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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살해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은 박 모씨(74, 맨 앞)가  처음으로 암매장지를 찾아 절을 올리고 있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 박 씨는 이 달초 언론보도를 통해 유해발굴 소식을 접하고
 22일 현장을 찾았다.
 1951년 살해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은 박 모씨(74, 맨 앞)가 처음으로 암매장지를 찾아 절을 올리고 있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 박 씨는 이 달초 언론보도를 통해 유해발굴 소식을 접하고 22일 현장을 찾았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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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보도 보고 너무 떨렸습니다."


22일 오전 11시. 충남 아산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 현장을 찾은 박모씨(74)의 목소리는 긴장한 듯 살짝 떨렸다.

얼굴에는 긴장감이 배어 있다. 그의 손에는 유해발굴 현장 소식이 실린 언론 보도 내용이 들려 있다. 미국 워싱턴 D.C에 사는 박씨는 이달 초, 인터넷으로 <오마이뉴스> 보도를 보고 유해발굴 소식을 접했다. 순간 그의 심장이 요동쳤다.

"내 어머니와 여동생이 살해된 곳이니까요. 우리 가족을 포함 친인척까지 모두 10명이 끌려가 묻힌 곳이니까요."

그는 잡혀 있던 수술 계획을 뒤로 미루고 한국행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21일 한국에 도착했고 다음 날인 이날 아침 서둘러 현장으로 내달렸다. 한국에 사는 박씨의 사촌누나(82)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함께 현장을 찾았다.

"가슴에 안고 평생을 살았습니다."


이 곳에서 일가족을 잃은 박 모씨(82)씨가 사촌 동생인 박 씨와 유해발굴 현장을 둘러본 후 눈물을 훔치고
 있다.
 이 곳에서 일가족을 잃은 박 모씨(82)씨가 사촌 동생인 박 씨와 유해발굴 현장을 둘러본 후 눈물을 훔치고 있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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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숨지던 1951년 1월 당시를 생생히 기억했다. 그의 나이 7살 때였다.


"아산 배방면 장재리에 살고 있었어요. 부모님과 두 여동생 등 우리 다섯 가족과 큰아버지 가족들이 다 모여 살았어요. 전쟁통에 아버지와 아버지 형제분들까지 인민군에게 협조했다는 이유로 경찰과 우익단체 사람들에게 끌려가 숨진 뒤였지요. 어느 날 동네 사람들을 다 모이라고 해 모였는데 창고에 죄 가뒀어요. 100~200명쯤 됐어요."

박씨도 그의 어머니와 창고에 함께 갇혔다. 그의 어머니 등에는 갓 돌을 넘긴 여동생이 업혀 있었다. 누군가가 살짝 그의 모친에게 '보내 주겠다'고 권하는 듯했다. 그의 모친은 "나 혼자만은 안 된다. 식구들 다 데리고 나가겠다"고 버텼다.

다시 누군가가 "'8살 미만 남자아이들만 나와 밥을 먹으라'며 창고 밖으로 불러냈다. 그의 어머니가 얼른 나가라는 듯 박씨의 등을 떠밀었다. 순간 생사의 갈림길이란 걸 아는 듯 엄마 등에 업힌 박씨의 여동생이 심하게 울기 시작했다. 

세 살 된 이종사촌과 함께 창고 밖으로 나왔다. 박씨를 불러낸 한 사내가 '얼른 집으로 가라'고 손짓했다. 창고 주변 난롯가에서는 한 남자가 장작개비로 누군가를 마구 두들겨 팼다. 그때마다 찢어질 듯한 비명이 고막을 울렸다. 혼자서 하룻밤을 잔 뒤 다음 날 아침 일찍, 창고로 달려갔다.


"차고가 텅 비었더라구…. 신발과 버선만 어지럽게 널려 있고. 어디로 다 끌고 간 거지."


박 씨의 어머니와 함께 숨진 여동생의 제적등본 . 호적에 이름(주화,柱花)을 올린 지 일 년여 만에  엄마의 등에 압힌 채 희생됐다.
 박 씨의 어머니와 함께 숨진 여동생의 제적등본 . 호적에 이름(주화,柱花)을 올린 지 일 년여 만에 엄마의 등에 압힌 채 희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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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당시 배방면 장재리 주민들은 도민증을 발급해 준다는 말에 모였다가 경찰에 의해 면사무소 옆 창고에 감금됐다. 감금기간은 2~3일 정도였는데, 이후 성재산 방공호 또는 이곳 중리 3리 폐금광에서 살해됐다.

함께 창고에 갇혀 있던 박씨의 사촌 누나도 끌려 갔다. 사촌 누나는 길게 늘어서 길을 걷던 도중 재빨리 민가로 뛰어들어 몸을 숨겼다. 박씨의 어머니와 한 살 여동생과 나머지 일행들은 그대로 이곳 폐금광으로 끌려와 총살됐다. 사촌 누나의 친정엄마와 남동생도 함께 희생됐다.  그의 사촌 누나가 혀를 차며 말했다.


"큰 집, 작은 집의 고모, 삼촌까지 죽은 우리 가족과 친척만 10명이라우.

박씨는 가슴 속 가득 한을 안고 지난 1973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하지만 어머니와 여동생과 생이별하던 그날의 기억은 평생 그를 괴롭혔다.

"한 살배기 여동생이 우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려 자다가도 깨요. 67년간을 이렇게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았어요. 친척 유가족 중 한 분은 트라우마로 한동안 술만 드시면 울면서 미국으로 전화하시곤 했죠."

박씨가 유해가 묻힌 폐금광 앞에 막걸리를 채운 뒤 절을 올렸다. 그의 고모들은 생전 유언처럼 '절대 희생자 유가족임을 밝히지 말라'고 당부했다. 억울하게 부모·형제를 잃고도 빨갱이 가족이라는 손가락질과 대를 이은 사회적 편견과 불이익을 겪었기 때문이다. 박씨와 그의 사촌 누나가 실명을 밝히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아산 유해발굴 현장에서 발굴된 희생자의 것으로 보이는 파란 구슬. 구슬 옆에는 10살 미만으로 보이는 아이의 뼈와 탄알, 탄피가 함께 발굴됐다. 발굴된 유해 대부분이 아이들과 부녀자다.  특히 두살 남짓한 영아의  뼈도
 발굴됐는데  박 씨의 당시 희생된 여동생은 갓 돌을 넘긴 때였다.
 아산 유해발굴 현장에서 발굴된 희생자의 것으로 보이는 파란 구슬. 구슬 옆에는 10살 미만으로 보이는 아이의 뼈와 탄알, 탄피가 함께 발굴됐다. 발굴된 유해 대부분이 아이들과 부녀자다. 특히 두살 남짓한 영아의 뼈도 발굴됐는데 박 씨의 당시 희생된 여동생은 갓 돌을 넘긴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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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주 유해발굴단장이 현장 상황을 설명했다.


"현재 유해 약 90여 구를 수습했는데, 은비녀등 비녀가 40여 개, 구슬과 장난감 등 어린아이 유품이 많아요. 희생자 대부분이 부녀자와 아이들입니다."

때맞춰 탕 탕 탕. 총소리가 울렸다. 박씨 일행이 움찔했다. 인근 예비군 훈련장에서 시작된 사격훈련이었다.

"총소리를 들으니 제 마음 속이 다시 웁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합니다. 전쟁은 없어야 합니다."

지난 달 22일부터 발굴을 시작한 이곳 아산시 배방읍 중리마을 뒷산 폐금광에는 약 200~300명의 시신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 기구인 진실 화해위원회는 지난 2009년 '아산 부역 혐의 희생 사건'과 관련 "단지 부역했다는 이유로, 또는 그의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적법한 절차 없이 살해한 행위는 명백한 위법이고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반인권적, 반인륜적 국가범죄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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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아산, #유해발굴, #부역혐의 , #민간인학살, #유기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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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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