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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킹메이커>의 한 장면.
 영화 <킹메이커>의 한 장면.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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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을 앞두고 지난 1월 하순에 개봉한 설경구, 이선균 주연의 영화 <킹메이커>가 화제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여러 평론이 나온 바 있다. 예술적인 관점에서 분석한 글(대표적인 것이 빛과 그림자에 대한 것)에서부터 정치사적 관점에서 이 영화의 소재가 된 김대중(김운범)과 엄창록(서창대)에 대한 여러 일화와 그것의 의미 등을 설명한 글이 이에 해당한다.

엄창록과 관련된 사료는 매우 제한적이다. 이 영화를 계기로 그와 관련된 사건 및 일화 등이 다시 재조명됐다. 그렇다 보니 김대중을 연구하고 있는 필자가 보기에도 이에 관해서 추가적으로 언급할 내용이 없을 정도다. 그래서 이 영화를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필자는 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현 시점에서 이 영화 후반부에서 다루고 있는 1971년 대선이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판단한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첫째, 최근 선거과정에서 우려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혐오 전략을 통한 정치적 동원과 관련한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다뤄졌지만 1971년 대선은 반호남지역주의가 정치적으로 동원된 최초의 선거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혐오 전략에 대응해서 김대중은 비전과 통합을 통한 생산적 정치를 제시했는데 이는 현 시점에서 주는 함의가 크다.

둘째, 정책공약과 관련된 것이다. 1971년 7대 대선은 한국의 역대 대선 중에서 정책선거 관점에서 볼 때 가장 높은 평가를 받는 선거였다. 이것은 당시 도전자였던 김대중 후보가 거시적인 국가 전략과 이를 뒷받침하는 미시적인 정책 등을 정교하게 결합해서 박정희식 근대화 전략에 대한 전면적인 대안을 제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2022년 대선은 매우 특이하게도 거시적인 국가 전략에 대한 방향 제시와 그에 대한 논쟁이 부재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정도와 수준의 차이는 있을 수 있어도 보통 대선에선 각 세력이 제시하는 국가발전 전략에 대한 논쟁이 이뤄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 대선은 이점에서 보면 매우 특이하다. 거대 양당의 두 후보는 주로 생활밀착형 마이크로한 이슈들을 발굴해내고 이를 공약으로 제시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을 결코 낮게 보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것은 가치 경쟁이 아니라 속도와 센스 경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주로 이뤄지는 현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현재의 격변하는 국내외적인 여건을 볼 때 거시적인 국가발전 전략에 대한 논쟁이 부족한 것은 문제가 크다. 그렇게 볼 때 7대 대선의 역사적 의미는 현 시점에서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1년, 혐오 전략에 맞서 미래와 통합을 내세운 김대중
 
1971년 대통령 선거 당시 유세장에 모인 100만 청중에게 손을 들어 답례하는 김대중 후보.
 1971년 대통령 선거 당시 유세장에 모인 100만 청중에게 손을 들어 답례하는 김대중 후보.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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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킹메이커> 후반부의 배경이 되는 1971년 7대 대선. 이 대선은 한국 정치에서 반호남지역주의가 정치적으로 동원된 첫 번째 선거다. 이때 처음 동원된 반호남지역주의는 1980년 광주학살, 1987년 13대 대선, 1990년 3당 합당 등의 여러 사건을 거치면서 매우 심각할 정도로 악화됐다.

다행히 1997년 김대중 당선, 2002년 노무현 당선을 통해서 이 문제가 완화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고, 이후 각 정치 세력들의 여러 노력으로 이제 호남에 대한 적대적 의식과 혐오의식에 기반한 반호남지역주의는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필자는 최근 국민의힘이 광주와 호남에 대해서 보여준 여러 노력에 대해서 높이 평가한다.

반호남지역주의는 요즘 표현으로 하면 혐오전략이었다. 그 전에는 '빨갱이' 담론에서 보듯 반공, 반북이데올로기에 기반한 혐오 전략이 있었는데 거기에 지역적으로 호남이 추가된 것이다. 그리고 반공과 반호남이 결합된 것이 반김대중(반DJ)정서였다. 김대중은 1971년 대선에서 이 문제를 정면에서 제기했다. 1971년 3월 27일 김대중이 친필로 작성한 연설문 개요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공화당과 현정부는 지금 가진 방법으로 지역감정을 선동하는 망국적 선거작전을 벌이고 있으며 심지어 일국의 국회의장까지 이에 가세하고 있다.

나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독재와 특권계층과 부패를 반대하고 자유와 대중계층과 정의를 사랑하는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는 것이지 결코 어느 지역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나는 집권하드래도 어느 누구에 대해서나 정치보복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거듭 천명해 둔다.
 
이렇게 김대중은 반호남지역감정을 자극하는 혐오전략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김대중은 대의를 위해 선을 넘지 않았다. 김대중은 정치적 현실에 기초해서 철저히 실용적인 전략을 수립했던 정치가였다. 다만, 영화 속 서창대와는 달리 선을 지키면서 이상을 추구했다. 이것이 김대중이 위대한 정치가로 평가받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모습은 1971년 대선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1971년에는 개발독재 과정에서 심화되기 시작한 불평등, 그리고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에도 지속된 반일 감정 등이 여전했다. 이와 같은 균열을 이용해서 혐오 전략을 동원하려고 했다면 일정 정도 통할 수도 있을 정도로 당시 이 문제는 심각했다. 그런데 김대중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다리> 1971년 7월 호(대담일시는 6월 24일)에 게재된 하버드대학교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Edwin O. Reischauer)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대중 : 지난번 대통령 선거기간 동안 나는 한국의 재벌과 일본에 대해 비판을 삼가했었습니다. 그 이유는 영세 서민 혹은 소시민의 지지표가 많이 나올 것을 예상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첫째의 큰 이유는 재벌들을 공격함으로써 계급의식 내지는 계급 대립 조성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일본이 과거의 죄를 씻지 않고, 또는 죄의식을 갖고 있지 않아 우리의 반일 감정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사토 일본 수상이 69년 닉슨-사토 회담 때 한국은 일본의 제1차 방어선이라 한 것으로 보아 그들이 한국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또 우리는 일본의 힘이 사실상 필요하기 때문에 반일 감정을 격조시키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김대중은 공동체의 발전과 국익을 위해서 혐오 전략을 동원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의 여러 문제점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면서도 혐오 전략을 쓰지 않는 대정치가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1971년 대선이 최고의 정책선거로 평가받는 이유 

그리고 7대 대선은 한국 역대 대선 중에서 정책선거 관점에서 볼 때 가장 뛰어난 선거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경쟁하는 두 후보, 두 세력이 모두 뚜렷하면서도 독자적인 국가발전 전략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당시 박정희 정권은 대륙의 공산주의 세력에 맞서 한미일 3각 협력체제를 구축했고 그와 같은 대외적인 배경 속에서 경제개발정책을 추진했다. 그리고 국가안보와 효율적인 경제개발을 이유로 권위주의 독재체제를 강화해갔다. 이는 박정희식 근대화 노선이라고 명명할 수 있으며 한국 현대사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

이때 김대중은 박정희식 근대화 전략을 비판하고 이에 대한 전면적인 대안을 내세웠다. 비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시적인 국가비전과 이에 기초한 세부 정책을 정교하게 결합해서 제시했던 것이다. 이는 박정희식 근대화 노선에 맞선 김대중식 근대화 노선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 김대중은 박정희식 경제개발 정책을 개발독재라고 비판하면서 민주주의에 기초한 경제개발정책을 내세웠다. 김대중은 대중정치, 대중경제, 대중사회를 내용으로한 대중민주체제 구현을 국가발전의 비전으로 제시했다. 여기서 유명한 대중경제의 핵심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김대중은 경제발전과 성장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긍정적으로 인식했다. 다만 박정희 정권과 같은 방식으로 일관하면 지속가능하지 않고 부작용이 크다고 보았다. 그래서 김대중은 산업간, 지역간, 도농간, 계층간에 발생하고 있는 불균형 불평등 문제를 완화시키면서 경제개발을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고 이와 같은 정책구상을 대중경제라고 한 것이다.

또한 김대중은 국제적인 데탕트에 주목하면서 외교안보의 관점에서 강경한 반공노선에서 탈피하여 실용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인식과 대응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4대국안전보장론을 내세웠다. 이는 대단히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이었다. 당시 중국과 소련은 적대 세력으로 인식되었고 국교도 수립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외교적 협상을 통해서 한반도의 안보와 평화를 구상한다는 것 자체가 금기를 깨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다. 당시 김대중은 북한에 대한 인정과 평화공존을 전제로 한 3단계 통일론을 내세웠다. 이것은 4대국안전보장론 이상으로 혁명적이고 파격적인 구상이었다. 그 당시 한국사회는 북한을 공존과 협력의 대상이 아닌 적대와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했으며 북한 정권을 통일의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 김대중은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하면서 북한을 경계하되 지나친 공포심은 옳지 않다고 봤다. 그래서 김대중은 자신감을 갖고 통일문제에 대해서 진취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도 유리하다고 보았고 지속되는 한반도의 전쟁위기를 근본적으로 해소하고 남북한의 교류를 통한 공동발전을 도모하는 것이 남북 양쪽에 윈윈이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2022년 대선에서 1971년 대선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 이유 
 
지난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공개홀에서 열린 <방송 3사 합동 초청> 2022 대선후보 토론에서 후보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의당 심상정 후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
 지난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KBS 공개홀에서 열린 <방송 3사 합동 초청> 2022 대선후보 토론에서 후보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의당 심상정 후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
ⓒ 국회사진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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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거론한 김대중의 구상은 그 이후 수십 년을 거치면서 많은 것이 현실화됐고,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인 것도 있다. 그만큼 선진적이고 미래지향적이었으며 시대를 앞선 비전과 정책을 제시했던 것이다. 1971년 7대 대선이 최고의 정책선거로서 역사적인 평가를 받은 이유이다.

필자는 영화 <킹메이커> 후반부의 배경이 되는 1971년 7대 대선의 두 가지 특징을 통해 혐오 전략 동원과 거시적인 국가 전략 부재라는 2022년 20대 대선과정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비교해서 살펴보았다.

권력을 잡아야 목적 실현을 할 수 있지만, 그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 그 비용은 그 사회가 부담하게 된다. 1971년 김대중은 이것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김대중은 혐오 전략에 맞서 혐오 전략을 동원하지 않고 대신 비전과 통합의 메시지를 통해서 국민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국가지도자는 국가가 나아가야 할 거시적인 비전과 노선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가치 경쟁이 이뤄지고 이것이 정책논쟁으로 이어지면서 생산적인 선거문화가 이뤄질 수 있다.

선거 과정에서 이와 같은 논쟁과 이슈가 많이 발생하면 불필요한 네거티브 공세 역시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된다. 그렇게 볼 때 이번 대선이 역대급 비호감 대선이라는 혹평을 받는 이유 중의 하나가 비전경쟁과 논쟁이 부재한 것과 관련이 크다. 이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덧붙이는 글 |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태그:#킹메이커,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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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박사이며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서 사료연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대중에 대한 재평가를 목적으로 한 김대중연구서인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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