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이 기사는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2016)>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스틸컷. 영화 속 케이티(왼쪽)와 노령의 목수인 다니엘 블레이크(오른쪽) 모습.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 스틸컷. 영화 속 케이티(왼쪽)와 노령의 목수인 다니엘 블레이크(오른쪽) 모습.
ⓒ 나, 다니엘 블레이크

관련사진보기

 
노령의 목수인 다니엘 블레이크는 작업 중 심장마비 현상을 겪으며 쓰러졌다. 영화는 다행히 생명을 구한 다니엘이 질병 수당 심사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심사자는 매뉴얼에 적힌 대로, 다니엘이 팔이나 다리를 움직일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러나 이는 다니엘의 상황을 전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질문이다. 이에 다니엘은 팔다리가 움직이지만, 자신은 심장 때문에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라며 분통을 터트린다. 문제는 심사자가 매뉴얼에 의해서만 판단을 하였기 때문에, 다니엘이 질병 수당을 받을 만큼의 점수를 받지 못한 데서 발생한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영화 포스터
 <나, 다니엘 블레이크> 영화 포스터
ⓒ 나, 다니엘 블레이크

관련사진보기

 
편지로 결과를 통보받은 다니엘은 이의를 제기한다. 이의제기 과정 역시 지난하다. 통지서를 받자마자 해당 부서에 전화를 걸었지만 모든 상담원이 통화 중이라며, 통화 연결음을 1시간 48분 동안 듣고 나서야 통화가 연결된다. 상담원은 항고를 위해서는 재심사부터 받아야 하는데, 재심사를 받기 위해서는 결정 통보 전화를 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미 편지로 기각 서류를 받은 다니엘은 이 말 자체를 이해할 수 없지만, 상담원은 원래 편지보다 전화가 먼저 가는 것이 절차라면서 해당 절차를 밟아야 재심사를 요청할 수 있다는 이야기만 반복한다.

당장의 수당이 끊기게 된 다니엘은 관공서에 찾아가지만, 절차를 이야기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관공서 직원은 재심사를 요청하려면 인터넷으로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평생 목수로 살아왔던 다니엘은 인터넷은커녕 컴퓨터를 만져본 적조차 없다. 자신은 연필 시대의 사람이며, 차라리 집을 한 채 짓기가 더 쉽다고 설명해도 직원은 그저 '절차'만을 강조할 뿐이다.

이에 다니엘은 구직 수당을 신청하려 하지만, 담당자는 구직 수당을 받기 위해서 일주일에 35시간은 구직활동을 하고 있다는 증명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심장에 문제가 있어 잘하고 있던 일을 쉬어야 했지만, 다시 일을 구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구직 수당을 받기 위한 허들은 이뿐만이 아니다. 정돈된 형태의 이력서 등도 필요한데, 손으로 쓴 이력서가 아니라 컴퓨터로 인쇄한 형태를 요구한다. 다니엘은 여기서도 디지털 시대라는 장벽을 마주한다. 우여곡절 끝에 인터넷으로 재심사를 요청했지만, 결국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

'보편'에 들어가기 위한 요건

이 영화는 관료주의와 시스템의 맹점을 부각한다. 물론 영화에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있기에 감상은 각기 다를 수 있지만, 그럼에도 관공서에서 주인공 다니엘에게 '적법한 절차를 밟으라'고 계속해 요구하는 장면에서 답답함을 느끼지 못하는 관객은 없을 것이다. 저런 방식으로 복지의 기준을 정량화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결국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인데 직원들은 왜 하나같이 인정머리가 없는지 등의 답답함이다. 그나마 다니엘의 어려움을 헤아리는 관공서의 앤도, 불필요한 선례를 남긴다며 상사의 꾸짖음을 듣게 되기에 답답함은 배가 된다.

그러나 닫혀있는 절차나 직원들의 관료주의적 태도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사회가 누군가를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기준이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영화에서 제기된 다니엘의 문제는 절차상 누군가가 조금만 더 친절했다면 금방 해결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애초에 사회시스템이 소위 '보편적'인 사회구성원을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고, 그 보편적 복지를 받기 위해서라면 여기서 정해진 보편의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는 점이 더 문제다. 이를 위해 다니엘은 인터넷을 사용할 줄 알아야 했고, 이사를 와서 지리를 잘 모르기에 심사 시각을 맞추지 못했던 케이티는 심사에 탈락한 상황에서도 감정적이지 않고 이성적인 대화를 할 줄 알아야 했으며, 이들은 근본적으로 정부가 제공하는 복지 정보를 알고 있어야 했다.

게다가 이 기준은 '악용을 막기 위한', '상식적인' 등의 미사여구로 합리성의 옷을 입고 있기에 더욱 드러나지 않고 견고하다. 모든 방법이 막힌 다니엘이 관공서 벽에다가 "나, 다니엘 블레이크. 굶어 죽기 전에 항고일 배정을 요구한다. 그리고 상담 전화의 구린 통화 대기음도 바꿔라"라고 적기 전까지 다니엘은 사회에 없었던 사람이다. 그가 사회에 존재를 드러낸 행위는 '범죄자'의 꼬리표를 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에게 '우리'는 누구인가?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공동대표가 지난 1월19일 오후 서울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장애인 권리예산을 촉구하는 지하철행동을 벌이고 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공동대표가 지난 1월19일 오후 서울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장애인 권리예산을 촉구하는 지하철행동을 벌이고 있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최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시위를 보며, 일부 시민은 시위 목적이 옳다고 할지언정 방식이 잘못되면 사회구성원들의 동의를 받을 수 없다고 한다. 화물연대 파업 역시 마찬가지이다. 누군가에게 이는 생존권을 건 중요한 투쟁임에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적절하지 못한 방식'이라고만 이야기되는 것이다. 이는 보편적 사회구성원의 기준이 작동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여기엔 '보편적인 우리의 범주에 들어오려면, 합법적이고 공정한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라는 합리성과 공정성의 사유가 작동한 것이다. '합리성과 공정성을 갖추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들'의 운동은 전체 사회구성원을 위한 목소리가 아니라, 특정한 개별 소수자의 목소리를 잘못된 방식으로 대변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전체 대 소수자라는 이항 대립은 애초부터 성립되지 않는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군가가 과일과 사과 중에 어떤 것을 더 좋아하는지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사회에서 소수자가 전체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전제는 잘못되었다고 본다. 소수자가 전체에 포함되기 위해서 특정한 조건을 갖춰야 한다면, 심지어 특정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범죄자'나 '사회 부적응자' 등 다른 형태의 옷을 입기 전까지 비가시화될 수밖에 없다면,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모두를 위한 인권'을 거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위한 인권'에는 즉각적 반발이 이어진다. 이러한 경향은 단순히 특정 집단이나 사람에 대한 배척으로 끝나지 않는다. '모두'에 대한 추상성이 올라가면서 사실은 어느 누구의 인권도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구체적 타자와의 호흡이 아니라 타자성이 탈각된, 허구적 타자와의 관계만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우리'는 누구인가? 다니엘의 마지막 한 마디, "내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라는 말에서 중요한 지점은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타자 그 자체가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문화사회연구소 서도원님이 작성했습니다.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월간 일터에도 실립니다.


태그:#다니엘_블레이크, #노동자, #인권, #켄_로치, #관료주
댓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모든 노동자의 건강하게 일할 권리와 안녕한 삶을 쟁취하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