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남자, 나이 마흔에 희망의 불씨를 태우다

[영화로 읽는 세상 이야기 18] 사회적 소수자를 위한 사랑과 투쟁의 기록 <밀크>

10.02.23 12:28최종업데이트11.05.24 13:42
원고료로 응원

※ 이 영화 칼럼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978년 11월 27일 화창한 오후. 샌프란시스코 시 청사에서 몇 발의 총성이 울리고, 조지 모스코니 시장과 하비 밀크 시의원이 살해당합니다. 전직 경찰 출신의 시의원 댄 화이트가 저지른 이 사건은 당시 미국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습니다.   

실존 인물 하비 밀크의 삶과 사랑과 투쟁을 기록한 <밀크>. 밀크를 열연한 숀 펜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시상식에서 아널드 슈워제네거에게 ‘하비 밀크의 날’ 제정을 공개적으로 촉구했다. ⓒ 마운틴 픽쳐스

그리고 20년이 지난 2008년.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에 비견되는 <엘리펀트>와 <굿 윌 헌팅> 등을 연출한 거장 구스 반 산트 감독이 비명횡사한 하비 밀크의 생애 마지막 8년간의 행적을 조명한 실화 <밀크>를 세상에 내 놓습니다.

하비 버나드 밀크. 1970년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커밍아웃 한 뒤, 시의원에 도전해 3전4기 만인 1977년 11월 17일 미국 역사상 성소수자로서는 처음으로 시의원에 당선된 인물입니다.

밀크는 성소수자의 인권만이 아니라 백인 남성의 주류 사회에 의해 차별을 받던 유색인종과 장애인 등 사회적 소수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행동한 '양심의 상징'으로 꼽힙니다.

미국 사회의 거대한 편견과 차별의 벽에 맞서 싸우며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역설한 밀크의 삶과 사랑과 투쟁의 기록, <밀크> 속으로 들어갑니다.

성소수자 증권맨에서 희망을 향한 투쟁을 시작하다

영화는 "이 연설은 내가 암살됐을 때 공개될 것"이라는 말과 함께 밀크가 자신의 일생을 낡은 레코드에 녹음하면서 시작합니다. 1970년, 마흔 살 생일을 맞은 뉴요커 증권맨 하비 밀크(숀 펜)는 동성 애인 스콧(제임스 프랑코)을 만나면서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 터닝 포인트를 맞습니다. 이윽고 둘은 새로운 삶을 찾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고 희망을 향한 밀크의 투쟁의 기록은 시작됩니다.

카스트로 거리에 작은 카메라 가게를 연 밀크는 유쾌한 성품과 타고난 친화력으로 가게를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세상에 알리는 사통팔달로 만들어 나갑니다. 하지만 성소수자들은 편견과 폭력을 견디다 못해 호루라기에 무기까지 지니고 다녀야 합니다. 점차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한 연대에 눈을 떠가던 밀크는 성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실 정치를 바꿔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시의원 선거에 출마합니다.

3번 낙선 끝에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시정감독위원회 시정감독관)에 당선된 밀크가 조지 모스코니 시장 앞에서 선서를 하고 있다. ⓒ 마운틴 픽쳐스


선거운동 와중에 사랑하는 스콧과 헤어지는 아픔을 겪고 세 번째 도전한 선거에서도 패한 어느 날, 플로리다에서 성소수자가 사회적 차별을 당하지 않을 권리를 담은 법안이 부결됩니다. 밀크는 분노한 성소수자들을 이끌고 시의회 앞에서의 연설을 시작으로 노인과 여성들과 유색인종과 노동현장 등을 방문하며 선거운동을 한 끝에 마침내 시의원에 당선됩니다. 그리고 영화는 당시 시대상황을 픽션과 논픽션 화면으로 교차 편집하면서 사실감을 증폭시킵니다.

희망을 향한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영화 <밀크>는 흑인 인권운동을 이끌다 1968년에 암살당한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킹 목사가 "나에겐 꿈이 있어요"를 외치며 흑인 참정권과 베트남전 반대를 위해 투쟁할 때, 밀크는 "당신은 희망이 되어야 한다"며 편견으로 인해 차별받는 소수자들의 인권을 위해 투쟁합니다. 10년 세월의 간극과 피부색만 다를 뿐, 소수자의 인권과 희망을 역사의 페이지에 써 내려가다 죽임을 당한 두 사람의 삶이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밀크의 당선으로 성소수자들의 근거지는 샌프란시스코 시의회로 바뀝니다. 이즈음 캘리포니아 주 상원의원 존 브리그는 사회 악 '게이'를 뿌리 뽑기 위해 성소수자 교사들을 해임 시킬 수 있는 '게이강제해고' 법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그와 함께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선봉에선 애니타 브라이언트가 주창한 '게이차별금지철폐(Proposition 6, 제안 6호)'가 캔자스에서 가결되고 최대 격전지 캘리포니아에서도 의결될 분위기에 휩싸입니다.

인권 침해와 차별의 상징인 두 법안이 대두하자 밀크 진영은 의견이 양분됩니다. 대부분은 성소수자 이슈를 인권문제로 전환해 느슨하게 대응하자고 합니다. 반면 밀크는 "주민의 90%를 설득하려면 커밍아웃해야 해. 진정한 정치적 파워를 원한다면 변화를 위해 진실을 말해야 한다"며 참모들부터 커밍아웃하도록 권합니다. 뻔히 색안경을 끼고 볼 텐데 그걸 굳이 말해야 하나?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계속 벽장 속에서 숨어 지내야 합니다.

성소수자 권리 제한에 맞서 시청 앞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투쟁에 여러분을 끌어들이고 싶다”며 역설하는 밀크. 그는 집회가 끝나고 존 브리그에게 공개토론을 제안한다. ⓒ 마운틴 픽쳐스

그 와중에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위한 샌프란시스코 '게이권리조례'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밀크는 댄을 제외한 나머지 의원들의 찬성을 이끌어내 가결시킵니다. 예지가 번뜩이는 유연한 전술을 동원하며 자신의 공약을 실현해 내는 이 대목은 밀크가 탁월한 대중정치인으로도 손색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조례 통과를 계기로 일전을 치른 밀크와 댄 간의 갈등의 골은 깊어지기 시작합니다.

한편 밀크의 정면대응으로 동료들이 움직이고, 'No on 6' 캠페인을 들고 가가호호 방문하면서 주민들의 마음까지 움직입니다. 특히 존 브리그와 설전을 벌이는 공개토론 장면은 인상적입니다. "개인의 권력욕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기 바라며, 얼마나 많은 사람을 권력욕으로 파괴할 것이냐"며 밀크는 상대를 압도합니다. 여기에 지미 카터 등 유력 정치인까지 가세한 끝에 실시된 주민투표에서 '제안 6호'는 부결됩니다.

편견과 차별의 벽에서 부딪힌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

이제 영화는 밀크와 댄에게로 앵글을 이동합니다. 아웃사이더와 인사이더, 이슈를 가진 밀크와 가지지 못한 댄은 편견과 차별의 벽을 사이에 두고 더욱 멀어집니다. 밀크는 댄의 아들 세례식에 참석하는 등 동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친구로 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사안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하던 둘은 재선에 대한 불안감으로 갈팡질팡하던 댄이 동료 경찰들을 만난 다음 암살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깁니다.

댄의 재판은 보수와 진보가 충돌하는 장이자 주류 사회의 견고함을 상징합니다. '설탕이 많이 들어간 과자를 계속 먹어 판단력이 훼손돼 정신착란으로 살해했다'는 기막힌 변론이 받아들여지고, 댄은 5년형을 선고받습니다. 분노한 성소수자들은 '하얀 밤의 폭동'으로 불리는 폭동을 일으키지만, 경찰은 단 한 명도 잡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사이더 댄은 복역 2년 뒤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자살합니다.

동성을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냉대와 증오와 학대의 대상으로 전락한 성소수자들에게 자유로운 사랑의 표현은 멀고도 험난합니다.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이들 아웃사이더들에게 행복을 누리기 위한 기본권은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지켜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밀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갑니다. 성 정체성에 대한 자유로운 보장은 사회적 권리와 직결되며, 이것은 곧 평등과 민주주의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밀크>는 기득권과 공권력으로 대변되는 미국 사회의 민주주의의 '두 얼굴'에 대한 저항이며, 민주주의를 향한 소통의 행진으로 읽힙니다. 즉, 단순히 '게이' 인권 영화만이 아니며, 아웃사이더 밀크야말로 진정한 '인사이더' 밀크라는 점입니다. 생전에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를 가장 좋아했던 밀크는 오페라 극장이 내다보이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1800년 이탈리아 로마를 배경으로 공화파와 왕당파 간의 혁명과 반혁명의 피바람이 휘몰아치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 토스카는, 밀크의 삶과 죽음을 예견이라도 하듯이 비극적입니다. 토스카의 아리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의 한 대목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술과 사랑을 위해 살았을 뿐 누구에게도 몹쓸 짓을 한 적이 없는데, 왜 내게 이런 가혹한 벌을 내리시나요.'

다시, 희망을 써내려 간다

사회적 소수자의 벗 밀크가 살해당하자 각계각층 시민들이 카스트로 거리에서 밀크를 추모하는 촛불행진을 벌이고 있다. ⓒ 마운틴 픽쳐스


밀크가 암살당한 날, 카스트로 거리에는 손에 손에 촛불을 든 추모 행렬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영화는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위해 가슴에 간직한 작은 희망의 불씨를 기꺼이 태우고 떠난 밀크가 생전에 녹음해 둔 목소리로 자신을 추모하는 당시의 실제 촛불행진 장면을 감싸 안으며 엔딩 크레딧을 올립니다.

"혹시 내가 암살되거든 다섯, 열, 백, 천 명이 일어나면 좋겠어. 내 뇌를 뚫을 총알이 있다면 그게 닫힌 문을 모두 부수도록. 운동이 계속되길 바라네. 개인적인 이득 때문도 아니고 권력 때문도 아니야. 바로 저 밖의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네. 게이뿐 아니라 흑인과 동양인, 노인들과 장애인을 위한 것이네. '우리들' 말이지. 희망이 없으면 우리를 포기해야 해. 나도 잘 알아, 희망만으로 살 수 없다는 걸. 하지만 희망이 없으면 인생은 살 가치가 없지. 당신도 그렇고 또 당신도. 여러분이 그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줘야하네."

영화 <밀크>의 실제 주인공 하비 버나드 밀크. ⓒ <밀크> 공식 홈페이지

인간다운 삶에 대한 밀크의 신념과 용기는 30년이 지나서야 결실을 맺습니다. 지난해 10월 공화당 소속의 아널드 슈워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가 밀크가 태어난 5월 22일을 '하비 밀크의 날'로 기념하는 법안을 논란 끝에 제정하고, 밀크를 캘리포니아 주 명예의 전당에 헌액합니다.

길고 험난했던 민주화투쟁을 거치면서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 단계에 접어든 줄 알았다가 MB정부의 뒤집기로 민주주의가 역주행하는 한국사회에 <밀크>가 던지는 메시지는 묵직합니다. '희망의 빛'이야말로 한 사회의 진보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행동하는 힘의 원천이 되며, 사람들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진보와 개혁의 네트워크라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평가하지 않을 뿐더러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희망하는데 인색한 한국사회에, 용기와 희망의 메신저 <밀크>는 한 권의 텍스트로 자리매김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희망의 씨앗은, 여전히 우리 주머니에 있으니까요.

덧붙이는 글 시사회 후기입니다. <밀크>는 2월 25일 국내에서 개봉합니다
밀크 구스 반 산트 숀 펜 성소수자 마틴 루터 킹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연재

박호열의 영화로 읽는 세상이야기

추천 연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