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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진정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제주는 오름의 섬인데 키아오라 바로 뒷산이 대수산봉이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수산봉수'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수산봉수의 제주살이'는 제주학을 배경으로 내 일상에 사회적 발언을 실어 보내는 글이다.[기자말]
성산포 위판장 한 켠에서 노점상을 하는 고숙자(83) 씨는 핵오염수 바다 투기로 평생직장을 어떻게 유지할지 걱정이다.
▲ 노점상의 시름 성산포 위판장 한 켠에서 노점상을 하는 고숙자(83) 씨는 핵오염수 바다 투기로 평생직장을 어떻게 유지할지 걱정이다.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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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는 13일 새벽 6시에 시작됐다. 해 뜨기 전까지 근해에서 고기를 잡은 어선이 속속 들어오고 경매가 이루어지는, 일출봉 아래 성산포 위판장. 그 시각 그곳에 가서 핵오염수 투기에 관한 어민들의 진정한 목소리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 한국연안어업인중앙연합회가 오염수 방류 저지에 앞장서온 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명예교수를 고발한 건도 의아했다.

어선에서 생선을 받아 주민과 관광객에게 파는 노점상은 어업 종사자 중에서도 가장 영세한 축에 든다. 그러나 위판장 한 켠에서 노점상을 하는 고숙자(83)씨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럴 만큼 판매량이 많았기 때문이다. 서균렬 교수 고발 뉴스는 본 적이 없다면서도 고발 이유를 알려주자 분개하다가 말을 잘 잇지 못했다.

"우리가 먹고사는 바당(바다)에 오염수를 버린다니! 우리도 고기도 다 죽게 생겼네. 이래 봬도 이걸로 자식 교육 다 시켰어요. 직장 그만둔 딸한테 이 좌판자리를 물려줄 생각이었는데…"

제주도민이 '일치단결'하는 이유
 
농어민들이 성산포 부두에서 트랙터 등 차량 50여대가 집결한 가운데 범도민대회 차량시위 발대식을 하고 있다.
▲ 차량시위 발대식 농어민들이 성산포 부두에서 트랙터 등 차량 50여대가 집결한 가운데 범도민대회 차량시위 발대식을 하고 있다.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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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집회와 시위는 육지와 너무나 달랐다. '초짜기자' 때부터 수많은 집회와 시위를 취재해봤지만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일본 핵오염수 해양투기 저지 제주 범도민대회'를 취재하기 위해 이날 오전 10시 성산포에서 발대식을 열고 출발한 차량시위부터 오후 4시 제주시 일본총영사관 맞은 편 노형오거리에서 끝난 본대회까지 지켜본 소감이다.

오전 10시가 가까워오자 인근 지역에서 트랙터와 트럭 등 차량 50여 대가 몰려들었다. 그런데 바다를 지키려는 대회에 해녀연합회, 어촌계장협의회, 수산업중도매인연합회 같은 어업인 단체뿐 아니라 전국농민회, 유기농협회, 임업후계자협회, 한라봉연합회의 제주 지부와 지회 등 50여개 단체가 차량에 현수막을 걸고 나타난 이유가 뭐지? 발대식 진행자도 전국농민회제주도연맹 채호진 사무처장이었다. 대회가 끝난 뒤 채 처장에게 전화했다.

"제주는 어업과 농업 종사자가 구분이 안 되는 뎁니다. 어민도 밀감밭 한 뙈기쯤은 가진 이가 많고요. 해녀는 바당일을 하다가 밭일도 해야 합니다. 예전부터 그래야 살아남는 곳이었으니까요. 수협도 어민 없으면 어떻게 존재합니까? 경찰도 굉장히 호의적이에요. 다들 농어민가족이니까요. 시위대를 함부로 못 대하죠. 뉘 집 아들딸인지 금방 소문 나는데…"

수협은 대정부 관계를 고려해 참여단체 명단에는 빠졌지만 지역 수협들이 버스를 대줬다. 경찰은 동서 두 방향 차량시위대가 성산포에서 일주동로, 안덕계곡에서 일주서로를 따라 제주시 노형오거리로 집결하는 전 구간을 에스코트해줬다. 불법행위를 적발하는 채증반이 나와 있었지만 시위대를 촬영할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괸당문화'와 '수눌음'의 집회 동력
 
일본 핵오염수 해양투기 저지 범도민대회가 제주시 노형오거리에서 열리고 있다. 가운데 푸른 색 유리창 건물이 일본총영사관이다.
▲ 핵오염수 저지 대회 일본 핵오염수 해양투기 저지 범도민대회가 제주시 노형오거리에서 열리고 있다. 가운데 푸른 색 유리창 건물이 일본총영사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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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이런 풍토는 일단 '괸당문화'로 설명된다. 혈연과 지연으로 뭉친 섬 지역 특유의 정서인데, 몽골과 고려 등 외세의 침략, 4.3학살 등을 겪으면서 그런 도민의식은 더 굳어졌다.

'삼촌'이라는 호칭도 그렇다. 제주4.3을 처음 부각한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을 읽기 전에는, 나도 그랬지만, 주인공이 남자인 줄 아는 이가 많다. 그런데 제주에서는 잘 아는 사람인데 자신보다 나이가 꽤 더 들었으면 남녀 구분없이 붙이는 통칭이다.

'수눌음'은 '품앗이'를 뜻하는 제주어인데, 육지에는 그런 전통이 거의 사라졌지만 제주에는 강하게 남아있다. 바당일이나 농사일이 바쁠 때는 물론이고 장례 같은 큰일을 치를 때도 서로 '수눌음'을 주고받는다.

제주민이 자기 이해관계가 직접 걸리지 않은 사회현안에도 동조시위에 나서는 이유다. '섬의 섬'인 가파도 등에서도 시위에 참여했다고 한다. 차량시위대가 중도에 조천읍 등 큰 동네를 지날 때 차량들이 가세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집회 시작 30분 전 도의회 기자실에서 국민의힘 도의원 12명이 '일본 정부의 원전 오염수 해양방류 반대' 의사를 밝힌 것도 그런 제주 분위기를 거스를 수 없었기 때문인 듯하다.

일본에서도 못 믿는 걸 우리더러 믿으라고?
 
1,000명 넘는 농수축산업 종사자 등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범도민대회 참가자 1,000명 넘는 농수축산업 종사자 등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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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오거리는 제주시에서 이마트와 롯데마트가 있는 가장 활기찬 거리일 뿐 아니라 일본총영사관까지 있어 이번 집회장소로는 최적지다. 총영사관에서 100m 떨어진 곳에 집결한 농수축산업 종사자는 저마다 '저지! 핵오염수 해양투기, 사수! 국민생명권' 같은 구호를 적은 피켓을 들어올리며 목청을 높였다.

제주 범도민대회는 결의문에서 "일본 내부에서조차 신뢰를 받지 못하는 후쿠시마 핵오염수 안정성이 타국에서 신뢰받는다는 것 자체가 애초에 무리였다"면서 "정부와 국민의힘은 핵오염수에 대한 공포와 불안, 우려를 괴담에 기인한다며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포장하기 바쁘다"고 지적했다.

결의문은 또 "(핵오염수가) 정말 안전하고 믿을 수 있다면 자국 내에서 처리하면 되지 왜 먼바다로 흘려보내려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며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핵오염수 해양투기를 포기하고 자국 내에 보관하라"고 촉구했다.

결의문은 이어 "윤석열 정부는 해양투기를 단호하게 반대하고 국제해양법 재판소에 제소하고, 오영훈 도정은 정부의 미온적인 대응에 강력히 항의하고 민관협력을 통해 해양투기 반대행동에 적극 나서라"고 요구했다.

"일본과 싸우는 장수 등에 칼 꽂는 행위"

원자로 설계 경력이 많은 이정윤 원자력안전과미래 대표는 "바이든이 오염수 해양 방류에 오케이 했기 때문에 기시다가 버린다"며 "바이든한테 탄원 편지를 보내는 운동을 하자"고 제안했다. 연설을 마치고 내려온 그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더니 해양 투기를 합리화하는 데 동원되는 과학자들을 비판했다. 그는 "오히려 오염수 투기를 우려하며 동분서주하는 서균렬 서울대 명예교수를 고발했는데, 이는 일본과 전쟁하는 장수 등에 칼을 꽂는 행위"라고 비난했다.

'평생을 바당에서 일한 해녀'라고만 밝힌 한 집회 참가자는 원희룡 국토부장관이 제주지사 시절 한 발언을 뒤집은 것에 분노했다. 당시 원 지사는 "IAEA(국제원자력기구)는 이미 일본과 미국의 입김이 워낙 센 기구여서 (거기서) 안전하다고 그랬지만 상대방 주장을 넙죽 받아서는 절대 안 된다"며 "단 한 방울의 오염수 방류도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 4월 국회에서 "개인 견해에 변함이 없지만 정부의 의사결정은 다른 차원의 문제"라며 빠져나갔다.

일본총영사관, 문 잠그고 항의문 안 받아   
 
집회 대표단이 일본총영사관에 항의문을 전달하려 했으나 문이 잠겨 있어 외벽에 항의문을 붙였다.
 집회 대표단이 일본총영사관에 항의문을 전달하려 했으나 문이 잠겨 있어 외벽에 항의문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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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 대표단이 일본총영사관에 항의문을 전달하려 했으나 문이 잠겨 있어 외벽에 항의문을 붙였다.
 집회 대표단이 일본총영사관에 항의문을 전달하려 했으나 문이 잠겨 있어 외벽에 항의문을 붙였다.
ⓒ 이봉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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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도민대회는 집회참가자들이 대형 욱일기를 찢고 해녀가 물질할 때 바다 위에 띄워 놓는 테왁을 불태우는 '상징 행사'로 마무리됐다. 대회가 끝난 뒤 주최쪽이 일본정부에 보내는 항의서한을 일본총영사관에 전달하려 했으나 거부됐다. 총영사관을 경비하던 경찰이 대표단에게 길을 열어줬지만 영사관 출입문이 잠겨 있어 밑으로 밀어 넣고 외벽에 항의문을 붙이는 것으로 끝났다.

노형오거리 범도민대회 참가자수는 경찰이 800여명으로 추산했지만, 집회군중 맨 앞뒤를 오가며 직접 추산한 바로는 1000명이 넘어 보였다. 성산포와 안덕계곡의 발대식장에만 나왔다가 생업으로 바로 복귀한 인원 등을 합하면 연인원은 1500명으로 보는 게 합당해 보인다.

제주에는 죽고사는 생계의 문제... 소금 수요 급증 

제주도민들이 상당한 응집력을 보인 건데, 이는 제주도 특유의 집회문화뿐 아니라 도민 대부분의 생계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성산포수협의 강대종 활어유통과 직원은 "거의 모든 걸 바다에 걸고 있는 제주 경제에서 중요한 건 수산물에 관한 불신"이라며 "이걸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일부 횟집이 '바가지'를 씌우는 등 자업자득인 측면도 있지만 안 그래도 관광객이 줄어드는 판국에 핵오염수 바다 투기가 제주 경제에 미칠 영향력은 '불신'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심각해질 가능성이 크다. 횟집뿐 아니라 제주 해안가에 줄줄이 들어서 있는 양식장들도 바닷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불신에 따른 소비위축이 예상된다.

회는 최악의 경우 안 먹으면 되지만 소금은 생명을 유지하는 필수식품이다. 성산포수협에 따르면, 12일부터 천일염 20kg 한 포 값을 2만4000원에서 2만8000원으로 올렸는데도 수요가 급증해 물량확보에 애를 먹고 있다고 한다. 사재기 현상까지 가세하면서 산지에서 값이 더 오를 것을 기대해 출하를 꺼린다는 것이다.

제주 근해에서 많이 잡히는 멸치 등도 대부분 젓갈로 만들어지는데 소금 값 급등은 수많은 염장식품의 소비위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얼핏 바다 오염과 상관없을 듯한 감귤과 흑돼지 등 제주의 농축산물도 수산물을 즐기려는 관광객이 오지 않으면 타격을 입게 돼있다.

정부가 핵오염수 투기 방조에 따른 제주도민의 저항을 가볍게 여겼다가는 큰코다치는 수가 있다. 육지 사람에게는 단순한 '먹거리 문제'일 수 있지만 섬 사람에게는 죽고사는 '생계 문제'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태그:#핵오염수방류, #제주범도민대회, #이정윤, #서균렬, #키아오라리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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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제주 키아오라리조트 공동대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 원장, MBC저널리즘스쿨 교수(초대 디렉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글쓴이는 조선일보 기자, 한겨레 경제부장,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초대원장(2008~2019), 한겨레/경향 시민편집인/칼럼니스트, KBS 미디어포커스/저널리즘토크쇼J 자문위원, 연합뉴스수용자권익위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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