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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 70일간의 남미 여행!'

이런 타이틀을 기대했다면 미안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것과는 멀다. 신비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여행에 대한 예찬은 서점에 많지 않은가!

낯선 이성과의 로맨스, 친절하고 때묻지 않은 현지인과의 만남, 그 끝에서 얻은 깨달음과 자기반성까지. 이 기승전결이 완벽한 아름다운 여행기에 딴죽을 걸며 나는 이렇게 외치고 싶다.

우리의 자아는 남미에 없다고! (아, 그렇다고 인도에 가셔도 없습니다)

페루 마추피추
 페루 마추피추
ⓒ 박초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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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일까. 남미는 여행 고수들의 종착지이자 젊은이들의 버킷리스트에서 빠지지 않는 항목 아닌가! 맞다. 나는 70일 동안 아르헨티나, 칠레, 볼리비아, 페루, 멕시코, 콜롬비아, 쿠바를 돌았다.

실제로 남미를 여행하며 만난 한국인은 대부분 1년 이상의 장기여행자였고 내 버킷리스트에도 남미여행이 있었다. 또한, 결론적으로 남미여행은 내 평생 잊지 못할 좋은 경험이었다. 비록 기대한 것과 다른 방식이었지만 말이다.

하나, 당신의 자아는 남미에 없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 박초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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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나는 일상의 매너리즘에 지쳐 있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내가 개척한 길로 들어섰다고 생각했는데 왜인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나를 완전히 낯선 곳으로 던져넣고 싶었다. 들뢰즈도 외부에서 다가오는 사건이 나의 성장 가능성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낯선 여행지에서라면 나도 변화하지 않을까? 새로운 세계가 마법처럼 나를 기다리지 않을까? 그런 마음에 2주 만에 남미행을 결정했다. 그러니 실은 내가 변하기로 결심했다기보다는 내가 머무르는 곳을 바꿈으로써 운명이 나를 바꿔주길 기대한 셈이다.

애틀란타를 지나 아르헨티나에 도착해서 2주를 보내고 나서야 '무계획이 계획'이라는 나의 안일한 태도가 좋은 패를 기다리는 도박꾼의 마음, 혹은 점쟁이에게 신년운세를 묻는 아낙네의 마음과 다를 바 없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행지에서 친구를 사귀고 싶다면 사람을 만나고, 도전을 하고 싶다면 이벤트를 찾아다니고, 공부하고 싶다면 유적지를 찾아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 그것이 눈앞에 왔을 때조차 손 내밀지 못한다.

친구 하나 없는 아르헨티나에서 지구 반대편에서 온 낯선 동양인에게 갑자기 새로운 세상을 보여줄 현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유명하다는 관광지를 모두 돌아다녔지만(예술가들이 모이는 산텔모 시장, 가난한 항구 마을 라보카, 도시 중앙에 있는 셀럽들의 묘지 레골라토 등) 나는 계속 '관광객'에 머무를 뿐이었다.

거대한 이과수폭포와 우유니 사막이 4D 영화처럼 격하게 내 앞을 스쳐지나갔지만 어느 것도 내 깊숙이 들어와 날 쥐고 흔들지 않았다. 사건이 내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내가 사건으로 다가가주리! 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아무 곳에서나. 무슨 이야기라도.

이과수 폭포
 이과수 폭포
ⓒ 박초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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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현지인들은 현지인일 뿐, 현자가 아니다

일단 말을 걸기로 하긴 하였는데. 아무래도 한 편의 완벽한 서사를 갖춘 여행기를 너무 많이 읽었나 보다. 여행기에선 다들 몇 명씩, 가끔은 수십 명씩 깨달음을 주는 이들을 만나던데. (Welcome to 현자의 세계!)

가난하지만 자신의 것을 나눌 줄 아는 소년의 미소라든지, 시골 농부의 삶을 초월한 멘트 같은 것 말이다. 말은 안 했지만 나도 여행지에서 현자인 현지인을 만나길 내심 기대했었나보다. 그러나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 역시 2017년을 사는 현대인일 뿐이었다.

페루의 리마는 강남 테헤란로를 방불케 하는 현대적인 도시였고 쿠바는 뉴욕보다 심한 자본주의의 심장이었다. 산티아고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피곤이, 아바나 상인의 눈에는 돈이, 부에노스아이레스 사람들의 어깨에선 고단함이 보였다.

GDP에 비해 헉 소리나게 높은 물가 때문일까. 아니면 내 기대가 말도 안 되는 걸까. 생각해보면 이 다이내믹 코리아에 온 지구 반대편 여행자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동양철학의 마음' 따위를 기대했다면 나라도 코웃음쳤을 거다. 우리에게는 여행지이지만 그들에게는 일상을 보내는 터전이니까.

그렇게 현지인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나니 여행이 더 여유로워졌다. 여행지에서는 사기꾼도 많았지만(멕시코 공항에서 공항 직원을 사칭하는 사기꾼에게, 늦게 도착했으니 페널티를 내라는 말을 들었다), 대가 없이 도움을 주는 사람을 훨씬 더 많이 만났다.

히론에서 현금을 인출할 방법이 없어 쩔쩔맬 때(쿠바의 시골에서 카드 사용이란 언감생심) 돈을 빌려준 아주머니와 아타카마의 밤길을 걸을 때 나를 집 앞까지 안내해 준 칠레 청년 같은 사람들.

카메라를 훔쳐가라는 듯 목에 걸고 다니던 나를 걱정한 건 오히려 남미 현지인들이었다. 남미 사람들이 내게 가장 많이 보여준 제스처는 아마 카메라를 숨기라는 손짓이었을 거다.

페루 우루밤바 마을축제
 페루 우루밤바 마을축제
ⓒ 박초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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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 히론의 해변
 쿠바 히론의 해변
ⓒ 박초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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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흔들리는 것은 깃발도, 바람도 아니고 내 마음이라는 게 이건가 싶었다. 남미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애초에 내 멋대로 생각한 것뿐. 내가 여행지에서 얻는 깨달음이란 실은 떠나기 전부터 내 마음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싶었다.

셋, 볕 좋은 해변에 누워 칵테일을 마시길 상상했다면 하와이는 어떠신지요?

남미를 상상하면 엉뚱하게도 훌라춤(하와이가 왜 여기에)과 작열하는 태양, 바다가 떠오른다. 초콜릿 복근을 가진 오빠들과 육감적인 몸을 자랑하는 언니들까지 덤으로. 게다가 상다리 휘어지는 음식과 서비스를 어느 정도는 싸게(!)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까지.

그러나 진실은 이렇다. 남미도 춥다. 워낙 큰 대륙이라 도시를 이동할 때마다 온갖 계절을 경험할 수 있지만 추운 도시를 겨울에 방문하면 내복이 간절하다. 쿠스코와 라파스는 밤이면 2도까지 내려갔다. 사막의 별을 보러 새벽에 나갔다가 영하의 날씨에 감기에 걸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난방기구가 없다. 실내에서도 옷을 두텁게 입고 다니는 것이 문화다. 전기장판이 어찌나 그립던지! 무엇보다 남미는 비싸다. 부에노스아이레스나 산티아고에서 소박한 한 끼를 먹으려면 인당 1~2만 원이 우습다. 장바구니 물가도 서울 못지않다. 페루나 볼리비아, 멕시코 물가는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그곳에서도 유명한 관광지(마추픽추나 우유니 사막, 칸쿤)에 간다면 호스텔에서 빵 주워 먹으며 살아야 한다.

우유니 사막
 우유니 사막
ⓒ 박초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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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은 역시 사서 해야 제맛이라는 피학적 여행 중독자, 고생 애호가에게 남미는 유토피아요 무릉도원이다. 허나 편하게 리조트에 누워 볕을 즐기는 휴식을 상상하는 자, 얇아지는 지갑을 각오할지어다.

낯섦을 각오하고 온다면 남미는 정말 많은 것을 보여주는 나라다. 남미 여행자들의 카톡방에는 절대 항공권을 다 끊고 와서는 안 된다는 조언이 정설처럼 내려온다. 무슨 일이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것이 남미, 절대 계획대로 여행이 흘러가지 않는 곳이 남미이기 때문이란다. 그런 갑작스러움이 남미의 매력이다.

남미에서는 일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으면 불평하기보다 그걸 받아들이고 즐기는 편이 좋다. 항의한다고 비행기가 빨리 오지도 않고 답답해한다고 와이파이가 터지는 것도 아니니까(쿠바는 인터넷이 안 됩니다). 삶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시선을 바꿀 수밖엔 없다는 것에 익숙해진다.

쿠바 아바나 골목
 쿠바 아바나 골목
ⓒ 박초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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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문득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 치운다. 그리고 세계 여행을 떠난다. 1년 동안 갖은 모험과 낯선 타인과의 로맨스를 겪는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주머니는 비었지만 마음만은 비장하다.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 그럴 듯한 인생 역전기는 뻔한 신데렐라 스토리와 마찬 가지로 '그 후에 그들은 어떻게 살았는가'가 빠져있다. 또한 그들이 1년간 겪었던 삶이 과연 그 전의 삶과 그렇게 달랐는가에 대한 논의도. 타인과의 로맨스가 과연 낭만적이기만 했느냐하는 딴지 역시 없다.

하여, 70일간의 남미 여행기 3부작을 통해 밝히려 한다. 어디에 머무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머무는가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계간 <딴짓>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태그:#남미, #여행, #쿠바, #아르헤니나, #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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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 밥 벌어 먹고 사는 프리랜서 작가 딴짓매거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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