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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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이었지 싶다. 팔레 데 페스티발 뒤편, 필름마켓을 기웃거리다 김기덕 감독과 맞닥뜨린 것은.

올해 제 58회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개막작으로 영화 <활>이 초청돼 칸을 찾은 김 감독은 그러나 영화제 '밖'을 서성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몇 마디 인사를 나누고 조심스레 인터뷰를 제안하는 기자에게 감독은 손사래를 쳤다. 할 이야기가 없단다.

그러나 그로부터 이틀 후인 15일 저녁, 다시 연락을 한 쪽은 놀랍게도 김 감독이었다. 매몰차게 거절했던 일이 마음에 걸렸다고.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감독은 간간히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다가도 세상을 초월한 듯 먼 시선을 던지기도 했다. 때문에 감독과의 인터뷰는 자칫 선문답으로 흐를 수 있었음을 부정하지 않겠다.

아래 감독과 나눈 대화를 소개한다. 이것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한국영화 아니 어쩌면 세계영화 속의 '이단아'에서 '동지'로서 부단히 화해의 손을 내밀고 있는 김기덕 감독에게 부치는 러브레터임을 고백한다.

"왜 언론인터뷰 거절했냐고? 편견에 답하는 게 지겹다"

- 이번 영화 <활>이 나옴과 동시에 언론과의 인터뷰 거부를 선언했다.
"언어와 이미지 복사가 지나치다. 매번 영화를 할 때마다 내 뒤에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아웃사이더 감독'이라거나 '사회의 쓰레기들을 끌어 모아 영화를 만든다'는 의미 없는 말초적인 질문들이 반복되고 있다. 이런 편견에 답변하는 것이 이제는 지겹다. 지금까지 인터뷰한 것만 챙겨도 백년은 우려먹을 거다. 인터넷에 내 이름을 검색해 보면 죽 나오고 그것만 짜깁기하면 기사 하나 나온다."

 <활> 포스터.
- 반면 칸에서 몇몇 해외언론과의 인터뷰에는 응한 것으로 안다.
"그렇다고 해외언론과 딱히 인터뷰를 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예의라는 게 있지 않나. 내 영화 프랑스 배급을 맡은 프랑스 TV 채널 'TF1'이 만약 내가 인터뷰를 하지 않으면 영화 홍보 자료가 없다고 하고 또 외신기자들이 여기 온 목적이 인터뷰인데 내가 거부하면 각자 편집장들에게 혼나지(웃음). 여기 온 이상 인터뷰를 어느 정도는 소화해야 한다. 내 영화가 초청된 이상 내게도 의무 조항은 있으니까. 앞으로 절대 인터뷰를 안 할 것이라고 확실히 답은 못하겠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은 인터뷰 아닌가?"

- 한국에 <활>이 개봉됐다. 반응 어땠나?
"단관 개봉을 했기 때문에 완전 매진이 돼도 많은 관객이 볼 수는 없다. 다 해봐야 만 명도 안 들기 때문에 그저 그렇다."

- 지난 베를린영화제 때 <활>이 완성되기 전이었는데도 유럽시장에 다 팔렸다고 들었다.
"유럽의 경우 옛날부터 내 영화를 찾던 회사들이 차기작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2월경 촬영은 끝났지만 공개가 되기 전인데도 단지 내가 (영화를) '찍었다'는 이유로 판매가 된 거다. 한 70만 불정도 팔린 것 같다."

"<활>을 '유아 콤플렉스' '유아 집착증'으로 몰고 가면 곤란하다"

- 프랑스의 일간지 <리베라시옹>이 영화 <활>을 혹평한 사실을 알고 있나?
"<리베라시옹>과 <카이에 뒤 시네마>가 내 영화 안 좋아한다는 거 안다. 최근에 <빈집>도 악평했다. 별점 주는 제도 있지 않나. 거기서 <빈집>에 별 하나 준 게 <리베라시옹>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내 영화를 봐 준 것만도 고맙다. 영화가 호평만 받으면 무슨 재미있겠나. 그런데 뭐라고 혹평 했나?"

- '과대평가 된 감독 중의 하나'라고 했다.
"그거 좋은 얘기다. 반대로 보면 과대평가하는 비평이 있다는 말 아닌가."

- 이번 영화 <활>이 다루고 있는 페도필리아(아동성애)적 소재가 불편하다거나 <빈집> <봄 여름…> <섬> 만큼 공허하다는 말도 있었다.
"내 영화를 다 봤다는 얘기니까 내게는 좋은 얘기다. 영화를 보는 시선이나 세상을 보는 관점의 문제이지 내 문제는 아니다."

- 다작 감독이다. 그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나?
"내가 열심히 살아가는 방식이다. 나는 생각이 떠올라서 그것이 쉽게 잊혀지지 않으면 영화화 한다. 살다 보면 잊혀지지 않는 얼굴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이 이미지일 수도 있는데 계속 내 머리 속에 남아있다면 내게 가장 가까이 던져지는 사회적 요구라고 생각한다. 큰 돈이 아니라면 제작비에 대한 고민은 덜 하게 된다."

 영화 <활>의 한 장면.
- <활>의 시작은 무엇이었나?
"나이를 먹으면서 우리 안에 내재된 욕망이라든지 정열, 인간에 대한 애착을 어떻게 소멸시키는 게 아름다운 것인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나도 언젠가는 70대가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욕망이나 정열, 에너지가 멈추는 건 아닐 것이다. 어쩌면 더 많은 것에 욕심이 날 텐데 그것을 소멸시키는 방법을 고민하다 보니 이 영화가 나온 거다."

- 영화 <활> 이야기를 좀더 해 달라.
"활은 악기이자 무기다. 활의 팽팽한 줄은 두 가지의 역할을 한다. 시위를 당겨서 쏘면 팽팽한 줄에 의해 사람이 죽기도 하지만 팽팽한 줄에 현악기처럼 활을 걸면 음악이 나온다.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는 아름다운 악기가 될 수 있는 거다. 이것을 영화 속 할아버지의 욕망으로 보면 저열한 것이지만 사랑으로 보면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다. 모든 세상의 구조는 두 개 이상의 의미로 나뉘는 것이다."

- <사마리아>에서도 그랬고 이번 영화 <활>도 페도필리아에 접근하고 있다.
"나이가 많고 적음에서 나오는 관계를 불륜으로 인식하려 드는 '편견이 그득한 질문'이다.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동갑내기를 사랑해도 그것이 욕망뿐이라면 '더러운' 사랑이 되는 것이고 나이차가 커도 그 안에 진실이 있다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되는 거다. 단정적으로 보지 말아 달라. 도덕적 결론을 내리는 영화가 아니라 '이럴 수도 있지 않겠나'하고 질문하는 영화다. <사마리아>나 <활>을 '유아 콤플렉스', '유아 집착증'으로 몰고 가면 곤란하다. 노인이 소녀를 사랑하는 '본질'의 문제 아닌가.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는 거다."

"내 영화가 '얌전'해진 이유는 세상을 보는 내 시각이 변했기 때문"

 <사마리아>에 이어 <활>에 출연한 한여름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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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마리아>에 이어 이번에도 배우 한여름씨와 작업했는데.
"한여름씨는 어려보이지만 실제로는 머리회전이 빠르고 똑똑하다. 그냥 '영화 하고 싶다' '뜨고 싶다'는 단순한 논리로 접근했다가 많은 배우들이 <사마리아>를 고사했다. 한여름씨는 <사마리아>의 핵심적인 의미를 알아서 연기했다고 생각한다. 이번 <활>도 단순히 '롤리타 콤플렉스'로만 볼 수도 있는데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파악할 만큼 한여름씨는 이해력이 높다. 어려 보이면서도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한여름씨가 적합했다."

- 영화를 거듭할수록 영화가 얌전해진다는 평이 있다.
"<봄 여름…> 이후부터 내가 유순해 졌다고 말을 하는데 내게 그럴 단계가 온 것이다. 내가 사회를 보는 인식이 변하고 그것이 우주적이건 사회적이건 관점이 변한 것이지 내가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 속의 '자아'가 매우 소중하게 인식되다가도 '나'를 버리고 우주적 인간이 소중하다 고 생각할 때도 있듯 늘 우리의 관점은 변화하지 않나."

- 감독이 세계를 보는 눈이 변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그건 잘 모르겠다. 그때그때 바뀌는 것 같다. 첫째는 내가 몸이 아프다는 거다. 매번 위기감과 고통을 많이 느낀다. 딱히 무엇 때문이라기보다는 원인을 찾는 것조차 사실 두렵다. 영화를 찍는 것이 내게는 치료라고 생각한다. 아니 치료라기보다는 더 이상 나빠지지 않도록 현 상황을 유지시키는 수단인 것 같다. 그래서 영화를 빨리 찍는 것일 수도 있다. 영화에 매달림으로써 그나마 견딜 수 있는 것 같다. 바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 몸이 건강했다면 나는 아마 영화 안 찍었을 것이다."

- 영화 <사마리아>로 지난해 베를린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귀국 기자회견에서 '이제는 화해하고 싶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나? 지금까지 한국 영화계에서 감독이 받은 냉대에 대한 투쟁 의지를 접겠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런 말 많이 했다. 사회적 화해라기보다는 내 자신과의 화해다. '내가 아는 나'와 '사회적인 나'의 관계가 화해되기를 원했다. 내게 사회를 불신한 경향이 있었다면 그 오해를 접겠다는 말이 될 수도 있겠다. 개개인을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할까. 실재하지 않는 비난의 대상을 양산해낼 수밖에 없는 사회의 모순이다. 앞으로 질문 세 개만 더 해라. 그 다음은 안 된다(웃음)."

"내 작품 주요인물이 아웃사이더라고? 그런 당신들은 인사이더인가?"

 영화 <빈집>
- 영화 <빈집>에서 배우 이승연씨와 함께 작업했는데 이승연씨가 '성노예피해자'를 소재로 누드집 스캔들에 휘말린 시기였다. 그리고 <빈집>에는 이승연씨가 주인공인 사진이 많이 등장하는데 연관이 있나?
"그런 질문 맘에 안 든다. 나도 이유는 모른다. 우연이거나 상상력 아니겠나."

- <빈집>의 영어 제목이 <3-아이언(Iron)>이다. 3-Iron이 골프 채 중 가장 치기 힘든 채라고 감독은 이미 말한 바 있는데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3-Iron은 가장 치기 힘든 채이기도 하지만 가장 안 치는 채이기도 하다. 골프가 중산층 스포츠로 알려져 있지만 막상 골프채를 가져갈 때 3-Iron을 챙겨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다. '태석(재희 분)'이라는 인물은 그런 의미다. 고급 BMW를 몰고 다니는 태석은 돈이 없는 녀석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집을 전전하는 모습이 3-Iron과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골프장에 따라가지는 못하는 채이지만 누군가는 쓸 것이기 때문에 공장에서 생산이 중단된 것도 아닌 것이 바로 3-Iron이다."

- 감독은 지금까지 소외된 계층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춰왔다. 영화 <빈집>에서 아마도 처음으로 중산층 여성을 다룬 것 같다.
"그런 질문을 하는 당신의 현재 위치는 뭔가. 당신의 생활이나 지적 수준은 아웃사이더인가 인사이더인가? 이것을 가르는 경계선은 또 어디에 있나. 돈이 있어 대학가면 인사이더고 못 가면 아웃사이더, 삶이 뒤틀려서 창녀나 깡패를 하면 아웃사이더고 잘 풀려서 대기업에 들어가면 인사이더인가. 그건 아니다. 한국사회에 설정되어진 '인' '아웃' 개념은 극히 편협해서 그런 질문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한다. 그런 질문으로 '빈부'를 가르고 '우등과 열등'을 가르고 '의식과 무의식'을 가르는 거다. 나는 그 같은 개념의 원리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다."

- 한 대 맞은 것 같다.
"한국은 제도적 학력의 틀을 통과하면 우등하고 지적인 인사이더적 계급을 부여받고 그렇지 않으면 천대받는다. 학력이 밑받침 되지 않았다고 해서 레오스 까락스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데 문제 있는 거 봤나?"

 배우 한여름씨와 김기덕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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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이야기가 아니지 않나. 감독이 지금까지 관심을 가져온 인물을 말하고 있다.
"그런 인물들이 아웃사이더라고 쉽게 판단을 내려 버리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고 싶었다. 내게는 그런 경계선이 없다. 그 같은 질문들로 인해 사회가 끊임없이 나뉘어 지는 거다."

- 작년에 감독은 프랑스 배우 이자벨 위페르와 함께 한국인 입양아를 소재로 한 영화를 계획하고 있다고 말한 일이 있는데 감감무소식이다.
"그것이 내 머리 속에 계속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 생각이 사라진 것은 아니니까 언젠가는 나오지 않겠나. 내 마음 속 어딘가에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다음엔 풍산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북한을 다루는 이야기인데 남한 지형에서 찍어볼까 생각 중이다. 내 영화는 장소가 중요하다."

- 올해 베니스영화제가 남았는데 계획 없나 ?
"베니스 집행위원장이 2년에 한번씩만 오라고 하더라. 그래서 금년엔 가면 안 된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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