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의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의 여인

[리뷰] 시배스천 배리 <비밀성서>

등록 2010.02.25 17:53수정 2010.02.25 17:53
0
원고료로 응원
a

<비밀성서> 겉표지 ⓒ 사피엔스21

▲ <비밀성서> 겉표지 ⓒ 사피엔스21

아일랜드는 오랫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동안 영국과 아일랜드 사이에는 크고 작은 갈등들이 있어왔고 그 갈등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심화된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 틈을 타서 더블린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지만 곧 진압되고 만다. 아일랜드의 본격적인 저항은 1919년부터다. 그해 1월 아일랜드 공화국군 IRA(Irish Republican Army)가 독립투쟁의 선봉에 서면서 독립전쟁이 시작된다.

 

IRA의 공격과 영국의 보복이 2년 넘게 계속된 끝에 영국은 협상안을 내놓는다. 북부 아일랜드를 제외한 남부 아일랜드로만 자치국가를 만든다는 내용이었다. 이 조약이 발표되자 아일랜드인들은 다시 두 분파로 나뉜다.

 

조약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계속된 전쟁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조약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조약의 결과로 아일랜드는 머리없이 몸통만 남는다고 여겼다.

 

결국 아일랜드는 다시 내전에 돌입한다. 2년 동안 수많은 사상자를 낸 내전 끝에 조약 지지파가 정권을 잡게 되었고, 남부 아일랜드는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독립한다. 북아일랜드는 지금도 영국에 속해있다.

 

전쟁으로 망가진 평온한 가정

 

무려 5년 가까이 지속된 전쟁과 내전은 많은 것을 파괴하고 폐허로 만들었을 테지만, 평범한 삶을 원하던 사람들의 인생도 많이 망가뜨렸을 것이다. 시배스천 배리의 2008년 작품 <비밀성서>의 주인공 로잔느 맥널티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로잔느 맥널티는 20세기가 시작되고 몇 년 후에 아일랜드의 북서부에 있는 도시 슬라이고에서 태어났다. 슬라이고는 시인 예이츠의 고향이자 '이니스프리'라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곳이다.

 

로잔느의 아버지는 묘지 관리인으로 항상 제복을 입고 묘지에서 근무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오래전 선원생활을 하던 당시 만났던 여인으로, 슬라이고에서 그녀보다 아름다운 여자는 없을 만큼 미인이다. 로잔느도 어머니를 닮아서 어린 시절부터 외모가 눈에 띄었다.

 

밤이 되면 근무를 마치고 들어온 아버지는 로잔느의 침실에서 그녀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때로는 거실에서 당당한 목소리로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럴때면 아버지의 목소리가 달콤한 꿀처럼 로잔느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와 모든 두려움을 없애주었다. 로잔느의 집은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행복한 가정이었다.

 

그런 행복은 아일랜드 내전과 함께 사라진다. 로잔느가 열다섯 살이던 그 해, 조약에 반대하는 게릴라 세 명이 묘지 관리소로 들이닥친다. 그때 로잔느는 아버지와 함께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사건을 시작으로 로잔느의 집안은 빠르게 그리고 잔인하게 파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어린 로잔느의 삶도 마찬가지로 파괴되어 가는데...

 

소설에서 묘사하는 아일랜드의 역사와 풍경

 

<비밀성서>는 그로부터 수십년 후에 정신병원에 수감된 로잔느가 자신의 삶을 회상하면서 시작된다. 그 정신병원의 원장인 그린 박사도 로잔느와 대화하면서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다. <비밀성서>는 로잔느의 증언과 그린 박사의 비망록이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왜 이런 전개방식을 택했는지 궁금해지지만, 그 호기심은 마지막에 로잔느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풀리게 된다.

 

아일랜드의 소설 중에 국내에 소개된 것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과 티격태격했던 아일랜드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소설의 소재로 적당한 것들이 꽤 많을 것이다. 아일랜드의 역사도 역사지만, <비밀성서>를 읽다보면 아일랜드의 풍경들이 떠오른다.

 

좁고 모래가 수북해서 위험한 스트랜드힐의 해변, 아일랜드 신화에 나오는 메드브 여왕이 돌무덤 속에 잠들어있는 녹내레이 산, 푸른색 낡은 철제 옷에 검은 모자를 쓰고 깊은 바다속을 끊임없이 가리키고 있는 멋진 금속인간 동상, 물을 마시러 내려간 듯 바닷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아름다운 저택들.

 

이런 풍경들은 전쟁과 내전으로 인해 악몽의 배경으로 바뀐다. 개인의 삶도 속절없이 무너진다. 사람들은 그안에서 발버둥치지만, 자신의 손이 닿지않는 것들을 잡으려는 몸부림에 불과하다. 로잔느는 무너진 삶속에서도 살아남았다. 비록 아무것도 가진 것없이 정신병원에 있는 신세지만 그래도 살아남았다. 그것은 역사와 운명이 만들어낸 비극에 대해서 로잔느가 거둔 작은 승리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비밀성서> 시배스천 배리 지음 / 강성희 옮김. 사피엔스21 펴냄.

2010.02.25 17:53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비밀성서> 시배스천 배리 지음 / 강성희 옮김. 사피엔스21 펴냄.

비밀성서

시배스천 배리 지음, 강성희 옮김,
사피엔스21, 2010


#비밀성서 #아일랜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2. 2 경찰서에서 고3 아들에 보낸 우편물의 전말
  3. 3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4. 4 하이브-민희진 사태, 결국 '이게' 문제였다
  5. 5 용산에 끌려가고 이승만에게 박해받은 이순신 종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