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유혹, 본능인가 의지인가

[서평] 에버펠트의 도발적인 서책 <유혹의 역사>

등록 2009.09.10 10:49수정 2009.09.10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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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개봉되어 무려 662만 관객을 불러 모은 영화 <미녀는 괴로워>. 김용화 감독의 영화는 이듬해 한국사회에 성형은 물론 아름다움과 그것을 향한 욕망에 대한 질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영화를 둘러싼 찬반논쟁을 넘어 현대사회가 주목하는 여성미의 본질에 대한 다채로운 인식과 관점을 조명하는 작지 않은 계기를 마련하였다.

도이칠란트 성의학자이자 문화인류학자 에버펠트의 <유혹의 역사>는 여성미에서 출발하여 그것에 담긴 함의를 문화사적으로 풀어낸다. 서책은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장은 여성이 어떻게 남성을 유혹하는가, 남성은 왜 유혹에 빠져드는가를 살핀다. 논지의 핵심이 진화론과 결부한 자웅선택설(sexual selection)에 의지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유혹의 역사>에는 '이브, 그 후의 기록'과 '하이힐과 금발 그리고 립스틱'이란 두 가지 부제가 딸려 있다. 부끄러움을 동반한 자의식을 확보한 최초의 여성 '이브'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 금발 미인도 하이힐과 립스틱으로 남성을 유혹해왔다는 뜻이 담긴 두 번째 부제. 이렇듯 <유혹의 역사>는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면모를 감추지 않는다.

노출과 여성 : 그들은 왜 노출을 감행하는가

한겨울 냉기가 가시고 봄날의 향연이 시작되면 여성들은 신록과 함께 옷치장에 몰두한다. 거리거리마다 청춘이 넘쳐나고 훈훈한 5월은 여름으로 가는 징검다리 노릇을 시작한다. 바야흐로 노출의 계절이 코앞이다. 한겨울에도 예쁘게 하이힐을 신느라 차가운 맨살의 아픔과 추위를 견딘 그녀들은 이제 신나고 당당하게 노출을 감행한다. 왜 그럴까.

"여자는 남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칭찬으로 간주한다. 많은 여성이 자신의 몸매를 훑어보는 눈길을 은근히 즐기는 것도 그 때문이다. 여자는 누군가 자기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느낌으로 안다. 여자는 자신의 뒷모습에 꽂히는 남자의 시선을 즐긴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희롱의 목소리 때문에 곤혹스러워 하지만 시선 자체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33쪽)

에버펠트는 '여자의 핏속에는 노출로 자기를 표현하려는 욕구가 있다'고 확언한다. 그것은 되도록 많은 남자가 자신의 몸을 갈망하기 바라는 여자의 욕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의 근거로 지은이는 성인잡지 편집장의 말을 인용한다. 이를테면 <빌트> 지에서 젖가슴을 드러내는 표지모델을 구하지 못한 경우는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에버펠트는 노출에 담긴 '이중구속'을 설파한다. 모순되는 두 가지 신호를 동시에 보냄으로써 상대방을 구속하는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그것에 따르면 과도한 노출과 그것을 드러내놓고 쳐다보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과감한 노출을 감행하는 여성의 주장은 이렇다. "나를 봐주세요. 하지만 노골적으로 들여다보지는 마세요!" (39쪽)

하이힐과 브래지어 : 아름다움의 탄생

에버펠트는 하이힐의 전신을 베네치아 창녀들이 신었던 '조콜리(zoccoli)'에서 찾는다. 나막신과 유사한 모양의 조콜리는 키를 커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었고, 최대 높이가 46-56센티미터에 이르렀다고 한다. 조콜리는 15세기 이후에는 귀족 여성들에게도 인기를 끌었고, '쇼핀느(chopine)'라는 이름으로 17세기까지 널리 유행했다고 한다. 

발목이 삐고, 인대가 끊어지고, 발이 부러지는 고통 속에서도 여성들의 하이힐 사랑은 숙지지 않는다. 그것은 하이힐이 선사하는 아름다움의 가능성 때문이다. 다리를 길게 보이게 하고, 가슴과 엉덩이의 결함을 보충하는 탁월한 효과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여성의 성적인 매력을 최대한 발산하는 최적의 도구 가운데 하나가 하이힐이라는 주장이다.

아름답고 당당한 가슴을 원하는 여성의 욕망을 충족한 최고 발명품은 브래지어였다.

"가슴을 고정시키고, 확대하고,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준다는 약속을 제시하고, 그것을 실제로 이행한 제품이 브래지어였다. 1889년 발명된 브래지어는 예쁜 가슴을 만들어주는 기적의 상품으로 각인되었고, 그 결과 브래지어 시장은 급속도로 성장했다." (107쪽)

브래지어에 불만족한 여성을 위한 가슴 확대수술은 21세기 들어와 일반화되는 추세다. 오늘날 거리를 활보하는 여성 다섯 사람 가운데 한 사람 가슴은 가짜라고 한다. 2002년 미국여성 23만5000명이 유방 확대수술을 받았는데, 이것은 10년만에 5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수술 받은 여성 가운데 90%가 만족하고 있다니 폭발적인 인기가 놀라운 일도 아니다.

아름다움의 기준 : 여성은 왜 미인을 꿈꾸는가

미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하였다. 서양을 중심으로 살핀다면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완벽한 몸매가 찬사를 받았고, 바로크 시대에는 풍만한 몸매가 주목받았다. 동양 삼국의 미인도를 들여다보아도 확연한 차이가 있다. 중국 미인이 날아갈 듯 가냘프다면, 일본 미인은 자극적인 요염함을 보인다. 반면 조선 미인은 자연미와 건강미를 뽐냈다.

에버펠트가 꼽는 여성미의 기준은 간결하다. 젊고 매끄러운 피부와 좌우대칭을 이루는 신체구조, 적당한 키가 그것이다. "나이든 아름다움에는 매력이 뒤따르지 않는다!"는 쇼펜하우어의 언명을 인용하면서 지은이는 싱싱함과 건강을 미의 전제조건으로 지적한다. 신체의 대칭구조는 아름다움의 필수조건이자 성적인 매력의 배가요인이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왜 여성들은 아름다워지려고 그토록 애쓰는가.

"자신들이 이상형이라 믿는 존재, 즉 패션모델이 부귀영화와 성공, 모든 이들의 감탄과 인정, 각광 받는 삶, 고민 없는 삶을 누린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예쁜 얼굴에 아름다운 몸매를 가지면 세상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을 듯 보인다. 예뻐질 수 있다면 모든 남성이 원하는 여자가 될 수 있다면 어떤 일도 불사하겠다는 것이 여성들의 심리다." (241-242쪽)

이런 논거 위에서 지은이는 "아름다움에 관한 여성들의 면역체계에는 항체가 없다"고 말한다. 나아가 외모와 인상이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지 않다는 말은 거짓이라고 결론짓는다. 이쯤 되면 "아름다운 사람은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생물학자 칼 그라머의 주장이 그다지 생뚱맞게 들리지 않는다. 이런 형편이니 여성들이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본능인가, 의지인가 : 유혹하는 여성과 넘어가는 남성

<유혹의 역사>는 교훈적이다. 머리말에서 지은이는 자신의 생각을 명징하게 밝힌다.

"어떤 형태의 아름다움이든 간에 목적은 동일하다. 여성의 매력을 최대한 강조하여 남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자신을 꾸미고 싶어 하는 여자들의 욕망과 그것에 환호하는 남자들의 취향이 맞아 떨어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훌륭한 자식을 낳아서 잘 키우고 종족을 보존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본능이 숨어 있는 것이다." (11-12쪽)

에버펠트의 논지와 주장에는 '종족보존'을 향한 인간의 본능이 도처에 자리한다. 그녀는 논거를 입증하기 위하여 다윈의 '자웅선택설'을 동원한다. 어째서 인간의 눈에만 흰자위가 두드러지는가, 왜 인간의 머리털만 길게 자라나고, 귓불이 발달하였는가, 동물과 달리 여성의 유방에 엄청나게 많은 지방이 축적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그녀는 묻는다.

"진화과정을 거치는 동안 살아남은 요소는 거추장스럽지 않은 것, 미학적으로 뛰어난 것뿐이다. 가슴도 거기에 속한다. 언제 어떻게 생성되고 발전되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여성의 가슴이 발달한 것도 진화과정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116쪽)

여성이 아름다움으로 남성을 유혹하고, 남성이 여성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종족보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이라는 것이 핵심적인 주장이다. 효과적인 유혹을 위하여 여성은 육체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발달시키거나 돋보이게 하였고, 남성은 그것에 보조를 맞춰왔다는 것이다. 그런 노력의 후예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

글을 맺으면서

<유혹의 역사>에 따르면 요즘 회자되는 '초식남'이나 '철벽녀'는 인간에게 부여된 본능 저편에 있는 별종이다. 연면부절하게 이어진 종족보존 본능을 뒤로하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꿋꿋하게 일상을 영위하는 독특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유혹의 역사>는 흥미롭고 유쾌하게 읽힐 수 있지만, 모든 독자의 공감을 확보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

반면에 서책에는 다채로운 정보가 넘쳐난다. 유럽 여성들이 가슴은 노출하되 20세기까지 다리를 감춰온 모순, 미니스커트와 핫팬티에 얽힌 이야기, 마네킹 변천사, 금발과 갈색머리 및 빨강머리의 차이, 립스틱과 체취에 담겨진 사연, 쿨리지 효과 (Coolidge effect) 등등. 이런 항목은 '화남금녀'의 차이점을 이해하는데 적잖은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덧붙이는 글 | <유혹의 역사>, 잉겔로레 에버펠트 지음, 강희진 옮김, 미래의 창, 2009.


덧붙이는 글 <유혹의 역사>, 잉겔로레 에버펠트 지음, 강희진 옮김, 미래의 창, 2009.

유혹의 역사: 이브, 그 이후의 기록 - 하이힐, 금발, 그리고 립스틱

잉겔로레 에버펠트 지음, 강희진 옮김,
미래의창, 2009


#여성 #하이힐 #자웅선택설 #본능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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