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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효재 이화여대 명예교수
 이이효재 이화여대 명예교수
ⓒ 한국여성단체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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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자·사회학자이자 1세대 여성운동가였던 이이효재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지난 4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6세. 이이 교수는 여성운동의 선구자로서 한국에 최초로 여성학과 설치에 힘썼고, 주요 여성단체의 창립에 함께 했다. 호주제 폐지, 비례대표제 도입 및 여성 50% 할당 등의 성과 등도 이끌어냈다.

이밖에도 그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현 정의기억연대) 공동대표를 맡으며 국제사회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렸으며, 남북 분단이 여성과 가족, 사회 구조에 미친 영향을 연구한 분단사회학을 개척하면서 평화통일 운동에도 힘썼다. 

모든 '시작'에는 그가 있었다

한국 여성학과 여성운동의 역사 곳곳에서 그는 '창설자'거나 '초대 대표'등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만큼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앞에 서달라는 요구 또한 마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924년 경남 마산에서 태어난 이이효재 교수는 이화여대에서 영문학을 수료하고 미국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후 1958년 귀국해 이화여대에서 사회학과를 창설하고, 교수로 재직했다. 1977년에는 한국 최초의 여성학 학부 강좌를 만들어서 한국 현실에 맞는 여성학을 도입했고, 1978년에는 한국가족학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1983년에는 한국여성사회교육원을 창설하고, 1987년에는 한국여성민우회의 초대회장을 지냈다. 1991년에는 정대협 창설을 주도하고, 공동대표를 맡아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의 선봉에 서기도 했다.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11월 14일 서울 성평등활동센터에서 열린 <24년생 이이효재를 만나다>라는 행사에서 이이효재 선생이 '부모 성 같이 쓰기 1호가 된 배경을 밝혔다.

"호주제 폐지에 대한 국민적 여론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논의하면서 나왔던 것이 '부모 성 함께 쓰기'였다. 어떤분이 이런걸 주창해주면 좋을까 하는 고민을 했을 때, 여성학자이시고 여성운동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해오셨던 이효재 선생님을 1호로 문제를 제기하면 좋겠다 해서... (1997년) 3.8 세계여성의 날 대회서 부모성 함께 쓰기 선언을 했다.

이효재 선생님이 이이효재로 해서 1호로 선언하시고 그때 170여명의 사람들이 함께 참여했다. 저도 그때 '남윤인순'으로 호주제를 폐지하기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그때 시작을 해서 2005년도에 폐지시켰다."


실천하는 지식인
 
이이효재 이화여대 명예교수의 빈소가 5일 오전 경남 창원경상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6일이다.
 이이효재 이화여대 명예교수의 빈소가 5일 오전 경남 창원경상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6일이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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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을 살아가는 여성 가운데 단 한 명도 이이효재에게 빚지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말은 고인에 대한 추모사로 많이 쓰이고 있다. 그가 한국의 '여성학'과 '여성운동'의 기틀을 닦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빚지지 않은 사람을 '여성'으로만 국한시키기는 어렵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내 가족주의 연구도 그에게 약간 빚을 지고 있다.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고 적기도 했다.

이이효재 교수는 분단 체제를 조망하고 분석하는 작업도 활발히 했다. 그의 대표저서중 하나인 '분단 시대의 사회학'은 한국 사회를 독창적으로 분석한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회학자 김진균은 "우리 학계에 처음으로 여성이라는 변수를 도입한 점, 여성학에서도 역사적 이해를 도입해 토종 이론을 만들어낸 점, 분단사회학을 개척한 점"를 이이 교수의 학문적 업적으로 꼽기도 했다. 

동시에 이이효재 교수가 80년 이후에 민주화운동을 비롯해 일본군 '위안부'운동, 평화통일 운동 등에 뛰어들면서 평생을 사회운동에 헌신한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다. <24년생 이이효재를 만나다> 행사에 참여한 지은희 전 여성부 장관은 "우리가 그를 굉장히 존경하는 이유는 실천적 지식인이기 때문이다"라며 "5.18 이후에 '지식인 선언'을 해서 해직을 당하셨고, 학생들의 도피를 도왔다. 보통 사람이 하는 실천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는 80년 5.18 민주화항쟁이 일어나자 군사정권에 맞서는 '시국 선언'을 발표해 해직당했고, 84년에야 복직할 수 있었다. 90년도에 정년퇴임했지만 오히려 그의 발걸음은 더 바빠졌다. 주요 여성단체들의 대표나 회장을 그가 도맡아하면서 사회운동 전면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이효재 교수는 자신이 운동에 헌신하는 까닭을 '부채의식'이라고 밝혀왔다. 자신은 운이 좋아서 학교를 다닐 당시에, 같은 시기의 있던 여성들이 정신대(위안부)에 끌려갔다는 사실이 그가 정대협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 통일 문제에 천착하면서 90년대 초 남북 여성 교류의 물꼬를 트게 된 계기 또한, 한국 전쟁 당시 자신이 유학 중이어서 전쟁을 겪지 않았다는 점이 작용했다. 그 때문에 분단문제와 평화통일에 대한 깊은 의무감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온라인 사이트에 올라온 추모글 840개 넘어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정치권은 여야를 막론하고 '여성운동의 거목'이었던 이이효재 교수의 별세를 애도하고 있다. 여성계는 공동장례위원장 80명을 주축으로 추모식과 6일 '여성장'으로 치러지는 장례식을 준비한다.

한편 이이효재 교수를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이효재 선생님 온라인 추모(http://wsri.or.kr/) 사이트'에도 누리꾼들이 추도사가 끊이지 않고 올라오고 있다. 약 840개의 글(5일 오후 3시 기준) 중 유독 그의 업적에 감사한다는 내용의 글이 많았다."

"암흑의 시대를 걷으며 여성의 새날을 밝히신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지금 제가 이만큼 살 수 있게 애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더 넓은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이효재 교수의 추모식은 5일 오후 7시에 창원경상대학교병원 장례식장 VIP 1호실에서 엄수된다. 추모식은 온라인(한국여성단체연합 유튜브)으로 생중계 되어 일반 시민들도 볼 수 있다.
 

태그:#이이효재, #여성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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