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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 구립 서강도서관 연말 프로그램 <누구라도 괜찮아, 열 번째 낭독회>에 참여했다. '한 걸음 더 성숙된 내딛음, 나이 듦'이란 주제 맞게 낭독 글을 준비해야 했다.

주제가 '나이 듦'이라고 해 내가 쓴 책 <나이 들면 즐거운 일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에서 발췌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올해 나에게 가장 마음에 남았던 책의 '한 장면'에 양보했다. 좋은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공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책은 핍 윌리엄스의 소설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이다. 1800년대 말 영국, 꼬마 에즈미는 어릴 적 어머니를 잃었다. 그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 편집자인 아버지의 직장에 따라가 종일 단어 카드를 가지고 놀면서 자란다.

놀랍게도 압도적인 성별 편향... 버려지던 여성의 단어들
 
올해 나에게 가장 마음의 울림을 준 책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책표지
 올해 나에게 가장 마음의 울림을 준 책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책표지
ⓒ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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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즈미는 커갈수록 사전 편집자들이 모두 남성이며, 사전에서 밀려난 단어는 대부분 여성의 단어임을 깨닫는다. 사전에 등재되는 단어에는 적절한 예문이 따라야 하는데, 당시까지 출간된 영국 책의 작가는 거의 남성이었다. 따라서 적절한 예문이 없는 여성의 단어는 버려졌다.

남성적 시각에서 만들어진 단어 또한 많았다. 영어 단어라 깊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우리말 중 '학부형'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학부형(學父兄), 명사. 예전에 학생의 아버지나 형이라는 뜻으로, 학생의 보호자를 이르던 말.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자주 듣던 단어다. 단어의 정의에 따르면, 어머니는 보호자로 나설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가 학교에서 아프거나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뛰어가는 보호자는 대개 어머니일 텐데, 왜인지 여성은 배제되었다.

그랬던 이 단어는 현재 '학부모'로 바뀌어 사용되고 있다. 올해 '유모차'와 '유아차' 논쟁으로 시끄러웠는데, 시간이 흐르면 유모차 또한 잘못된 단어의 예가 되지 않을까 싶다. 지금 '학부모'가 아닌 '학부형'이 맞는다고 하는 이가 거의 없듯이 말이다.
 
 한 베이비페어에서 참관객들이 출산 육아 용품들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
  한 베이비페어에서 참관객들이 출산 육아 용품들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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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된 에즈미는 평범한 사람들이 모이는 시장이나 극장에 나가 여성의 단어를 직접 채집하기 시작한다. 여성 인권에 눈을 뜨게 되면서, 영국 여성 참정권 운동(서프러제트)에도 참여하게 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여성들의 단단한 우정과 계급을 초월한 사랑 또한 아름답다.

그중에서도 나의 마음을 사로잡은 한 장면은 어린 에즈미와 그를 돌보는 젊은 하녀 리지의 대화이다. 에즈미는 리지가 고된 하녀의 일을 마치고도 밤이면 졸음을 쫓으면서 자수를 놓는 이유가 궁금해 묻는다.

리지는 청소, 요리, 세탁, 불피우기…… 자기가 종일 하는 집안일은 누군가에 입으로 들어가거나, 더러워지거나, 타버려서 모두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다고 말한다. 하루가 끝날 때면 자신이 여기 있었다는 증거가 하나도 남지 않지만, 자수는 영원히 남아서 내가 존재한다는 걸 증명해준다고 답한다.
 
"제가 놓은 자수는 언제나 여기 있을 거예요." 리지가 말했다. "이걸 보면 왠지…… 글쎄, 단어를 모르겠네요. 제가 언제나 여기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Permanent, 영속적인." 내가 말했다.

"그럼 나머지 시간들에는 기분이 어때?"
"불어오는 바람 바로 앞에 놓인 민들레꽃이 된 것 같죠."
(책 63쪽)

자잘한 집안일을 하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가버리는데,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낸 듯한 허무함. 주부인 나는 리지의 이야기에 감탄하며 공감했다. 그렇다면 그의 '자수 놓기'가 나에게도 있을까? 있다면 어떤 것일까?

나에겐 '글쓰기'가 아닐까 싶었다. '쓴다는 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걸 증명해준다. 올해 출판 계획이 어그러지면서 슬럼프가 왔던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어떤 글이든지 그 시간에 내가 존재했다는 기록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깨달음을 주었다. 원고료, 출판 등 경제적 대가가 있는 글만 의미 있지는 않다고, 일상의 소소한 기록에도 너의 존재 가치가 새겨져 있다고 따뜻하게 등을 어루만져주는 듯했다.

시간이라는 옷감에 좋아하는 무늬 새기기  

취미로 배우는 하와이 춤 훌라 수업에 다녀와서 짧게라도 메모했다. 언제나 수첩을 들춰보면 그 시간으로 돌아가는 듯하다(관련 기사: 누가 알았겠어요, 50대에 튜브톱을 입을지 https://omn.kr/26vtg ).

기록하지 않았다면 불어오는 바람에 흩어지는 민들레 홀씨처럼 사라졌을 생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도서관 동아리에서 만드는 팟캐스트 <도서관에서 수다 떨기>도 더 열심히 참여했다. '말하기'의 기록은 리지의 자수처럼 영원히 디지털로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포 구립 서강도서관 <누구라도 괜찮아, 열 번째 낭독회>가 안희연 시인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마포 구립 서강도서관 <누구라도 괜찮아, 열 번째 낭독회>가 안희연 시인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 마포 구립 서강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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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기만의 '자수'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림이나 뜨개질일 수도, 악기나 운동일 수도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시시하거나 시간 낭비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고, 내 존재를 생생히 느낀다면 그것만으로도 내 삶을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한정된 시간의 옷감을 선물 받았습니다. 우리가 그 옷감에 내가 좋아하는 '나만의 자수'를 놓아간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나이 듦'이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날 낭독회에서, 나는 이렇게 말을 맺으며 책장을 덮고 일어났다.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핍 윌리엄스 (지은이), 서제인 (옮긴이), 엘리(2021)


책을 통해 책 너머의 세상을 봅니다.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 3기입니다.
태그:#잃어버린단어들의사전, #엘리, #나이듦, #유모차, #유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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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으로 세상의 나뭇가지를 물어와 글쓰기로 중년의 빈 둥지를 채워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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