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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한국사 1번 문항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한국사 1번 문항
ⓒ 한국교육과정평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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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한국사 20번 문항의 잔불이 이번엔 1번으로 옮겨붙었다. 초등학생도 맞힐 수 있다는 20번 문항보다 예상 정답률이 더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아닌 게 아니라, 다섯 개의 그림 중 하나를 고르는 문제여서 굳이 지문의 내용을 꼼꼼히 읽어볼 필요도 없다.

지난 6일 유수의 입시업체에서 수험생의 가채점 결과를 토대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1번 문항의 예상 정답률은 무려 98%로 추정됐다. 문제지도 펴보지 않고 대놓고 찍은 경우를 제외하곤 모두 맞혔다는 뜻이다. 시험으로서의 변별력이 전혀 없었다는 이야기다.

좀 심하긴 했다. 지문에 뗀석기, 곧 거친 돌 도구라고 적어놨는데, 다섯 개 선다 중에 돌인 건 하나뿐이다. 동검과 덩이쇠, 앙부일구와 상평통보는 모두 금속 재질이다. 뗀석기냐 간석기냐를 두고 고민할 필요가 없는, 말 그대로 '누워서 떡 먹기' 문제다.

복수 정답 등의 치명적인 출제 오류도 아니고, 설마 이런 게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게 되리라고는 미처 몰랐을 것이다. 20번 문항과 함께 출제와 검토 과정에서 놓친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출제자와 검토자라면, 그들을 성토하는 목소리에 겸허히 귀 기울여야 한다.

정작 우려스러운 건, 이로 인해 절대평가인 한국사 영역에도 변별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져 나오는 이야기라 새로울 건 없지만, 당장 2022년 수능에 영향을 미치게 될까 두렵다. 물론 이는 한국사 영역만의 문제는 아니다.

수능 필수 과목으로 지정된 후, 난이도가 롤러코스터를 탄 적이 있다. 지난 2018학년도 수능에서 1등급을 받은 학생의 비율이 전년에 견줘 절반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21.17%에서 12.84%로 반 토막이 난 것이다. 3등급까지 넓혀도 줄어든 비율은 비슷하다.

아차 싶었던지, 이듬해인 2019학년도 수능에서는 무려 세 배로 뛰었다. 1등급 비율이 36.52%에 이른 것이다. 워낙 존재감이 없는 과목이라 크게 이슈화되지는 않았지만, 당시 수험생과 교사들로부터 수능이 아니라 '국적 판별 시험'이라는 조롱이 쏟아졌다.

문제는 시험의 변별력이 아니다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인 3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초고등학교에 마련된 수능 고사장에서 수험생들이 시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일인 3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초고등학교에 마련된 수능 고사장에서 수험생들이 시험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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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대, 문제는 시험의 변별력이 아니다. 쉬우면 변별력을 잃었다고 손가락질하고, 어려우면 아이들의 학습 부담을 배가시켰다고 나무라는, 밑도 끝도 없는 논쟁만 불러올 뿐이다. 변별력에만 천착하면, 배가 산으로 갈 수밖에 없다.

시험, 곧 평가는 수업과 함께 교육과정의 필수 요소다. 특히 대학 입시에 초중고 모든 교육과정이 종속된 현실에서 시험의 권능은 막강하다. 하물며 듣기 평가 도중 비행기의 이착륙도 금지되고, 군사훈련도 멈추며, 직장인의 출근 시간마저 늦추게 하는 수능임에랴.

아무리 정시의 비중이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수능은 여전히 모든 공부가 수렴되는 종착지다. 초등학생부터 고3 수험생까지 무려 12년 동안 곁눈질하지 않고 오로지 수능을 향해 매진한다. 국영수나 한국사처럼 수능 필수 과목이라면, 더욱더 그 몫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수험생에게 모든 시험의 정점인 수능 한국사 영역은 학교 수업을 정상화시키는 데 기여해야 한다. 역사 교육의 본령에 대한 고민이 담겨있지 않은 시험이라면, 그저 서열을 매겨 당락을 결정하는 장치일 뿐이다. 그럴 거면, 난이도를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1번과 20번 문항이 문제가 되는 건, 너무 쉬워 변별력을 잃었다는 데 있지 않다. 그것이 대체 역사 교육의 본령과 대체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이다. 수업에는 학습 목표라는 게 있고, 시험에는 출제 의도라는 게 있기 마련인데, 그걸 당최 모르겠다는 말이다.

사실 이는 1번과 20번 문항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의 문항이 한국사는 단순 암기 과목이라는 오랜 편견을 강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예년에 견줘 쉬워졌을 뿐, 출제 문항의 내용이나 유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내친김에, 이번 한국사 시험을 통째로 들여다보자. 인터넷에서 시험지를 내려받을 수 있다. 한국사가 수능 선택 과목이던 때에 응시했거나, 기성세대라면 과거 학력고사 시절의 시험 문제를 떠올려보면 좋겠다. 참고로, 난 학력고사 세대로, 수능 세대인 지금 아이들을 23년째 가르치고 있는 현직 한국사 교사다.

2번은 고구려가 남진 정책을 추진해 백제가 도읍지를 옮겼다는 삼국시대 전쟁사다. 교육과정평가원이 일찌감치 한국사는 정치사를 위주로 출제하겠다고 밝힌 터라 전쟁사는 안 나오면 이상할 정도다. 출제 영역을 정치사로 좁힌 건, 수험생의 학습 부담을 줄이겠다는 취지에서다.

3번은 '나라'에 대한 문제다. 흔히 '국뽕' 문제라고 부르는 건데, 단연 고구려와 발해, 고려 등이 자주 등장한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한다는 의미도 있고, 외세의 침략에 당당히 맞선 나라라는 공통점이 있어서다. 5번 문항처럼 문화유산과 연계하기도 쉬워 자주 출제가 된다.

4번과 6번, 7번은 '왕'의 업적을 묻고 있다. 몇 문항이냐의 문제일 뿐, 항상 출제되는 '단골 메뉴'다. 대신 무조건 암기해야만 맞힐 수 있는 문제다. 물론, 시대마다 나오는 왕은 정해져 있다. 고려 시대는 태조, 광종, 공민왕, 조선 시대에는 세종, 세조, 정조, 이런 식이다.

'태정태세문단세'부터 외우고 보는 공부법, 언제까지?
  
일단 '태정태세문단세'부터 외우고 보는 공부법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왕의 업적을 꼬치꼬치 묻는 게 아니라도, 왕의 이름과 순서를 모르면 풀기 힘든 문제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왕권 강화'나 '중앙집권화'가 역사적으로 올바른 방향인 것처럼 배우는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한국사 문제 중 일부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한국사 문제 중 일부
ⓒ 한국교육과정평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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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와 사건을 묻는 것도 빠지지 않는다. 이 또한 난이도 때문인지, 인과관계적 사고가 필요한 배경과 영향을 묻기보다 단순 내용만 다루고 만다. 8번의 대동법과 9번의 임술년 농민봉기, 11번 동학농민운동, 12번 국채보상운동, 16번 이봉창 투탄 의거를 다룬 문항들이 그렇다.

특히 9번 문항의 경우엔, 1번과 20번 못지않다. 지문에 '백성이 소동을 일으켰다'고 적어놨으니, 정답이 '농민봉기의 발생'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 나머지 넷은 호족과 귀족, 삼별초, 훈구와 사림이 제시되어 있다. 굳이 시대를 따져볼 필요도 없다는 이야기다.

또 하나의 '약방의 감초'는 시대순 배열 문제다. 앞뒤 다른 사건들과의 인과관계를 유추해야 하는 거라면 모를까, 제시된 사건이 언제 일어났느냐만 묻는 것이어서 역사적 사고력을 키우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시시콜콜하게 연도를 암기하는 것과 내용상 별반 다르지 않다.
  
13번과 15번, 19번, 이렇게 세 문항이 시대순 배열 문제다. 각각 을사조약, 6.10 만세운동과 광주학생항일운동, 5.18 민주화운동을 다루고 있다. 언론에서는 1번과 20번만 문제 삼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13번 문항이 이번 수능 한국사 영역에서 최악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파란만장했던 우리 근현대사에서 아이들에게 역사적 교훈을 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건임에도, 그저 맥락 없이 시기만 묻고 있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과정을 지문으로 제시했다면, 그로 인한 백성들의 저항을 묻는 게 출제 의도에 부합한다. 최소한 선택지 연도표에라도 의병이나 자결, 언론 활동, 고종의 특사 파견 등의 내용이 언급되어야 했다.

19번 문항도 아쉬움이 크다. 올해가 40주년이라 어느 정도 출제가 예상됐던 까닭에 시대순 배열 문제라 해도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지문에 군부 독재나 계엄군으로 눙칠 게 아니라, 시의성을 고려해 '전두환'이라는 이름이 적시되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반대로 15번 문항은 두 사건의 인과관계를 알고 있는지를 묻는 좋은 사례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이 손잡은 민족유일당 운동으로 결성된 신간회가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공헌했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다. 청년 학생을 중심으로 한 항일운동이라는 공통점을 지문에 제시하여 더욱 돋보인다.

14번 문항도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민중의 저항이 일제의 통치 방식에 변화를 가져왔다는 내용을 다뤘다. 역사의 발전은 권력자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민중이 피땀 흘려 쟁취한 것임을 시험 문제를 통해서도 알려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대강이나마 들여다보니 어떤가. 출제된 내용으로 보면, 수십 년 전 시험 문제와도 별로 다르지 않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수십 년이 지난 기성세대라 해도, 학창 시절 아예 역사 공부에 담을 쌓은 게 아니라면, 그다지 낯설지 않게 여겨질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한국사 교과서 머리말에 적힌 문장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3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복고등학교 고사장에서 수험생들이 시험을 앞두고 자습하고 있다.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3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복고등학교 고사장에서 수험생들이 시험을 앞두고 자습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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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시험에 출제된 내용이 비슷하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예나 지금이나, 국정 또는 검인정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사 교과서의 내용을 국가가 사실상 검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역사적 관점이 드러나는 시험이란 애초 존재할 수 없다.

역사는 다분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학문인데, 일률적인 잣대로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것도 선다형 방식이라면 암기력 테스트일 수밖에 없다. 수능 출제자가 애꿎게 왕의 업적만 묻고, 시대순 배열을 따지며, 사건의 이름에 연연할 수밖에 없는 건 그래서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변별력과 난이도의 문제로 접근해서는 곤란하다. 역사 교육의 본령에 어긋나는 시험이라면, 굳이 역사의 이름을 내걸고 존재할 이유가 없다. 수능을 대비하기 위해 공부한 한국사가 역사적 사고력을 함양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묻고 싶을 뿐이다.

다음은 한국사 교과서 머리말에 적힌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20개의 수능 한국사 문항이 과연 이를 담아내고 있는지 함께 고민해봤으면 좋겠다. 교과서 따로 실천 따로, 수업 따로 시험 따로라면, 그 오랜 시간 가르치고 배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역사 공부를 통해 우리는 현대 세계와 사회에 대한 통찰력을 확대할 수 있고, 스스로 문제의식을 지니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 또, 현재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의 기원과 의미를 평가할 수 있으며, 다양한 삶의 방식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다른 문화를 존중하는 태도를 기를 수 있다.'

태그:#수능 한국사, #역사 교육, #수능 변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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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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