냈습니다. 늘 전일선생님을 그림자처럼 수행하는 사위는 딸과 함께 성악을 하는 교사이며 서울에서 시집온 며느리는 포항의 자연과 인문환경을 익히며 당분간 자녀의 양육하는데 전념할 생각이랍니다.

전일선생님의 이번 파주여행은 평생 가슴의 응어리로 남았던 고향을 가지 못하는 시대와의 화해 여행이었습니다. 저는 전일선생님께서 작별의 손을 느리게 흔드는 모습에서 '아직 광복은 없다'고 느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 분단의 단초가 된 한일강제병합 100년, 그리고 광복 65년. 진정한 광복은 전일선생님 가슴속 멍울이 풀릴 수 있도록 남과 북이 섞이는 그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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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안수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포스팅됩니다.


덧붙이는 글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포스팅됩니다.
#광복 #전일 #정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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