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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에놀라 홈즈 2>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데르센이 1845년에 발표한 동화 '성냥팔이 소녀'의 주인공 소녀는 죽기 전 성냥을 하나씩 켜는데, 성냥을 켤 때마다 환영을 본다. 마지막 세 번째 성냥을 켠 소녀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환영을 보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소녀가 어린 나이에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로 성냥을 팔았다면 건강할 때는 성냥공장에서 일하였고, 공장에서 쫓겨날 당시 받은 성냥으로 죽기 전 성냥 판매를 하지 않았을까?'라고 추측해본다.

1827년 영국의 존 워커(John Walker)가 최초로 개발한 백린(황린) 성냥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던 혁신적인 제품이었던 점, 당시 성냥공장에 여성노동자가 많았고 아동 노동이 흔했다는 점, '성냥팔이 소녀'가 발표된 후인 1848년에서야 독일에서 최초로 안전 성냥(safety match)이라는 이름으로 적린 성냥이 개발되었던 점, 그리고 소녀가 사망하기 직전의 임상 경과를 감안하면 의학적으로 성냥팔이 소녀는 뇌 침범(Phossy brain)이 동반된 백린 중독으로 사망했을 수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영화 <에놀라 홈즈 2>
 영화 <에놀라 홈즈 2>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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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에놀라 홈즈 2'는 백린과 관련된 또 다른 잔혹 동화를 소개하고 있다. 영화의 주인공인 에놀라 홈즈는 유명한 사설탐정인 셜록 홈즈의 여동생으로 1편에서 영국의 여성참정권 획득에 큰 역할을 한 후 탐정사무소를 차리게 되는데, 성냥 공장에서 일하던 소녀 베시의 의뢰로 첫 번째 사건을 맡게 된다.

의뢰인과 함께 살았던 새라 역시 성냥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로 성냥공장에서 사용하던 물질을 이용해 과학 실험을 하던 중 실종된다. 에놀라는 실종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새라가 근무했던 성냥 공장에 잠입하여 조사하는데, 새라는 공장에서 사용하였던 물질인 백린과 적린을 이용하여 식물/동물 실험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애놀라는 공장에서 일하다 사망한 동료들의 목록과 재무부 장관이 공장주에게 성냥의 원료를 적린에서 백린으로 교체해도 된다고 허락한 계약서를 새라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밝혀낸다. 새라는 이후 공장으로 돌아가 동료들에게 죽음의 노동 현장을 바꾸자고 한 뒤, 동료들과 함께 국회의사당이 있는 웨스트민스터로 향한다.

성냥 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유해물질 노출과 파업 투쟁

이 영화에서 소개된 사건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 성냥 제조공장인 'Bryant and May'에서 근무하였던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영국의 언론인이자 사회주의자인 애니 베전트(Annie Besant)의 기사를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1400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했고, 사회 명망가들을 포함한 시민들의 지지로 파업은 최종 승리하였다. 이후에도 다수 공장에서 백린 중독에 의한 턱뼈 괴사(Phossy jaw) 사례가 있었지만, 영국에서 백린을 이용한 성냥 생산이 금지된 것은 1908년이었다.

많은 의학 논문을 통해 접한 백린 공정 과정 및 노출로 인한 인체 영향은 다음과 같다. 백린성냥의 두약은 백린과 함께 염소산칼륨, 황, 고무를 혼합하여 만드는데, 이를 축목(성냥 크기에 맞게 나무를 자른 것)의 머리 부분에 바르는 공정이 성냥 제조의 핵심인 두약 공정(dipping)이다.

백린 흄은 주로 여성 노동자들이 맡게 되는 두약 공정과 함께 건조실에서 노출되는데, 일반적으로 3~5년 정도 백린 흄에 노출될 경우 치은염(gingivitis), 치조정(alveolar crest)의 분리, 하악골 또는 상악골의 골 괴사로 인해 고통 받는다. 턱뼈 괴사는 흄(fume)의 형태로 구강 점막에 백린이 노출된 후 치아나 상악 혹은 하악골에 누공(fistula)을 만들거나 농(abscess)을 만들어 턱뼈의 병적 골절을 일으켜 발생하게 된다. 그 외 호흡기 노출을 통해 객혈을 유발(Phossy lung)하기도 하고, 전신적인 효과로 골수(Phossy marrow) 또는 뇌(Phossy brain)를 침범하여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조선인촌 여성노동자들에게 반복되어 나타난 백린 중독과 파업 투쟁
 
조선인촌(성냥)주식회사 여성 노동자들.
 조선인촌(성냥)주식회사 여성 노동자들.
ⓒ 인천시민애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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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는 1880년에 최초로 성냥을 들여온 이후 1886년경에 외국인이 인천에 성냥공장을 세웠지만, 일본산 성냥의 유행으로 공장이 없어졌다가 1917년 10월에 인천 소재 조선인촌주식회사에서 최초로 성냥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곳 조선인촌에서도 Bryant and May의 여성 노동자 파업과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1921년 3월 11일에 두약 공정에서 일하던 150명의 여성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한 이후 1921년 4월 11일에 일제에 의해 황린 인촌 제조 금지법이 만들어졌던 점을 감안하면, 여기서도 백린 중독에 의한 턱뼈 괴사(Phossy jaw) 환자나 사망자가 많지 않았을까?

2017년 7월 말 기린표 성냥을 만들던 경남산업공사가 문을 닫은 후부터 국내 성냥 생산은 중단되어 이제 작업환경을 들여다볼 수 없다. 또한 백린 사용은 이미 오래전 금지되었기 때문에 백린 중독 환자 역시 더 이상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형광등 제조공장 철거 중 발생한 수은 중독, 휴대전화 케이스 세척 작업에서의 메탄올 중독처럼 유해 물질에 의한 중독의 역사는 반복될 수 있기에 '에놀라 홈즈2'에서 여성노동자들의 삶을 보는 것, 그리고 인천 배다리 성냥마을박물관에서 조선인촌의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정부의 노동보건 정책 담당자들과 국회의원들에게 '에놀라 홈즈 2'를 추천한다. Bryant and May의 여성 노동자들이 웨스트민스터로 달려갔던 것처럼, 한국의 여성 노동자들 역시 언제든 여의도로 달려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대호 님은 직업환경의학전문의로 근로복지공단 직업환경연구원 연구위원입니다.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월간지 일터 1월호에도 실립니다.


태그:#백린_중독, #성냥팔이_소녀, #에놀라_홈즈, #직업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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