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태종 이방원 165]슬픔에 잠긴 임금님

등록 2007.09.24 11:52수정 2007.09.24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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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화문 창덕궁 정문이다 ⓒ 이정근


성녕대군이 숨을 거두자 태종은 식음을 전폐(輟膳)하고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저자도 철시했다. 예조참판 신상과 공조참판 이적을 호상(護喪)으로 명하고 빈장도감(殯葬都監)을 설치했다.

성녕은 태종과 정비사이의 네 아들 중 인물이 가장 훤칠한 왕자였다. 명나라 사신 황엄으로부터 아버지보다 더 잘생겼다는 칭찬을 듣던 아들이다. 총제 성억의 딸에게 장가를 들었으나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성녕대군의 운구가 돈화문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태종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성녕대군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른 태종은 마음에 병이 생겼다.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과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 정탁·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 김승주·봉녕부원군(奉寧府院君) 이복근·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우의정 한상경, 육조(六曹)의 판서(判書)·참판(參判), 삼군(三軍) 총제(摠制) 등이 예궐하여 수라를 들기를 청했다.

“전하께서 대군이 병에 감염된 후부터 여러 날 심려하였으며 이제 또 슬퍼하여 수척하고 여러 날 동안 철선(輟膳)하였는데 상심하고 탄식하는 마음이야 어찌 이루 다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이 장수하고 요사(夭死)함은 하늘의 정함에 달렸으니 청컨대 대의로써 슬픔을 절제하여 조금이라도 수라를 드소서.”

“나는 대군이 병을 얻은 뒤로부터 여러 날 옷을 벗고 자지 않았다. 지금 유명(幽明)이 길이 막혔으니 비록 수라를 들고자 하더라도 얼굴 모습이 눈에 선하여 잊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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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전 경복궁 정전이다. ⓒ 이정근


신하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수라를 들기 시작한 태종이 지신사 조말생을 불렀다.

“중궁과 더불어 경복궁에 이어(移御)하겠다.”
“이양달에게 길방(吉方)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경복궁은 바로 신방(申方)과 유방(酉方)의 사이에 있으니 바로 길방이라는 서운관 이양달의 해석에 따라 경복궁으로 이어했다. 그래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린 성녕이 뛰어놀던 모습이 환영으로 눈앞에 어른거려 슬픔이 더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방석을 죽였던 무인혁명이 새록새록 생각나 오히려 불편했다.

“옛날에 점치는 자가 말하기를 ‘무년(戊年)에 액(厄)이 있다 하더니 과연 금년도 또한 무년이다. 내가 이 궁전에 거주하니 마음이 실로 평안하지 못하다. 나는 개성유후사로 피방(避方)하고자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태종이 언급한 무년(戊年)이 공연한 얘기만도 아니다. 과거에 급제하여 평범한 관리생활을 하고 있던 이방원이 아버지의 위화도 회군으로 무진년에 정치의 격랑에 휩쓸렸으며 무인년에 혁명의 깃발을 올렸고 무자년에 민무질 민무구 처남을 내쳤으며 무술년 올해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세자와 차세대를 놓고 격정의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싶다. 

옛 사람들은 흉변이 있거나 병이 나면 피방을 생각했다. 환경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환경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이 감히 자연을 거스를 수 없다는 얘기다.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이 일어났고 병이 났다는 믿음이었다. 피방은 소극적인 도피가 아니라 적극적인 방어라 생각했다. 

마음의 고향 개성에서 쉬고 싶다

태종이 한양을 떠나 개성에 유하게 되어도 국정을 멈출 수는 없다. 정부가 2개 작동해야 한다. 하나는 한양에 또 하나는 개성에. 어느 것이 임시 정부인지 모르지만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임금이 심신의 허(虛)함을 보(補)하기 위하여 원하는 일을 반대할 수도 없다. 대언(代言)과 정부·육조에서 모두 찬성했다.

태종은 도총제(都摠制) 박자청을 개성에 보내 경덕궁을 수즙(修葺)하라 이르고 승정원에 전지(傳旨)를 내렸다. 개성은 왕건이 고려를 창건한 이래 개경으로 불렸으나 태종이 한양으로 도읍지를 옮긴 이후 개성으로 내리고 유휴사(留後司)를 두었다.

“내가 옮겨 거둥하고자 하는 것은 나의 애통하고 울울히 맺힌 정(情)을 씻으려는 것이다. 마땅히 서운관으로 하여금 날짜를 골라서 아뢰도록 하라.”

이양달이 길일(吉日)을 택해서 올렸다. 갑자기 조정이 부산해졌다.  배종(陪從) 시위(侍衛)는 대간(臺諫)·형조(刑曹)에서 각각 1명씩으로 하고, 군사는 상호군(上護軍)·대호군(大護軍)·호군(護軍)·내금위(內禁衛)·내시위(內侍衛)·삼군(三軍) 갑사(甲士)로 했다. 각사(各司)에서는 분사(分司)하게 하였다.

태종이 개성으로 떠나던 날. 경복궁에는 문무백관들이 도열했다.

“유도(留都)하는 전함재추(前銜宰樞)들의 개성 문안을 금지한다. 유도하는 대소신료에게 명하노니 업무가 있어 부득이 개성에 출입할 자는 의정부에 나아가 그 연고를 고(告)하고 출입하라. 또한 세자전에 출입하는 것을 금지한다.”

“어리가 세자의 아이를 낳았으니 어찌하면 좋나?” 깊어가는 김한로의 고민

태종이 한양을 떠나면 한양은 왕이 없는 도성이다. 개성에 인사치레 성 문안을 금지하고 불가피하게 업무가 있는 관료는 의정부의 사전 허락을 받고 출입하라는 것이다. 또한 왕이 도성을 비웠다고 세자전에 출입하여 아첨을 떨지 말라는 경고다. 전함재추는 종2품 이상의 한량(閑良)·기로(耆老)들을 말하며 태조 때 40여 명이었으나 태종 때는 70여 명이었다.

“세자는 유도(留都)하여 감국(監國)하는 것이 직책이나 옛날에 구종수와 몰래 불의한 짓을 행하였습니다. 전하께서 엄히 책망하여 허물을 고쳤으나 그 허물을 고친 것이 오래가지 못하였으므로 신은 전날의 마음이 다시 싹틀까 두렵습니다.”

병조판서 김한로가 주청했다. 세자는 한양에 남아 나라를 감독하는 것이 직책이나 말썽을 피울까 염려되니 개성으로 데려가 가까이 두어달라는 부탁이다. 김한로는 세자 양녕대군의 장인이다. 구실은 나라를 내세웠지만 은근히 캥기는 것이 있었다. 어리가 세자의 아이를 자신의 집에서 낳았으니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살아가는 입장이었다.

“세자는 한양에 남아 나라를 감국(監國)하도록 하라.”

한양을 떠난 임금 행차가 개성에 당도했다. 숭산 송악이 시야에 들어왔다. 웅장한 자태가 신령스럽다. 송악은 언제 보아도 신령스러운 산이다. 송악산을 바라보니 마음이 편안했다. 외경스럽기만 하던 송악이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이 다가왔다. 어떠한 잘못을 해도 모두 다 용서해줄 것 같고 아무리 잘못된 결정을 내려도 허(許)하실 것만 같았다.

동북면에서 태어난 태종 이방원에게 개성은 마음의 고향이었다. 어릴 때 학문에 뜻을 두고 열심히 공부했고 과거에 합격하여 조정에 출사했던 고장이다. 어여쁜 색시를 맞이하여 설레는 첫날밤을 맞이했고 첫아들 제(양녕대군)를 얻어 아비가 된 기쁨을 만끽했던 고을이다. 또한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른 것도 이 고장 개성이다. 개성은 인간 이방원에게 ‘첫’이라는 기쁨을 안겨준 고을이다. 만감이 교차했다.
#유휴사 #개성 #김한로 #어리 #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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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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