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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1년에 두 번 신촌의 대학병원 가는 날, 아버지는 정기적으로 고혈압과 당뇨, 심장병 등 노인성 질환을 치료하고 있다. 당신께서 내원한 지도 20년이 넘었다. 올해 94세를 맞은 아버지는 이제 병원 길이 만만치 않다. 차량으로 모신다 하니 아버지는 오늘따라 느긋하고 편한 얼굴이다.

아버지 병원 가는 날
 
셀프 혈압측정기, 노약자 스스로 잴 줄 알아야 한다.
 셀프 혈압측정기, 노약자 스스로 잴 줄 알아야 한다.
ⓒ 이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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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와 마주했다. 식후 당뇨와 채혈, 혈압 결과를 살피더니 종전과 결과가 크게 다르지 않다며 복용약도 그대로 처방했다. 이어 의사는 특별히 불편한 데가 없는지 물었다. 늘 반복되는 질문이다.

진료를 끝낸 의사는 아버지 같은 고령환자에 익숙한 듯 애써 인내심을 발휘했다. 아버지는 그런 눈치도 모르고 의사를 계속 쳐다본다. 잠시 흐르는 침묵속에 내가 "나갈까요" 귓속말로 전하자 아버지는 그때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파수가 다른 주치의 목소리는 아버지 보청기에 무용지물이다. 실제 대화는 내가 옆에서 대신 속삭여야 가능하다. 연세가 높은 아버지는 의료진과 대화가 힘들다. 병원이 보호자를 대동하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유감스럽지만 이게 의료계 현실이다. 

의당 모셔야 하지만 부득이 당신 혼자 병원을 다녀오는 날은 내내 초조하다. 집에 무사히 당도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마음이 편하다. 마치 어린애가 처음 소풍 갔다 온 것처럼 대견하고 반갑다. 오늘도 아버지는 진작에 혼자 병원에 다녀오겠다고 했었다.

혼자서 병원 다녀오기도

지난해는 혼자 병원에 들러 약국까지 다녀오는데 거의 하루가 걸렸다. 진료시간은 3분 정도에 불과 하지만 오전 9시 집을 떠나 병원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진료받고 약까지 수령해 집에 오니 5시다. 익숙한 코스라도 쇠약한 아버지로선 큰맘 먹고 다녀왔을 것이다.
 
병원내 무인단말기(키오스크)
 병원내 무인단말기(키오스크)
ⓒ 이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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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택시 잡는 것부터 병원 가는 길이 험난하다. 병원에 도착하면 '키오스크'부터 이용해야 한다. 진료하기 전 환자가 이용해야 할 셀프 의료기도 많다. 디지털 문화와 스마트폰 사용이 미숙한 아버지로서는 모든 게 생소할 것이다.

70이 다 된 나도 병원의 미로 같은 동선을 헤매기 십상인데 눈과 귀 모두 불편한 아버지가 물어물어 섭렵하다니 대단하다. 이날 앞장선 내게 지팡이로 익숙한 듯 진료실을 가리켰다. 소식과 규칙적인 생활, 깔끔한 자기관리가 아버지 나름의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낙관적이며 감사하는 태도도 루틴한 일상이다.

한번은 병원 약국에서 친절한 알바 직원에게 함께 점심을 먹자고 제안했는데 거절당해 무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남을 배려하고 사랑을 베푸는 따뜻한 마음을 여전히 품고 있는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함께 의지하며 닮아가는 부자

요즘 피기 시작한 매화는 추위에도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고 한다. 심한 역경에서도 소신과 의지를 지킨다는 뜻을 담고 있다. 나는 이 말을 '백세노인' 아버지에 비유해 "진짜 노인은 아무리 나이 들어도 총기(聰氣)를 잃지 않는다"로 달리 표현하고 싶다.

요즘 아버지를 보면 하루하루가 기적이라 생각한다. 새벽 4시 아버지 기침(起枕) 소리는 오늘도 살아있는 징표로 나를 기쁘게 한다. 새벽신문을 매일 챙겨 내 책상에 갖다 놓는 것도 아버지다.

나 또한 아버지와 함께 있는 걸 좋아한다. 소통이 어렵지만 필담으로 서너 시간 대화할 적도 있다. 아버지 의식세계와 평생 아버지가 살아온 인생을 살필 수 있는 시간이다. 중요한 내용은 가끔 채록하기도 한다.

자존심 센 아버지가 등을 보이며 모든 것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때만큼 흐뭇한 것도 없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새삼 인정받는 기분을 느끼기 때문이다.

스티브잡스는 때가 되면 누구나 인생의 마지막 날을 맞는데 결국 남는 건 부(富)가 아니라 사랑과 추억뿐이라 했다. 공감하는 대목이다. 아버지와 아들, 우리 부자는 추억을 함께 만들고 서로 의지하며 닮아가고 있다.

오전 11시를 떠나 집에 도착해 4시가 넘었다. 병원을 오가며 반나절을 함께 한 아버지가 "아범, 오늘 수고했다. 고맙다"며 조용히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안도했다. 아버지는 내게도 감사하다는 표현을 잊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태그:#대학병원, #키오스크, #9988234, #백세노인, #스티브잡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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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메모와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기존 언론과 다른 오마이뉴스를 통해 새로운 시각과 영감을 얻고 있습니다. 주요 관심사는 남북한 이산가족과 탈북민 등 사회적 약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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