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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교실. 정규 수업 시간에는 학생이 있다가 방과후수업 시간에는 이처럼 텅 빈다.
 텅 빈 교실. 정규 수업 시간에는 학생이 있다가 방과후수업 시간에는 이처럼 텅 빈다.
ⓒ 이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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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교육부가 수능 킬러 문항을 공개했다. 교육부가 공개한 킬러 문항이 정녕 킬러 문항이라 할 수 있을지에 대해 갑론을박이 뒤따르고 있다. 교육부에서 발표한 킬러 문항의 근거가 모호하여 갑론을박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을 듯하다.

또 교육부 장관은 EBS 수능 강사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괴물 같은 킬러 문항을 제거해서 공교육 내에서 열심히 한 학생들이 점수를 잘 받을 수 있게 평가의 본질로 돌아가자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말을 통해 교육부 장관은, 킬러 문항을 제거하면 학생들이 사교육을 받지 않고도 점수를 잘 받을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사교육의 영향력을 현저하게 축소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킬러 문항을 제거한다고 학생들이 사교육을 받지 않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나라 전체의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으니, 내가 근무하고 있는 지역의 사례를 통해 이야기해 보자. 나는 지방 소도시의 일반계 공립 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다. 35년 교직 생활 동안, 딱 2년을 제외하고 줄곧 비평준화 지역이었다가 3년 전에 고교 평준화가 시행되었다. 일반계 고등학교는 총 여섯 개. 공립 4개교, 사립 2개교이다.

우리 지역의 경우, 수능 성적이 등락을 좌우하는 정시 전형을 통해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으로 진학하는 학생들이 매우 드물다. 드물기는 하지만, 있기는 있다. 그런 학생들은 수능 성적을 잘 받기 위해 당연히 사교육을 받는다. 우리 지역 내 고등학교의 수능 대비 프로그램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인데 킬러 문항 1~2개 없앤다고, 학생들이 사교육을 끊겠는가.

수능에서 실수하지 않고 만점을 맞기 위해서라도 사교육을 더 받을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야당에서 주장하는 대로, 교육계가 일대 혼란에 빠지지는 않았으나 수능을 얼마 안 남기고 수능이 변할 수 있다는 신호를 주어 수험생들의 불안감을 가중시키고 말았다.

정시 전형을 통해 상위권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지 않더라도 많은 학생들이 사교육을 받고 있다. 바로 고등학교 내신성적을 잘 받기 위해서이다. 내신성적은 대입 수시 학생부교과전형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내신 등급 1.00에 수렴하는 성적을 받으면 학생부교과전형으로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에 진학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이런 경우 대부분은 각 대학에서 설정한 수능 최저 등급을 충족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학생들은 사교육을 끊을 수 없게 된다.

우리 지역 내 학생들이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는 가장 주된 통로는 바로 대입 수시 학생부종합전형이다. 내신성적과 학교생활기록부의 기록 그리고 면접을 통해서 선발한다. 수능과 관련이 없는 전형이다. 그래서 우리 지역 내 학생들이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으로 진학하려고 할 때, 주 타깃으로 삼는다.

우리 지역 내 학생들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할 때, 사교육의 영향을 가장 덜 받는 전형이 학생부종합전형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지역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없기에 우리 지역 내 학생들을 기준으로 판단할 때, 라는 단서를 붙였지만 전국으로 확대해서 판단하더라도 아마 그러리라 짐작한다.

물론 학생부종합전형에서도 내신성적과 면접을 반영하니, 이 부분을 위해 사교육을 받을 터이다. 그러나 학생부종합전형의 가장 강력한 전형 요소라 할 수 있는 학교생활기록부의 기록과 관련해서는 사교육이 영향을 끼칠 부분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학생부종합전형이 도입된 초기에는 수상 실적, 봉사활동 실적, 자기소개서 쓰기, 독서활동 등을 전형에 반영하여 사교육을 유발하였다. 지금은 이런 부분이 전형 요소에서 제외되었다. 현재 학생부종합전형의 핵심 전형 요소는 과목별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 창의적 체험활동(자율활동, 진로활동, 동아리활동) 특기사항,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 등이다.

과목별 세부능력 및 특기사항은 학생참여형 수업과 수업과 연계된 수행평가 등에서 관찰한 내용을 교과 담당 교사가 기록한다. 자율활동과 진로활동은 활동 내용을 관찰한 담임교사가, 동아리활동은 동아리 담당 교사가 기록한다. 또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은 1년 동안 학생의 학교생활을 관찰한 다음 담임교사가 기록한다. 모두 학교 내에서 이루어지는 활동만을 관찰하여 기록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교육이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게 된다.

'킬러 문항' 사태가 공교육 정상화 논의의 시작이 되길 

대통령과 교육부 장관이 수능 킬러 문항 핀셋 제거를 통해 사교육비를 경감하고 사교육 이권 카르텔을 일소하겠다는 취지의 말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수능 킬러 문항 제거를 통해서 사교육의 영향력을 축소하기 매우 어렵다.

수능이 상대평가 기조를 유지하는 한, 학생들은 수능에서 조금이라도 앞자리를 차지하게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수능과 관련하여 사교육의 영향력을 줄이는 방법은 어찌 보면 매우 간단하다. 수능을 자격고사로 바꾸거나 아예 수능을 없애면 된다.

또 많은 학생들이 고등학교 내신성적을 위해, 대입 면접을 위해, 대입 논술을 위해 사교육을 왕성하게 받고 있다. 이런 요소들을 대입 전형에서 없애거나 반영 비율을 현저히 낮추어 버리면 사교육 문제는 상당 부분 해소되리가 믿는다.

만약 이렇게 되면, 대입 전형에서 사교육의 영향력이 최소화된 학생부종합전형만 남는다. 그러면 학생부종합전형은 문제가 없는가? 있다. 대학이 학생들을 어떤 기준으로 선발하는지 도저히 알 도리가 없다고들 한다. 주변 동료 교사들에게도 가끔 듣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교육 당국이 진정으로 사교육을 없앨 생각과 의지가 있다면, 학생부종합전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각 대학에서도 나름의 학생부종합전형 기준을 제시하고 각종 입시 설명회를 통해 고등학교에 설명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또한 학생부종합전형이 제대로 정착하면, 우리나라 일반계 고등학교의 교육이 정상화되는 데 일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대통령과 교육부가 촉발한 수능 킬러 문항 사태가 우리나라 공교육 정상화 논의의 단초가 되기를 희망한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 스토리에도 실립니다.


태그:#수능, #킬러 문항, #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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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넘게 교사로 재직 중. 2년을 제외하고 고등학교에서 근무. 교사들이 수업에만 전념할 수 있는 학교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 있음. 과연 그런 날이 올 수 있을지 몹시 궁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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