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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계출생율 0.78의 시대, '둘째' 만나기 참 어렵습니다. 아이 한명 키워보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들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둘째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거기서부터 저출생 해법을 찾아보려 합니다. [편집자말]
한 베이비페어에서 참관객들이 출산 육아 용품들을 살펴보고 있다.
 한 베이비페어에서 참관객들이 출산 육아 용품들을 살펴보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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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아이가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살아야지 했던 생각이 무색하게도 막상 낳아 키워 본 아이는 정말이지 예뻤다. 태어나자마자 나를 홀린 한 인간에게 푹 빠져 지냈던 4년의 시간이었다(자기 전에 엄마가 제일 예뻐, 라고 말해주는 아이에게 누군들 빠지지 않겠는가!). 누군가의 시작과 성장을 매일 곁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실로 형언하기 어려운 축복임을 그제야 알았다. 다시 겪어도 새롭고 기쁨일 것 같은 과정이었다. 게다가 아이를 생각한다면 혼자보다는 둘이 좋을 것 같아 공원이나 어린이집에서 마주치는 형제, 남매들을 유심히 보던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내 인생에 둘째는 없을 것이다. 아이 둘을 '홀로' 키울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남편이 있고, 비상시에 아이를 부탁해볼 수 있는 '엄마 찬스'도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아이를 돌보는 일상 중간 중간 혼자라고 느낀다.

아이와 함께 생긴 부부 관계의 틈

육아는 자연스럽게 나의 몫이 되었다. 나는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었던 반면, 남편의 일은 주중과 주말을 가리지 않았고 퇴근시간도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육아 불균형이 시작되더니 휴직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육아 4년 차에 들어서서는 아이의 식사 준비, 아이에게 필요한 물품을 확인하고 구매하기, 주말에 아이와 놀아주기, 아이옷 세탁, 교육, 아이의 목욕, 잠자리 준비, 병원 동행, 아이의 어린이집과 관련된 모든 일을 도맡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모든 과정에서 남편이 참여할 때는 내가 부재할 때뿐이다. 나와 남편이 모두 상황이 여의치 않은 경우, 다른 누군가에게 부탁하고 일정을 조율해서 보육의 공백이 없도록 만들어 내야 하는 것도 나의 몫이었다. 누군가 돌보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고 생각해왔는데 돌봄노동은 빠르게 나의 정체성이 되어 버렸다.

싱글맘들에게 실례인 줄 알면서도 이 정도면 싱글맘 같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알게 모르게 남편에 대한 불만과 피해의식이 쌓여가고 마음 속 남편의 지분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남편 따위'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아이를 돌보는 일상을 문제없이 수행하는 것 만으로도 에너지가 부족했다. 아이에게는 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하다가도 남편에게는 짜증이 한껏 묻은 어투가 나왔다. 남편은 남편대로 서운해하고 나의 신경질에 같이 신경이 날카로워져 갔다. 나름대로 '가장의 무게'를 느끼며 잘 살아보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일 텐데 집에서 하찮은 대우를 받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렇지만 이해한다고 할 말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조선시대도 아니고, 아니 조선시대에는 대가족이란 울타리라도 있었지 지금은 완전한 독박육아에 임금노동까지. 해도 해도 너무 한 거 아니냔 말이다. 무언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는 신기할 정도로 오랜 시간 갈등이나 권태 없이 지내오던 커플이었다. 서로가 신기해할 정도였다. 참 잘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런 사이가 육아로 인해 뒤집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런데 주위를 살펴보면 이건 우리 집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21세기에도 육아는 여전히 여성의 몫

A는 대기업에서 임원 비서를 지냈다. 안정적인 일자리였고 회사 내에서 인정도 받고 있었다. 결혼하면서 직장을 그만두어 현재는 '전업맘'으로 아이와 가사를 돌보며 지내고 있다. 외부적인 경제활동 없이 지내는 게 혹시 불편할 때는 없느냐는 나의 질문에 A는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데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아이의 옷을 구매하는 것으로 푼다고 답했다.

공공부문에 종사하는 B는 육아휴직 이후 직장에 복귀한 다음에도 육아를 전담하고 있다. 남편은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다. 아이와 함께 하는 삶은 생각보다 즐겁지만 그렇다고 힘이 들지 않는 건 아니다. 남편이 "그래도 너는 육아하는 게 즐겁지 않느냐"라고 말할 때 정말 열이 받는다고 한다.

C와 남편은 수입이나 일에 대한 욕심이 비슷했다. 첫째 아이까지는 사람을 고용하며 육아와 직장을 병행했지만 둘째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을 했다. 남편은 새벽에 출근하여 밤에 귀가하는 직종에 종사 중이라 그나마 휴직이 가능한 사람이 C였다. 차분하고 침착한 성향의 C는 요즘 아이들을 향해 고함을 지르는 게 일상이다.

D는 전공을 바꾸어 뒤늦게 시작한 대학원을 다니며 아이를 낳았고, 현재는 석사를 마친 후 전업으로 아이를 돌보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커리어를 이어나가고 싶지만 한번씩 아이가 크게 아프거나 하는 일이 생기면 계획에 차질이 생겨 지지부진한 상태다. 계획대로 커리어를 쌓고 있는 동료들을 볼 때면 자신의 처지가 답답하고 조급한 마음이 든다.

시대가 변하여 남성들이 이전보다 가사와 육아에 많이 참여하고 있다고 하지만, 여전히 내 주위의 여성들은 육아휴직을 하거나 일을 그만두는 형식으로 육아를 전담하고 있다. 직장에 다니는 경우에도 여성이 육아의 총괄 디렉터 역할을 맡기 일쑤다. 이들은 모두 다른 가정환경과 학력, 성향, 삶의 지향 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박육아의 고충과 남편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지점에서 약속이나 한 듯 만나고 있었다. 이들의 배우자들은 과중하거나 불규칙한 바깥 노동을 이유로 가사나 육아에 거의 참여하고 있지 않거나 못했다. 

삶은 육아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우리 부부의 삶은 육아 전후로 나뉜다.
 우리 부부의 삶은 육아 전후로 나뉜다.
ⓒ elements.enva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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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자 중 누군가 한 명은 일을 그만두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홀로 육아를 전담하도록 만드는 데에는 대한민국의 장시간 노동, 직장 내 미흡한 제도와 같은 노동환경이 큰 몫을 한다. 임신 중 읽었던 프랑스식 육아서를 보다가 발견한 중요한 사실이 있다. 자유로우면서도 예의바른 아이를 만드는 프랑스식 육아는 부부 중심의 가정생활을 지향하는데, 이것의 대전제가 바로 배우자 간 가사와 육아의 동등한 분배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일과 가정 사이의 균형을 보장하는 노동환경이다.

대한민국에서 직장을 다니며 아이를 키우는 여성으로서, 나는 만성적 시간 부족과 피로에 시달린다. 복직 후 점심시간은 나의 일과 중 유일한 자유시간이 되었다. 저녁 7시경 아이를 하원시킨 후 저녁을 차려 먹고 부모와의 시간이 필요한 아이가 요구하는 것들 하다 보면 잘 시간이 금세 찾아온다. 아이가 잠들면 하고 싶은 일을 해야지, 라고 마음을 먹지만 매번 아이와 같이 잠들기 일쑤다. 때문에 병원진료나 개인적 공부는 모두 점심시간에 몰아서 해야 한다.

체력은 날로 떨어져 알람소리에도 깨지 못하는 일들이 발생하고 어떤 영양제로도 피로가 가시지 않아 이제는 그냥 피로가 나이고 내가 피로인 것만 같다. 남편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바깥에서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돌아오면 집에서는 자신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가사노동이 있다. 남편은 요즘 코피가 잦다. 둘 다 휴식이 시급한 상황이다.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긴 게 아닌가 싶다.

요즘에는 아이와 함께 하는 삶은 '소수자 체험'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스스로가 사회의 주변부에 위치한다는 생각을 거의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여성이긴 했지만 적어도 제도적 차별은 종식되었다 생각했다. 아이를 낳고 키우며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해야 했다. 여러 방식의 차별, 심지어 제도적으로도 차별은 존재한다.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육아휴직이나 육아기 단축근무를 '신청'한 사람에 한하여 육아 관련 제도를 허용하는 것부터 그러하다. 현행 방식대로라면 제도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여러 가지 이유로 쓰지 못하는 사람들(특히 남성들)이 생기게 마련이고, 여러 부문에 걸쳐 성별 격차가 필연적으로 발생할 것이다. 아이가 있는 모든 직원들이 관련 제도를 사용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제도를 사용하는 직원들은 괜히 눈치가 보이고 주눅이 들기도 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성과평가기간이었는데 인사과에서 전화가 왔다. 휴직한 적이 있는지, 그 기간이 언제부터 언제였는지를 직접 확인하고자 걸려 온 전화였다. 지난번 승진순위를 매길 때 휴직여부가 고려되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던 터였다. 만약 나의 불길한 예감대로 휴직의 여부 및 휴직기간이 직원의 성과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비공식적인 요소로라도 고려된다면, (다른 조건이 같다는 전체 하에)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낮은 점수를 받게 될 뻔하다. 여전히 육아휴직에 있어 성별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게 현실이라면 가정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직장 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며 정책결정자의 자리까지 올라갈 확률이 높아질 것이고, 출산과 육아의 당사자들은 정책결정과정에서 점점 배제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를 키우는 여성 직원들은 마치 회사에 존재하지 않는 듯 수동적이고 방어적으로 회사를 다니거나, 무척 초조해하며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엄마라는 타이틀이 커리어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아이가 없는 척을 하게 된다. 버젓이 존재하는 아이의 존재를 없는 존재 취급하려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핵심은 균형을 사수하는 것

무엇이든 지속이 가능하려면 균형이 중요하다. 노동환경과 조직문화가, 그리고 국가가 지속가능하려면 노동과 여가의 균형, 일과 가정의 균형이 지켜져야 한다. 야근을 자주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긴 것으로 판단하여 매니저가 상담 요청을 한다는 어느 북유럽국가의 사례가 떠오른다.

'가정이 없는' 직원들의 사생활은 상대적으로 '동원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인식도 균형에 대한 인식이 부재해서 생기는 일이다. 가정이 있든 없든, 아이가 있든 없든 '균형'은 지켜져야 한다. 한 사회가 얼마나 살기 좋은지를 평가할 때 아이친화성 및 여성친화성이 주요 지표가 되는 것처럼 출산·육아친화적 기업은 결국 모든 노동자들에게 노동하기 좋은 곳이라 믿는다. 

저출생은 앞으로 닥칠 혹은 벌써 닥쳐버린 문제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대한민국이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문제의 결과이기도 하다. 저출생으로 인한 연금고갈이나 경제활동인구의 감소, 이에 따른 경기침체를 우려하는 관점에 비해 우리 사회의 어떠한 문제들이 저출생으로 이어졌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부재한 것이 현재 우리가 당면한 진짜 과제다. 이는 아이가 있든 없든 대한민국에서 노동을 하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논의가 시급하고 심각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한 둘째는커녕 첫째도 없을 것이고, 대한민국은 저출생으로 소멸해도 마땅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땅땅땅!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 실릴 예정입니다.
http://www.brunch.co.kr/ameliechoi


태그:#저출생대책, #국가소멸, #독박육아, #과로, #노동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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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다닌 지 10년, 아이를 키운 지는 3년이 되었고요, 이제 막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와 더불어 살기 좋은 세상에 대해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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