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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사건(1942) 당시 함경남도 함흥경찰서, 홍원경찰서로 피검돼 고초를 겪었던 조선어학회 사건 수난동지회 모임에서 기념 촬영한 사진.
사진 촬영 당시 이극로 선생은 북쪽에 있었기에 사진 속엔 없다. 사진 앞줄 왼쪽부터 김윤경, 정세권, 안재홍, 최현배 선생의 얼굴이 보인다.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민세 안재홍 선생은 9번 째 투옥이었다.
▲ 조선어학회 사건 수난동지회 기념사진(1949년 6월) 조선어학회 사건(1942) 당시 함경남도 함흥경찰서, 홍원경찰서로 피검돼 고초를 겪었던 조선어학회 사건 수난동지회 모임에서 기념 촬영한 사진. 사진 촬영 당시 이극로 선생은 북쪽에 있었기에 사진 속엔 없다. 사진 앞줄 왼쪽부터 김윤경, 정세권, 안재홍, 최현배 선생의 얼굴이 보인다.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민세 안재홍 선생은 9번 째 투옥이었다.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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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악질적인 민족운동가들로 인식하였다. 내세우기는 조선어연구와 한글 맞춤법통일안, 조선어사전 편찬 등이었지만, 배경은 조선민족의 독립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예심판사 나까노의 예심종결 결정문 중 기소이유서의 요지를 보면 일제의 의도를 알 수 있다. 

본 건 조선어학회는 대정 8년(1919) 만세소요사건의 실패에 비추어 조선의 독립을 장래에 기약하는 데는 문화운동에 의하여 민족정신의 환기와 실력향상을 급무로 삼아서 대두된 소위 실력양성운동이 그 출발의 봉오리였음에 불구하고, 용두사미에 그쳐서 본령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였더니, 

그 뒤를 받들어 소화 6년(1931) 이래로, 피고인 이극로를 중심으로 하여 문화운동 중 그 기초적 중심이 되는 위에서 말한 바 어문운동의 방법을 취하여 그 이념으로써 지도이념을 삼아 가지고 겉으로 문화운동의 가면을 쓰고 조선독립을 목적한 실력양성단체로서, 본건이 검거되기까지 10여 년이나 오랫동안 조선민족에 대하여 조선의 어문운동을 전개하여 온 것이니,

시종일관 진지하고 변치 않은 그 활동은 조선어문에 쏠리는 조선인심의 기민에 부딪쳐서 깊이 그 마음 속에  파고들어 조선어문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일으키고 여러 해를 거듭해 내려오며, 편협한 민족관념을 북돋아서 민족문화의 향상, 민족의식의 앙양 등 그 기도하는 바 조선독립을 위한 실력신장의 수단을 다하지 아니한 바가 없다. (주석 1)
  
조선어학회 사건 관련 구속자들에 대한 일제 검·경의 조사와 행형의 잔학상에 대해 이희승은, "고문을 당해가며 자백서 쓰기를 강요받았다. 쓰고는 맞고, 맞고는 또 쓰고, 쓰고는 맞고, 맞고는 또 쓰고, 쓰고는 비행기를 타고, 타고는 또 쓰고, 쓰고는 물을 먹고, 먹고는 또  쓰고, 이런 일들은 4개월간 반복하는 것이 피의자들의 일과였다."고 술회하였다. 가히 '인간백정'들의 행태였다.

이희승의 '체험담'을 들어보자.

1943년 12월 들어서 본격적인 문초가 시작되었다. 홍원경찰서에는 '무덕전(武德殿)'이라는 큰 강당이 있었는데 경찰관들이 유도와 검도를 수련하는 곳으로 바닥에는 다다미가 깔려 있었다. 이곳에서 함경남도 경찰부와 홍원경찰서의 고등계 형사들이 연합하여 우리를 문초하였다. 

이들은 감방에서 우리를 한 사람씩 불러내서 조선어학회에서 한 일을 조목조목 들어가며 상세히 자술서를 쓰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맞춤법 통일안 제정, 표준어 사정, 외래어 표기법 통일 등을 적어냈더니 그들은 "이 따위 것을 쓰라고 예까지 데려온 줄 아느냐"며 알맹이 있는 내용을 쓰라고 협박했다. 그래서 좀 고쳐서 써내면 또 찢어발기며 "다시 쓰라"고 강요했고 그렇게 여러차례 고쳐 써도 그들이 고대하는 내용이 눈에 띄지 않자 본격적으로 고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요구하는 진술은 "조선의 독립을 획책하기 위하여 상하이 임시정부 지령에 따라 사전을 만들고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저들의 표현에 의하면 고문에는 육전(陸戰), 해전(海戰), 공전(空戰) 이렇게 세 가지 종류가 있었다. 육전이란 각목이나 목총이나,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집어 아무데나 마구 후려치는 것이다. 목총이 뎅겅뎅겅 부러져 달아나고 머리가 터져 피가 흘러내리는데, 처음 몇 대를 맞을 땐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럽지만 나중에는 별 감각이 없어진다. 그러면 그들은 해전이나 공전으로 들어간다.

길다란 나무 판대기 걸상에 반듯하게 뉘고 묶은 뒤에 커다란 주전자로 콧구멍에 물을 붓는 것이 이른바 해전이다. 콧구멍으로 들어간 물은 기관을 따라 폐부에 스며들고 입으로 들어간 물은 위로 들어가 삽시간에 만삭의 여자처럼 배가 불러진다. 그러면 누구든 기절을 하고 마는데, 저들은 기절한 사람을 감방에다 처넣고 주사를 주고 약을 먹여 정신이 들게 한다. 그러면 공전에 내보낸다. 

두 팔을 뒤로 묶어 팔 사이에 작대기를 지르고는 양쪽 끝에 밧줄로 묶어 천장에 달아맨다. 처음에는 짚단을 발 밑에 괴어주지만 저들이 지어낸 물음에 "모른다"고 대답하면 짚단을 빼버린다. 그러고는 달아낸 두 줄을 마치 그넷줄 꼬듯 한참 꼬았다간 풀어놓는다. 팔이 떨어져나갈 듯한 고통과 심한 어지러움으로 누구든 10분도 못 되어 혀를 빼물고 기절하고 만다. 지금 생각해봐도 치가 떨리며 등골이 오싹한 일이다. 나는 재수없게도 가장 악독하기로 이름난 안정묵의 담당이어서 더욱 혼쭐이 났다. 그때의 담당 형사 중 가장 악독한데다 고문의 명수라고 해서 그는 '사람 백정'이라 불렸다. (주석 2)


주석
1> 김삼웅, <일제는 조선을 얼마나 망쳤을까>, 226쪽, 사람과 사람들, 1998.
2> <한 개의 돌이로다>, 403~40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딸깍발이 선비 이희승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이희승, #이희승평전, #조선어학회사건, #사람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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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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