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의 세자 별, 서쪽으로 떨어지다

[태종 이방원 166 ] 경덕궁의 둥근달

등록 2007.09.27 09:19수정 2007.09.27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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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 둥그런 보름달 ⓒ 이정근


유휴사에 도착한 태종은 밤을 맞이했다. 경덕궁에서 첫날밤이다. 정비(靜妃)를 대동했지만 젊은 후궁을 들일 거라는 예상을 깨고 홀로 처소에 들었다. 밤은 깊어 가건만 잠이 오지 않았다. 문틈 사이로 빛이 스며들어 온다. 교교한 달빛이다. 몸을 일으킨 태종이 뜰로 나섰다. 중천에 둥근달이 걸려있다. 보름을 갓 넘긴 열엿새 날이지만 보름달이나 다름없었다.

“전하 밤바람이 차갑습니다. 옥체를 보존하소서.”


뒤따라 나온 환관이 주억거렸다.

“정비를 뫼시고 나오도록 하라.”

천천히 뜰을 거닐던 태종이 걸음을 멈추며 명했다. 삼경(三更)이 지난 야심한 밤. 머잖아 자시(子時)다. 잠자리에 들어있을 왕비를 뫼셔 오라니 황당했다. 하지만 머뭇거릴 계제가 아니다.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 뛰어야 한다. 환관이 부리나케 뛰었다.

서쪽 하늘로 사라진 유성,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별빛이 쏟아지고 있다. 참으로 오랜만에 바라보는 밤하늘이다. 태종이 하늘을 응시하고 있을 때 동쪽 하늘에서 나타난 유성이 길게 꼬리를 그리며 서쪽 하늘로 사라졌다.


“예사롭지 않는 일이군.”

서운관이 옆에 있으면 무슨 연유인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서운관은 곁에 없다. 예전에 서운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머리에 붉은 기운을 한 유성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행행하면 변고가 있을 징후입니다.’
‘변고가 있을 징후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변고가 있을 이유가 없었다.

“왕실도 평화롭고 나라도 태평하지 않은가? 변고란 당치않은 말이다.”

애써 부정해보았지만 동쪽 하늘에서 나타나 서쪽 하늘로 사라진 유성이 자꾸만 생각났다. 불길한 예감이 밀려온다.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쳐다봤다. 별똥별이 지나간 흔적조차 없다. 지나온 날들을 되짚어 봤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아버지의 밀명을 받들어 포천에 있던 어머니를 모시고 동북면으로 피난 가던 길. 철원의 이름 모를 냇가에서 야영할 때. 그 때도 유성이 떨어졌다. 북쪽에서 나타난 별동별이 짧은 궤적을 그리며 서쪽 하늘로 사라지는 것을 발견한 아버지의 여자 강씨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던 기억이 났다.

그리고 아버지를 향하여 혁명을 깃발을 올리고 광화문 앞에 차막을 치고 밤을 새울 때. 그 때도 유성을 보았다. 북쪽 하늘에서 나타난 별동별이 긴 포물선을 그리며 남쪽 하늘로 사라졌다. 꼬리가 긴 유성이었다. 붉은 기운이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제법 밝은 유성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유성이 나타났을 때는 변고가 있었다. 인간 이방원의 운명에 획을 긋는 변고였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서운관의 말이 거짓이 아닌 참으로 믿어졌다.

“그렇다면 무슨 변고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인가?”

언짢은 생각이 밀려왔다. 하지만 유성이 나타날 때면 좋은 일이 있었다고 자위하고 싶었다.

중전과 별이 빛나는 한 밤의 데이트

“전하 어인 일이시옵니까?”

아닌 밤중에 불려나온 정비가 태종 가까이 이르러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중전이 보고 싶어서 이외다.”
“…….”

중전 민씨의 얼굴이 불그스레해졌다. 중전의 가슴이 소녀의 마음처럼 방망이질 친다. 언제 들어봤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자상한 목소리다. 잃어버린 지아비의 목소리를 찾은 것만 같았다.

반보 앞서가던 태종이 걸음을 멈췄다. 정비의 발걸음도 멈추었다. 뒤돌아선 태종이 정비를 바라보았다. 수척해진 얼굴에 달빛이 내리고 있었다. 사람은 그 사람이로되 옛사람이 아니었다. 탱탱하던 피부는 간데없고 휑한 얼굴이다. 손을 잡았다. 섬섬옥수(纖纖玉手)는 어디가고 앙상하다. 싸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정비의 손을 붙잡고 있는 태종의 뇌리에 장가들던 첫날밤이 아련히 떠올랐다. 두 살 위턱이었지만 여린 모습이었다. 어떻게 할 줄을 몰라 허둥대던 열다섯 살 꼬마 신랑에게 누나와 같이 다정하게 대해주던 새색시. 그 아낙에게 왕비라는 영예를 안겨주었지만 고운 가슴에 피멍을 들게 했던 지난 일들. 돌이켜 보니 지난한 세월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혁명의 격랑에 휩쓸려 젊은 색시를 개경에 팽개치고 어머니가 있는 포천으로 말 달리던 일.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아버지와 대립의 각을 세웠으나 최종결심을 못하고 망설일 때 투구와 갑옷을 챙겨주던 여장부. 피를 나눈 형제를 차례로 내칠 때 눈물과 한숨으로 삭이던 여인. 모두가 강건한 여인이었으나 여자 문제만큼은 강철 같은 모습이었다.

경녕군의 어미 김씨를 가까이 했을 때 핏발선 눈으로 바라보던 여인. 시앗의 몸에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 표독스럽고 몰인정한 행동. 여자문제만큼은 관대하지 못했던 여인. 아니 관대할 수 없는 여성 본연의 여인. 그 틈바구니를 헤집고 많은 여자를 섭렵했던 군왕. 원인 제공을 하고 이해하기만을 기대했던 자신.

이제야 그것이 알고 싶었던 것을 알 것 같았다

이제는 태종 나이 오십 하나. 정비는 두 살 위 오십 셋이다. 자신은 아직 남성이지만 여자(女子)로 태어나 여성(女性)이 되었다가 이제는 여인(女人)의 길로 들어선 정비다. 여자는 여성과 여인의 분기점에서 몸과 마음이 심하게 요동친다는 것을 태종은 몰랐다.

여(女)는 아버지의 딸로 태어나면 여자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애벌레가 고치를 짓고 번데기를 깨고 아름다운 나비가 되듯이 여자가 허물을 벗고 여성이 되고 화려한 몸짓을 하던 여성이 여인으로 변하는 오묘한 섭리를 알 수 없었다.

일단 선택한 상대는 독점하고 싶은 원초적인 본능을 가진 것이 여(女)라는 것을 태종은 예전엔 몰랐다. 그것이 비록 본인의 의사가 존중받지 못하는 사대부 가(家)의 혼인이고 투기라는 굴레로 억압한다 해도 본능은 살아 있다는 것은 더더욱 몰랐다.

그것이 알고 싶었다. 의서(醫書)와 고금의 서적을 속속들이 뒤져 보았지만 어떤 책에도 해답은 없었다. 의약을 공부했다는 어의(御醫)도 한 마디 언급이 없었고 도참(圖讖)의 대가 하륜도 귀뜸 한 마디 없었다. 오십을 넘긴 이 나이에 이제야 조금 알 것 같기도 했다. 목젖을  밀고 올라오던 뜨거운 것이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태종은 정비의 두 손을 힘주어 잡았다. 손목을 맡긴 정비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렸다. 태종의 가슴에서도 뜨거운 것이 치밀고 올라왔다. 임금과 왕비이기 이전에 한 쌍의 남녀였던 이들을 비추는 별빛이 경덕궁 뜨락에 쏟아지고 있었다.
#여성 #여인 #여자 #태종 #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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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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